소설리스트

혈귀귀환-95화 (95/316)

95화 청해성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대지에 잘 닿지 않는 어느 숲.

은은하게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끼이이익, 끼익.

끼익?

끽끽.

본래 숲에는 수많은 맹수가 살아가고 있다. 떼를 지어 사냥감을 잡아먹는 늑대 무리나 먹잇감을 찾으러 내려온 호랑이 따위를 간간이 마주칠 수 있었다. 야밤에 홀로 숲을 다니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숲의 중심부엔 산발한 머리의 사내가 넓고 평평한 바위에 기댄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이 태평한 표정을 하고 있다.

끼이익.

끼익.

점점 ‘그것’이 내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숲의 주인인 회색 갈기의 늑대 무리마저 그 소리를 듣고 도망쳤다. 하지만 사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희미한 피 냄새가 공간에 감돌기 시작했고…….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것이 바위에 기댄 사내의 앞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사슴이군.”

끼이익!

마치 대답을 하듯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미가 몸통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재롱을 부리듯 벌러덩 뒤로 누워 버린다.

“그래, 잘했다.”

끼이익!

칭찬을 받은 거미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얇고 가는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보았으면 경악했으리라. 마치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고 있는 놈은 평범한 거미가 아니었다.

인면지주.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진 거미 영물이었다.

간혹 중원에는 영물을 기르고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인면지주는 길들일 수 없는 영물에 속했다. 애초에 인간과 소통할 지능도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인면지주를 길들이려 했던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만독문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인면지주를 길들이려고 했었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처럼 제때 먹이도 주고 당근과 채찍을 이용하여 훈육하려 했다. 하지만 인면지주는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맹수였다.

하지만 지금 인면지주는 인간의 손에 길들어져 있었다.

먹이를 사냥해 오고 주인에게 그것을 바칠 정도로 말이다.

인면지주의 주인 황극린은 재롱을 피우는 녀석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수하가 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영물 수하를 둘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차라리 사람보다 더 편한 것도 있지.’

세부적인 명령은 아직 수행할 수 없었지만, 사냥을 해 오라는 명령 정도는 잘 알아듣는다. 거기다 인면지주는 배신할 리가 없는 수하였다. 사람은 사정에 따라 배신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흑살문에서도 인간을 믿지 못하여 혈고독을 심장에 심어 놓았지 않은가?

인면지주는 그러한 것이 필요가 없다.

맹목적으로 주인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이렇게 사냥을 해 오라는 명에 금방 사슴을 잡아 오지 않았는가?

“흑주, 고생했다.”

그래서 황극린은 인면지주에게 이름도 지어 주었다.

녀석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렇게 흑주를 쓰다듬던 황극린의 손이 멈춘다.

“숨어라.”

흑주는 대답하지 않고, 순식간에 황극린의 행낭으로 파고들었다.

황극린은 화음현을 떠나 여정하며 확실한 명령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경계해라. 사냥해라. 숨어라.

화음현을 떠난 지 석 달이 되었을 무렵엔 흑주는 그 명령을 지체하지 않고 수행할 수준에 이르렀다. 황극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 ‘냄새’로 판단컨대 그들은 무림인이 분명했다. 그것도 꽤 실력이 뛰어난 무인.

“…….”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와 그를 따르는 두 명의 젊은 남녀.

황극린의 존재를 확인한 그들이 걸음을 멈춘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피로가 얼굴에 가득 담긴 중년 사내였다.

“무림인이시오?”

“그렇소.”

“어디 문파의 출신이시오?”

“당신은 어디 소속이시오?”

황극린이 되레 질문으로 받아치자 중년 사내의 표정이 굳는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감숙성은 정파의 권역이었지만, 주위로는 사흑련의 세력이 포진해 있다. 정파와 사파는 조용한 전쟁을 이어 가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중원에서 악명 높은 혈마교와 그나마 가까웠다.

“통성명을 나누기 싫다면, 가던 길 가길 바라오.”

“그것만 말씀해 주시오. 혹, 사흑련의 출신이오?”

“아니오.”

황극린은 염증을 느꼈다.

굳이 저들과 통성명을 하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인적이 드문 숲에서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건 황극린에 성격에 맞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가던 길 가길 바라오.”

