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어차피 우승은
쿠우웅! 쿠우우웅!
강철로 만들어진 도와 인간의 육신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관중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팽여해의 일격은 강철마저 찢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으며, 천덕의 육신은 강기가 깃든 도를 튕겨 낼 정도로 단단했다.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여해는 이번 비무에서 크나큰 성장을 이루었다.
황극린에게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았다. 당연히 자신의 힘이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냈고, 그는 용봉지회 기간 내내 육체 단련에 힘을 쏟았다.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것만으로 유의미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다른 무인이라면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팽여해는 다르다.
그는 투지와 투기를 기반으로 하여 내공을 다룬다.
강한 상대와 싸우면 싸울수록 그는 좌절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진다. 단순히 싸우면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패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팽여해의 재능이란 그런 것이다.
끝없는 욕구. 더 강한 상대와 싸우려 하는 성격.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
투기에서 기반한 팽여해의 성향은 그를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천덕과의 비무에서 팽여해는 성장을 증명했다.
찬란한 푸른빛으로 뒤덮인 팽여해의 도.
그의 도에는 도강(刀罡)이 번뜩이고 있었다. 후기지수가 도강을 다루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팽여해는 실전과도 같은 비무에서 도강을 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섰다. 그것을 본 관중이 경악한다.
“도강이다!”
“역시 거룡이다!”
팽여해의 상대인 천덕 또한 감탄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시군요.”
“크하하하핫! 누구 때문에 노력을 좀 했소!”
“그렇다면 저도 적당히 상대해서는 안 되겠군요.”
“그것참 듣기 좋은 소리로군!”
천덕의 양손에서 금빛이 폭발한다. 기가 모이고 모이면 그것이 색으로 발현된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은 금빛의 권강(拳罡)이었다.
“이제 끝을 냅시다!”
“좋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쿠웅!
푸른 도강과 금빛의 권강이 충돌했다.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모두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격돌을 바라보는 가운데…….
“쿨럭…….”
팽여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핏줄기가 흐르고 있다. 기와 기의 격돌에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천덕의 안색 또한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 졌소.”
팽여해가 스스로 패배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길 것이오.”
“하하, 긴장해야겠군요.”
천덕이 손을 내밀었다.
팽여해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소림사 천덕의 승리!”
심판까지 천덕의 승리를 선언하자 관중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
“둘 다 멋지다!”
“최고다!”
모두의 머릿속에 천덕의 이름이 새겨졌다.
비무에서 도강을 발현하는 팽여해를 꺾은 천덕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우승을 차지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오늘 비무가 결승이라 해도 이견이 없을 수준이었다.
“팽여해는 더 성장했군요. 천덕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요. 황 소협께서 긴장하셔야겠어요.”
언교연의 말에 광견살검이 피식한다.
“넌 아직 황 장로님의 실력을 잘 모르는구나.”
“네?”
“결승에서 봐라. 황 장로님의 진짜 실력을 말이야.”
언교연은 긴가민가했다.
황극린도 능히 칠룡에 들어갈 실력이다. 하지만 오늘 보여 준 천덕의 실력은 칠룡에서도 최상위에 속할 수준이었다. 또한, 그가 익힌 무공 또한 이질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도기를 견뎌 내는 육신이라니? 상시 반탄지기를 발동하는 것을 볼 때, 기의 제어력도 대단했으며 내력의 양 또한 상당한 듯했다.
천덕과의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황극린이라도 말이다.
언교연 또한 권법을 익혔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천덕과 싸운다면 필패한다는 것을 말이다. 실전이 아닌 비무에서 천덕의 무공은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팽여해의 도법으로 이겨 내지 못한 천덕을 뚫어 낼 수 있을까?’
* * *
4강전의 대진은 황극린에게 웃어 주었다.
소림의 천덕과 화산의 운평자가 4강 상대로 정해졌다. 황극린의 상대 또한 4강에 오른 만큼 상당한 실력자였지만, 천덕과 운평자에 미치진 못했다.
황극린은 당연하다는 듯 결승에 진출했다.
앞선 천덕과 팽여해의 비무에 비해 싱겁게 끝이 나서 관중이 실망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를 과소평가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차라리 천덕 스님과 운 소협이 결승에서 맞붙어야 했지 않나?”
“그러게 말이야. 들어 보지도 못한 문파에서 용봉지회 결승이라니?”
당연히 그런 의견에 반발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모용가아와 황극린의 비무를 보았던 사람들이 극렬하게 비판했다.
