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92화 (92/316)

92화 내기

화산파의 운평자는 침울했다.

화산에서 개최되는 비무대회에서 결승에 올라가기는커녕 4강전에서 탈락해 버렸다. 당연히 사문의 어르신들게 죄송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10개의 문파가 3년마다 번갈아 가며 개최하는 용봉지회다. 그러니 화산파에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30년이나 남은 상황이다.

이제껏 화산파가 개최한 용봉지회에서 화산의 제자가 우승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다. 자신이 그것을 모두 깨 버렸다. 소림에서 천덕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게 가로막혀 패배해 버렸다.

“하아…….”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비무가 끝난 후, 운평자는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었다.

“끌끌, 뭘 그리 한숨 쉬느냐?”

“자, 자, 자, 장문인을 뵙습니다!”

운평자가 벌떡 일어서서 예를 표한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도 장문인 앞에서 한숨을 내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평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는다.

자신은 화산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장문인께선 어떤 불호령을 내리실까?

‘10년의 폐관이라도 군말 없이 받아 들어야 한다.’

아니, 장문인께서 명하지 않으시더라도 스스로 폐관에 들어가야 한다. 4강에서 탈락한 아픔을 발판 삼아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이 화산파의 대제자가 해야 할 일이다.

“장문인, 제자가 부족하여 4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봉지회가 끝나는 대로 다시 폐관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외친다.

물론, 그 내면에는 짙은 패배감이 물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화산의 장문인 화염신황은 그런 운평자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뜬금없는 것을 묻는다.

“넌 누가 우승할 것 같으냐?”

“예?”

“소림의 제자와 만뇌문의 제자 중 누가 우세할 것 같으냐?”

“제자의 미숙한 판단으로는 천덕 스님이 유리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더냐?”

“그의 육신은 평범한 범주에서 생각할 수 없는 단단함과 탄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강기로는 그의 몸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지요. 그보다 더 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거나, 내력의 제어력이 더 뛰어나야…….”

화염신황이 손을 내젓는다.

“내기하지 않겠느냐?”

“내, 내기 말씀입니까?”

천하의 화산파 장문인과 내기라니?

당연히 운평자는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가 말하면 예,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와 반대의 의견을 내서 내기 따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화염신황이 말을 이어 나간다.

“넌 소림의 제자가 우승하겠다고 했지. 난 만뇌문의 제자가 우승하겠다는 것에 걸겠다.”

“제가 어찌 감히 장문인과 내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괜찮다.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지 않겠느냐?”

장문인께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장문인께서는 황극린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시는 건가?’

아니면 내기를 빙자하여 자신에게 무언가 가르침을 내려 주시려고 하는 건가?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운평자였다.

“네가 내기에서 이기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마.”

그걸 꿰뚫기라도 하듯 화염신황이 말한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운평자는 장문인께서 자신을 달래 주는 것이라 착각하고야 말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끌끌, 감사하긴.”

화염신황은 유유히 자리를 떠나갔다.

운평자는 그런 장문인을 보고 다짐한다.

‘장문인의 배려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더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장문인께서 내기를 빙자하여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 하신다. 이런 상황에서 한숨만 폭 내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용봉지회는 끝이 났지만, 아직 그의 무인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 *

용봉지회 결승 당일.

만뇌문의 황극린과 소림사의 천덕이 맞붙는 날이다. 당연히 대부분 천덕의 우승을 점치고 있다. 천덕은 이미 우승 후보였던 팽여해와 운평자 등을 꺾고 올라왔다. 그의 비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천덕의 무공이 궤를 달리한다고 생각했다.

중원 역사상 아무도 이룬 적이 없는 경지.

금강불괴신공을 이룰 수도 있는 무인.

그것이 천덕이다.