황극린의 퉁명스러운 말에 뒤에 있던 젊은 무인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 댔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자신의 또래 같은데, 무림의 선배에게 무슨 말버릇이 저런가? 먼저 신분과 소속을 밝히고 인사해도 모자를 판에…….

하지만 함부로 나서진 않았다.

그나마 교육이 된 모양이다.

‘무림맹의 무인들이로군.’

이미 황극린은 그들의 소속을 알아챘다. 청해성에서 저런 몰골로 다니는 이들은 뻔했다. 혈마교의 교도들이 중원을 침범하지 않나 감시하는 부대의 소속이리라.

“우린 바닥에 고인 피의 흔적을 따라 이곳에 왔소.”

“사슴이오.”

황극린의 말대로 그의 앞에는 죽은 사슴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었다. 순간 두 명의 젊은 무인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꽤 오랜 시간의 탐색 임무를 마치고 서녕으로 복귀하던 차에 사람과 마주했다. 거기다 그 사람은 사슴을 가지고 있었다.

‘사흑련 출신이 아니라 했지만 속단할 수 없다. 일단 대화를 더 해 봐야겠어.’

중년 사내가 황극린의 곁으로 다가온다.

“돈을 줄 터이니 사슴 고기를 나눠 줄 수 있겠소?”

“싫소.”

황극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자 중년 사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우린 무림맹 암영단(暗影團) 소속이오.”

암영단.

황극린도 이름은 들어 보았다. 정파의 세력권이 닿지 않는 지역에서 적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은 무림맹의 전투단 중 하나였다.

“그렇군.”

“귀하는 어디 소속이시오?”

“만뇌문이오.”

“만뇌문?”

당연히 청해성에서 오랫동안 잠복하며 혈마교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만뇌문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암영단의 4조장 등위군은 황극린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문파 이름을 지어냈다고 말이다.

“아, 만뇌문 소속이셨구려. 같은 정파인끼리 조금만 도와주실 수 없겠소? 아이들이 오랫동안 식사하지 못해 굶은 상태라오.”

“…….”

황극린의 시선이 젊은 두 무인에게로 향한다.

그의 청각은 범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예리하다. 두 사람의 배 속이 요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지.”

황극린이 수락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등위군이었기에 약간 당황했지만, 황급히 두 사람을 부른다.

“소협께서 사슴을 나눠 주시기로 했다. 이리 와라.”

- 혈마교도일 수도 있으니 언행을 주의하도록.

“예, 조장님!”

황극린은 대충 사슴의 살점을 잘라 그들에게 전해 줬다.

귀찮게 불에 손수 구워서 줄 필요까진 없었으니까.

황극린과 암영단의 4조가 일정 거리를 둔 채로 사슴 고기를 굽는다.

모닥불을 피우고, 나뭇가지에 사슴 고기를 꿰어 직화로 익히니 노릇노릇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이 근방엔 늑대 무리가 많소. 홀로 숲에 있는 것을 보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가 보오?”

“그렇소.”

황극린의 대답에 등위군이 능청스럽게 조언한다.

“늑대는 쉽게 보면 안 되오. 놈들은 무리를 지어서 다니니 작정하고 달려들면 실력이 있어도 위험할 수도 있소.”

“그렇군.”

늑대에 대한 조언을 이어 나가던 등위군이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군. 청해성에 꽤 오래 있었지만 만뇌문이라는 문파는 들어 본 적이 없소. 정확히 어디에 있는 문파요?”

“강서성이오.”

강서성?

뚱딴지같은 대답에 등위군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태연하게 거짓을 말하는군.’

어쩌면 이 사내는 사흑련의 출신일 수도 있었다.

등위군은 조원들에게 전투가 일어날 수 있다고 전음을 보내고는 말한다.

“강서성에서 왜 청해성까지 오셨소?”

황극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병을 꺼내더니 안에 담긴 것을 잘 구워진 사슴 고기에 바르고 있었다.

‘무슨 냄새가…….’

조원들이 꽤 오랫동안 식사하지 못했듯 등위군도 마찬가지였다.

냄새를 맡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설마 독?’

냄새로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산공독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방심을 유발하여 빈틈을 만들어 자신을 공격하려고 할 수도 있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허리춤의 검을 잡는다. 만약 허튼 행동을 한다면 바로 뽑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양념장이오.”