“무슨 소리! 황 소협의 비무를 보지 못했나? 모용세가의 쾌검을 모조리 피해 내는 보법! 그 신기와 같은 보법이 있으면 금강불괴도 아무것도 아니지! 느릿느릿하게 주먹을 뻗어서야 황 소협게 닿을 수 있겠나?”
“암! 황 소협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모용세가는 극한의 쾌검을 구사하는 문파였다.
황극린이 그의 검을 모조리 피해 냈다고 하니 재빠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허허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팽 소협과 천덕 스님의 비무를 보지 못했나? 천덕 스님은 팽 소협의 일격을 모두 막아 냈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가?”
“뭘 의미하는가?”
“황 소협의 주먹이 천덕 스님에게 통할 것이라 보는가?”
“……!”
황극린의 강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순 침묵에 휩싸인다.
천덕과 팽여해의 비무를 보았던 이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천덕은 웬만한 공격으로는 상처도 나지 않는다. 황극린이 어떤 공격이든 피할 수 있는 보법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천덕은 어떤 공격에도 상처 입지 않을 육신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승리하는 자가 누구겠는가?
모두 머릿속으로 금빛으로 물든 천덕의 육신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래도는 뭘 그래도인가? 오늘 비무에서 완전히 증명될 것이네. 운 소협과 천덕 스님의 비무가 사실상 결승이나 마찬가지야. 황 소협이 약하다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인정할 건 인정하도록 하게.”
황극린을 옹호하는 이들은 할 말이 없었다.
피해 내기만 해서 천덕을 이길 수 있을까? 권을 쓰는 황극린이 천덕의 방어를 뚫어 낼 수 있을가? 그러한 의문이 뇌리에 맴돌았다.
“가세! 비무장에 가서 사실상 결승을 지켜보러 말일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무장으로 몰려갔다.
운평자와 천덕의 비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덕의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팽여해와의 비무에서는 힘 대 힘으로 승부를 피하지 않고 맞부딪쳐 싸웠다고 한다면, 오늘의 천덕은 현란하게 싸웠다.
보법을 밟지 못해서 팽여해와 정면 대결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속도과 기교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천덕은 운평자와의 비무에서 그것을 증명했다. 단순히 단단하고 튼튼한 육신에만 의존하는 무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번에도 천덕이 운평자에게 승리했다.
비무가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팽여해와 비슷했지만, 천덕은 팽여해와의 비무 때보다 훨씬 좋은 안색으로 승리했다. 운평자는 화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생각에 어깨가 축 처져서 비무장을 내려왔다.
“제기랄…….”
황극린을 옹호하던 이들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
4강을 지켜보니 황극린이 천덕을 이길 건덕지가 없어 보였다. 처음 보는 문파에, 본선에 올라와서 바로 모용가아를 꺾었기에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높았다.
아무리 황극린이 희대의 천재라고 하여도, 천덕도 마찬가지로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으리라.
거기다 천덕은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의 절기를 모두 이어받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천덕이 황극린에게 이기는 게 상식적인 그림이 아니던가?
“것 보게, 아직도 천덕 스님이 패배할 것이라 보나?”
“…황 소협의 비무를 지켜보세. 그래야 공평할 것 아닌가?”
“허허허, 아직 미련을 못 버렸구만! 좋네!”
오늘은 황극린과 철권이가(鐵拳李家)의 장남 이능파의 비무도 천덕의 비무 다음으로 바로 이어진다. 천덕과 운평자의 수준 높은 비무에 잔뜩 기대감이 올라간 상태였다. 황극린이 열세로 평가받긴 하지만 그래도 4강에 오른 무인이 아니던가?
이번에도 멋진 비무를 선보일 것이다.
“만뇌문의 황극린!”
“우와아아아-!”
“철권이가의 이능파!”
“와아아!”
두 사람이 비무장에 오른다.
황극린은 평소처럼 빈틈을 잔뜩 내보인 자세로 서 있었다. 그와 반대로 이능파는 잔뜩 긴장하여 자세를 낮추고 황극린을 마주했다.
‘모두가 난 안중에도 없다.’
황극린이 천덕에게 패배할 것이다. 천덕과 팽여해의 비무가 사실상 결승이었다. 역시 구파일련과 육대세가의 출신들이 강하다. 그런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온다. 하지만 이능파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4강에 진출할 만큼 실력이 출중했지만, 관중의 마음을 뺏을 만한 특징이 없었다.