마치 불상처럼 금빛으로 물들어 상대의 강기를 모두 튕겨 내 버리니 후기지수들이 뚫어 내질 못한다. 거기다 그가 가진 힘은 그게 끝이 아니다. 소림의 절기를 모두 익혔기에 그의 권법 또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그를 이길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후기지수라 분류하고 있었지만, 이미 천덕은 기성 무림인이라 불려도 무방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런 천덕을 상대하는 이는 만뇌문의 황극린.

만뇌문은 용봉지회를 거치며 꽤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강서성 남창에 새로이 개파한 중소문파. 남창에서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찬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그 악명 높은 광견살검도 만뇌문에 합류했다.

그리 무시할 만한 문파가 아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소림사라면?

만뇌문의 작은 명성은 묻혀 버리고 만다.

거기다 황극린이 이제까지의 비무에서 실력을 증명했다고 하더라도, 천덕보다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 또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모용가아에게 승리하긴 했지만, 본선 첫 경기에서 패배한 탓인지 현재 모용가아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모용 소협이 과평가된 것이 분명하다니까.”

한 무리의 무인들이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천덕의 비무를 보고 흠뻑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자신보다 어리다고 하더라도 무공이 강하면 대협이고 형님이 되는 것이 강호다. 그렇다 보니 상대인 황극린을 올려 치는 것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현재 황극린을 응원하는 무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그의 은밀하고 재빠른 보법이었다.

모용가아의 쾌검을 모두 피해 냈으니, 천덕의 공격이 과연 그에게 명중이나 하겠냐고 주장했다. 당연히 천덕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노릇이다.

모용가아?

솔직히 말해서 본선 첫 경기에 탈락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만약 그가 팽여해나 운평자와 붙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패배했을 것이다.

이제는 모용가아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검격 한 번을 명중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어찌 말이 안 되는가? 황 소협께서 보여 줬지 않은가?”

“아닐세. 그건 황 소협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자네는 지금 착각하는 것이라네! 반대로 생각하면 모용 소협이 맞히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아니, 지금 모용세가 대공자를 무시하는가?”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생각해 보게. 팽 소협이나 운 소협이 황소협과 맞붙었다고 상상이라도 해 보게. 그들이 한 번도 공격을 명중하지 못하겠는가?”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뭐, 천덕 스님께서 결과로 증명할 테니 너무 애쓰진 말게. 애초에 중소문파 출신이 용봉지회에 우승했던 경우? 어디 보자, 15년 전에 한 번 있었군.”

“그래도…….”

“그래도는 뭔 그래도인가? 그냥 지켜보세. 나도 설명해 주기 지치는군. 어차피 결과로 보면 되지 않은가?”

비무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비무장 이곳저곳에서 토론이 펼쳐지고 있다. 대부분 천덕이 우세하다고 주장하는 쪽이 일방적으로 득세하고 있었다.

‘정말 말들이 많군.’

무림의 문파나 가문들이 평판에 지독히도 신경 쓰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람이라는 족속들은 모이면 화젯거리를 찾아 신랄하게 비난을 쏟아 낸다. 패자의 숙명이라고 할까? 모용가아나 운평자 등이 기를 쓰고 우승하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가문과 사문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패배한 그들로서는 세인들의 비아냥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그를 놀리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나서 난장판을 만들 수는 없었다. 비무장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을 상대로 검을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오히려 꼴만 더 우스워질 것이다.

‘당신이 이겨 줘야 하오.’

당연히 모용가아는 황극린의 승리를 기원했다.

지금 화음현에서 모용세가의 평판은 확 낮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황극린이 승리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모용세가의 평판 자체가 달라진다.

결과에 따라 지금 천덕을 찬양하는 무인들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이들이다. 결과로 증명하는 것. 황극린이 결승에서 천덕을 꺾어 버리면…….

‘나 또한 천덕과 같은 급이 된다.’

그렇기에 모용가아는 굳이 그의 비무를 관전하러 왔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서.

당연히 천덕에게 패배한 운평자나 팽여해는 천덕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제 곧 28회 용봉지회 결승이 시작됩니다. 모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아아아아-!”