“응?”

황극린이 양념이 발린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독이라면 저렇게 먹을 수가 없으리라.

“대체 무슨 양념이오? 처음 맡는 냄새인데…….”

“드셔 보겠소?”

꿀꺽.

등위군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냄새를 맡은 것뿐인데도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인다. 멀리서 간도 하지 않고 덜 익은 사슴 고기를 뜯던 조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잘 익은 사슴 고기에 양념이 발라지니 뇌불도 반했던 황홀한 냄새가 퍼져 나간 탓이다.

“그래도 되겠소……?”

황극린이 양념통을 건네준다.

“독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고맙소.”

갑자기 무언가 친절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의심이 생겨난다. 갑자기 왜 양념을 건네주는 걸까? 그런데 양념에 독이 있다면 저렇게 고기에 발라서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해독제를 함께 먹은 걸까?

등위군이 고민하고 있을 때.

“나도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무엇이오?”

“혹시 최근 청해성 서녕에서 의문의 실종 사건이…….”

벌떡!

실종이라는 말에 등위군이 벌떡 일어선다. 그러자 사슴 고기를 뜯고 있던 두 명의 조원도 마찬가지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황극린을 노려본다.

“그걸 왜 묻는 것이오?”

황극린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그의 표적은 서녕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에게 뜯어낼 정보가 꽤 있겠군.’

황극린이 바로 북해로 가지 않고 청해성에 들른 이유는 간단했다.

혈귀비에게 들었던 천흉의 은거지가 청해성에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천흉은 미리 싹을 잘라 두는 게 좋았다. 언젠가 천흉은 또 남궁운혜를 노릴 것이다.

천흉까지 처단한다면 이제 남궁운혜와의 연은 완전히 끝난다.

“왜 강서성에서 청해성까지 왔냐고 물었소? 원수를 찾기 위해서요.”

“원수? 실종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안다는 말이오?”

“그렇소.”

“대체 그놈이 누구요? 어떤 마두가…….”

“당신은 모를 것이오. 아직 무림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허 참, 그걸 믿으란 말이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라오.”

“갑자기 그걸 왜 말해 주는 것이오?”

황극린이 고개를 돌려 등위군을 바라본다.

“무림맹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소? 혹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물어본 것이오.”

서녕에 가서 직접 탐색할 수도 있으리라. 혈귀비를 찾아냈던 것처럼 냄새를 맡아서 말이다. 하지만 아직 천흉이 서녕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수색하다가 한번 길이 엇갈리면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천흉이 머무는 곳의 특징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는다.

황극린의 능력을 활용한 수색은 그다음이다.

“서녕 말고도 실종이 많이 일어나는 마을이나 현을 알고 있소?”

“서녕과 대통현, 악도현에서도 실종자가 꽤 나오고 있지. 본단에서 그걸 해결하려고 수색했지만, 확실히 알아낸 것은 없소. 아마 흑사회 같은 놈들이 벌인 인신매매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고 있소.”

“흑사회라…….”

그러고 보니 흑사회 놈들도 뿌리를 뽑아야 했다.

놈들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하나하나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들의 본체를 뿌리 뽑아야 한다. 구심점이 무너지면 흑사회는 알아서 자멸하게 될 것이다.

‘놈들의 본거지는 사천성에 있다. 북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단해야겠어.’

일정이 꼬이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일정을 세워 두는 게 좋았다.

북해에서 만약 음기를 지닌 영약이나 영물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성장했는지 흑사회를 치면서 확인하면 될 것이다.

흑사회주는 그들의 규모만큼이나 무공이 강했다.

‘그건 그렇고…….’

황극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혹시 쫓기고 있었소?”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들을 노리는 자들이 있군.”

우리를 노린다고?

등위군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큭!”

꽤 먼 거리에서 누군가의 고통 섞인 신음이 전해졌다.

‘암기라고? 출수하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등위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았다는 사실보다 황극린이 방금 보여 준 날렵하고 은밀한 움직임에 경악했다. 누군가의 신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그가 암기를 출수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내가… 상대의 실력을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

황극린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떠본 이유는 간단했다.

절대적인 무위가 자신이 앞서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상한 점이 발견되면 무력으로 제압하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이자…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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