뛰어나긴 하지만 무난하다고 할까?
그는 이번 비무에서 모두에게 증명할 것이다.
‘황극린, 당신을 꺾어 내가 용봉지회의 결승에 오를 것이오.’
대진운이 좋았든 나빴든 결승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다.
거기다 4강 탈락과 준우승의 상품의 가치는 차원이 다르다. 여러 관점에서 4강에서는 무조건 승리해야 했다.
“강호의 동도들께 이 철권이가의 이능파가 화끈한 승리로 응원에 대한 보답을 하겠습니다아아아!”
이능파가 비무가 시작되기 전, 관중에게 선언한다.
이대로 승리한다고 해도 관심은 천덕에게 쏠릴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한 관심을 받아 두는 게 좋았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이름을 멋지게 선언했다. 강호에서는 자신감 있는 이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오호? 제법 강단이 있군!”
“응원한다!”
“결승에 진출해라!”
“이노오옴! 화끈한 패배겠지이!”
중간중간 그를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응원이 압도적이다.
비무장에 울려 퍼지는 수많은 백성의 환호성과 고함. 이능파가 싱긋 웃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
주목받기 위해 이런 계책을 쓴 것도 있었지만, 황극린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이렇게 소리친 것이기도 하다. 황극린의 장점은 상대의 공격을 피할 만큼 빠른 보법에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발도 꼬이게 된다.’
딱 한 번.
실수 한 번에 황극린은 추락할 것이다. 아무리 보법이 빨라도 자신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으면 기절한다. 대부분 상대가 그러했다. 철권이가 이능파의 주먹은 강철도 휘게 할 만큼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한 번만 맞아라!’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함성이 비무장 전체를 뒤엎기 시작한다. 동시에 황극린의 발이 움직였다.
“……!”
예상대로 보법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까딱 잘못하다간 황극린의 공격을 놓칠 것이다.
‘자세를 낮추고, 몸을 웅크린다. 기회를 노린다!’
이능파가 눈을 빛내며 황극린이 공격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공격하더라도, 상대가 공격하려면 자신에게 접근해야 한다. 그때를 노린다.
“어?”
하지만 이능파가 작게 입을 벌렸다.
분명히 황극린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공격을 방어하며 빈틈에 공격을 찔러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사라지는 건 경우에 없었다.
‘뒤!’
황극린의 보법은 이능파의 눈을 속일 만큼 빨랐다.
황급히 뒤를 돌아 황극린을 찾는다. 하지만 뒤에도 황극린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네 옆에 있잖아!”
관중의 성난 고함이 들려온다.
이능파의 눈동자가 돌아가 왼쪽을 바라본다. 그곳엔 검은 그림자가 존재했다. 분명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기척을 숨기는 게 가능한 일인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 황극린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다.
이능파는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붉은 광채를 보았다. 비무 중에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뭐지?’
황극린의 주먹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이능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그의 육신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황극린의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이다.
“쉬시오.”
황극린의 손가락이 이능파의 혈을 눌렀다.
그의 몸이 마치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뭐야!”
“설마 점혈을 한 거야?”
관중석 전체가 웅성거리고 있다. 황극린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심판에게 시선을 던졌다.
너무도 허무하고 싱거운 4강 결말이다.
이제껏 용봉지회 4강 무대에서 이리도 빠르게 승자가 정해진 경우는 없었다. 당연히 모두가 이능파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에서 손가락을 뻗는데, 그걸 피하지 못하나?
그리고 내력을 운기하고 있었다면 점혈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능파는 싸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싸워라!”
“너무 허무하다!”
용봉지회의 4강을 보려고 암표까지 구매했던 이들이 아까운 돈을 위해 분노를 쏟아 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심판은 점혈당한 이능파를 확인하고 바로 황극린의 승리를 선언했다.
“황극린의 승리!”
그렇게 비무를 바라보던 한 무리에서 누군가 혀를 차고 있다.
“…것 보게, 황 소협은 이제껏 운이 좋아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
“방금 황 소협의 보법을 보지 않았는가? 엄청나게 빠르지…….”
“그게 천덕 스님께 통할 것이라 보는가?”
“…….”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4강 상대가 워낙 쉬웠기에 모용가아와 비무했던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천덕은 8강에서 팽여해와 싸웠고, 4강에서 운평자와 맞붙었다.
황극린의 대진운이 좋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차피 우승은 천덕 스님이라네.”
그게 오늘 4강을 관전했던 관중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