화산의 장로가 비무장에 오른다.

처음으로 호명된 건 만뇌문의 황극린이다.

“꼭 이겨 줘라!”

“너한테 금자 한 냥을 걸었다고! 네가 이기면 열 배를 먹는다!”

용봉지회는 승부로 인한 도박을 금기한다. 하지만 지인들끼리 모여서 돈을 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몇몇 이들은 결승의 결과에 도박장을 열었다. 황극린을 응원하는 이들은 소위 대박을 노리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도박 따위에 관심 없는 대부분 관중은…….

소림사의 천덕이 등장하자 거대한 함성을 토해 냈다. 대부분 천덕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리 중소문파 출신 영웅의 등장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소림파가 여태 무림에서 쌓아 올린 명예를 무시할 수는 없다.

불안한 영웅의 등장과 성공 가도를 달리리라 확실시된 영웅.

소림파는 무림의 안녕을 위해 굳건히 오랜 세월을 버텨 온 문파였다. 소림의 출신이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여 새로운 영웅으로 거론되는 게 더 멋지고 안정된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미타불. 잘 부탁드립니다, 황 시주.”

“예.”

두 사람이 서로에게 포권지례로 인사한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당연히 모두가 천덕의 이름을 외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비무를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결승에서 가장 중요한 관전 요소는 하나였다.

황극린이 이번에도 모든 공격을 피해 낼 수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비무의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천덕이 황극린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팽여해의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도격을 막아 내고,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무공을 이어받은 운평자도 그의 반탄지기를 뚫어 내지 못했으니까.

먼저 움직인 것은 천덕이었다.

굳이 황극린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천덕을 찬양하던 무인 중 하나가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린다.

“거봐, 황 소협은 피하기만 할…….”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당연히 황극린이 이번 비무에서도 모용가아와 보여 줬던 비무처럼 공격을 피하기만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동시에 황극린 또한 천덕에게 정면으로 다가간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장점을 버리고 천덕과 정면 대결을 하려 하는 건가?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을 때.

황극린의 발과 손에서 작은 뇌전이 튀어 올랐다.

혈풍뇌전신공은 내력을 일으켜 보법을 펼치거나 주먹을 뻗을 때 자연스레 뇌전을 방출하곤 한다. 황극린은 부족한 내공을 아끼고 또 아끼기 위해서 이제까지 최대한 내력의 사용을 제한해 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용봉지회의 우승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굳이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천덕의 육신이 얼마나 단단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황극린은 간만에 재미를 느꼈다.

과연 소림사의 절기로 단련한 육신과 영약으로 새롭게 태어난 육신 중에 뭐가 더 단단할까?

과연 천덕은 자신의 진심 어린 주먹을 얼마나 버텨 낼 수 있을까?

다소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황극린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타닷.

황극린이 모용가아와의 비무에서 보여 줬던 속도로 그의 품을 파고든다. 하지만 모용가아는 검을 사용했기에 거리를 벌리려 애썼다면, 천덕은 오히려 황극린이 다가오는 것을 선호했다. 그 또한 권법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아미타불!”

천덕이 불호를 기합처럼 외치며 주먹을 찔러 넣는다.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의 복부에 꽂힌다.

쿵!

콰지지직!

서로 복부를 얻어맞았음에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또다시 두 사람이 공방을 주고받는다.

쿵!

콰지직!

왜인지 천덕의 피부에 물든 금빛 광채가 실시간으로 진해지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콰지지직! 콰아지지직!

그렇게 얼마나 서로의 육신을 타격했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황극린이 힘 싸움에서도 패배했어야 했다. 천덕은 팽여해와의 정면 대결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까.

“왜……?”

천덕을 광적으로 응원하던 사내가 입을 벌린다.

처음의 공방에서 먼저 물러선 쪽은…….

다름 아닌 천덕이었다.

“시주의 무공은…….”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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