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90화 (90/316)

90화 4강

남궁세가에서 금패란 일종의 어음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젠가 금패를 가진 자가 남궁세가에 부탁을 하게 되면 가문 전체가 휘청일 수 있는 수준의 요구가 아니라면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 그런 물건이다 보니 금패를 발급할 권한은 남궁세가의 가주만이 가지고 있었다.

사실 황극린은 남궁세가에 뭘 받고자 행동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금패를 요구했다.

어차피 그걸 받더라도 보관해 두기만 할 생각이었다.

물론, 아예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다. 황극린도 앞뒤 꽉 막혀서 자존심만 내세울 생각은 없다. 지금의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만뇌문을 만들었고, 돌아갈 보금자리에 머물러야 할 인연들이 위험에 처하면 당연히 금패를 사용하여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금패가 있는 것만으로 만뇌문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 더 의미 있게 활용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황극린의 말에 창천뇌검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운혜는 그가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자식이었다. 어릴 적 떠나 버린 그녀의 어머니는 창천뇌검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남궁운혜를 구해 줬는데 금패를 주지 못할쏘냐? 거기다 어제 황극린에게 다짜고짜 검을 겨눴던 것을 떠올리며 자다가도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들어서서 이리도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황극린을 왜 의심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반쯤 미쳐 있는 상태라고 보도 무방했다.

“금패를 드리겠습니다. 하나,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조금 시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은공, 저도 보답을 하고 싶어요.”

이제는 남궁운혜가 앞으로 나선다.

금패는 남궁세가와 창천뇌검의 보답이다. 그녀는 황극린에게 말뿐인 감사만 표하고 싶지 않았다. 황극린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갔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도 보답해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황극린은 그들에게 보답을 더 받을 생각은 없었다.

“금패로 충분하오.”

“그래도 제가 따로 보답을…….”

“충분하오.”

“제 마음이…….”

“부담스럽소.”

“…….”

남궁운혜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앞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감정이 요동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냉정하게 황극린을 설득하려 했을 남궁운혜였지만,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한다.

‘후우, 감정을 가라앉히자. 은혜를 입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일 순 없어.’

지극히 상식적으로 판단한 남궁운혜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예, 은공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알겠소.”

황극린은 적절한 선에서 남궁운혜의 뜻을 받아들였다.

여기서도 싫다고 하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남궁운혜의 표정이 기묘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딸아이의 다채로운 표정을 감상하던 창천뇌검.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황극린에게 묻는다.

“혹시 은공께서는 놈들이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창천뇌검이 원하는 건 남궁운혜를 납치한 이가 속한 세력이었다. 납치한 사내는 황극린에게 죽었다고 해도, 그 뒤에 배경이 있다면 남궁세가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화산파의 무인들이 지흉의 은신처를 수색했지만 딱히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없었다.

“모릅니다.”

“혹시 그곳에서 챙겨 오신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금자를 챙겼습니다.”

“아……?”

조금 당황스럽다.

남궁운혜가 보답하겠다는 것은 거절하고, 금자를 챙겼다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언교연도 의아한 시선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황극린은 불같이 화를 내도 모자란 상황이다. 여기에서 남궁세가에게 더 뜯어낼 것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결한 무인. 언교연은 황극린을 그런 성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금자를 챙겼다는 말에 모두가 당황한다.

두야랑과 광견살검을 제외하곤 말이다.

“금자는 챙겨야지, 암.”

“맞아.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은근히 장단이 잘 맞는 두 사람이다.

황극린은 말을 이어 나간다. 괜한 의심을 하고 파고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천흉과 남궁운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사실 놈이 익힌 무공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창천뇌검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장 놈들의 배후를 추적하여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지만, 당최 그놈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은 마치 용암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녹아내린 상태였다. 외관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단이 전혀 없었다.

“만약 놈들의 정체를 짐작이라도 하신다면 제게 꼭 알려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용건이 더 남아 있으십니까?”

황극린이 축객령을 내릴 기세로 물었다.

창천뇌검은 당연히 아쉬웠다. 황극린과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다. 사실 처음에 그는 황극린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딸아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태를 보고, 딸 바보인 아버지가 어찌 좋아하리? 물론, 막상 그가 남궁운혜에게 관심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창천뇌검 또한 무인이다. 어제 손속을 나눈 것만으로 황극린의 실력이 어느 정도에 올라와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대로만 성장하면 언젠가 천하칠대고수의 반열에 오를 재능이 있었다.

그러한 후배와 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제게 더 부탁하실 것은 없으십니까?”

“예,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황극린은 굳이 창천뇌검과 더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그의 성격이 저러한 것을 어떡하리?

남궁운혜는 이렇게 빨리 대화가 끝날지 몰랐기에 약간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황극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자신을 구해 줬는지, 어떻게 자신을 찾았는지를 말이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이런 고민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대부분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었고, 그녀는 대답만 해 주면 되었다. 반대의 입장에 놓이자 가슴이 답답한 것이,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귀찮게 군다면 황극린이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에 남궁운혜는 결단을 내렸다.

“다음에 뵙겠어요, 은공.”

“예,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남궁세가와의 일은 끝이 났다.

방에 들어가서 인면지주가 뽑아낸 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보려던 황극린이었지만, 새로운 손님이 또 찾아왔다.

“황 소협, 저는 화산의 화음분타주입니다.”

남궁세가와 마찬가지로 화산파도 황극린에게 사과할 것이 있었다.

화음분타주의 뒤에 선 제자가 꽤 커다란 목함을 들고 있었다. 황극린은 냄새로 그것이 무언지 판단할 수 있었다.

‘약재로군.’

* * *

화산파가 황극린에게 가져온 것은 내상이나 상처에 좋은 약재들이다. 내력을 증진시키는 영약 따위는 아니었지만, 꽤 진귀한 것들이라 되팔아도 돈이 될 것이다. 언제 내상을 입을지 몰랐기에 황극린은 약재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남궁운혜 납치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화음현에서는 남궁운혜가 납치당하고 황극린이 그녀를 구해 준 이야기가 그리 널리 퍼지진 않았다. 화산이 죄 없는 사람을 납치범으로 몰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최대한 화산파에서는 다른 곳에 시선을 집중시키려 했다.

황극린은 굳이 그 일을 공론화하지도 않았다.

유야무야 넘어간 것에 대해 두야랑과 언교연 그리고 광견살검이 분개했지만, 황극린이 나서지 않으니 그들이 뭐라고 소리칠 입장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날 다짐했던 대로 다른 이들에게 무시받지 않으려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으며, 용봉지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어느샌가 황극린은 4강에 가장 먼저 진출해 있었고, 오늘은 4강에 오를 후기지수들이 확정되는 날이었다.

“오늘 비무는 볼만하겠다!”

“그러게. 팽여해와 천덕이라니. 볼만한 승부가 되겠어.”

팽여해는 엄청난 괴력으로 도(刀)를 휘두르며 종횡무진 연승을 이어 나갔다. 황극린 또한 그의 비무를 보았는데, 용봉지회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는 더 성장하는 듯했다.

오늘 천덕과 팽여해의 비무에서는 당연히 팽여해가 이길 것이라는 쪽이 우세했다.

천덕이 소림의 제자이긴 했지만, 팽여해는 화끈하게 비무에서 승리해 왔다. 커다란 도로 상대의 병기를 부숴 버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에 반해 천덕은 구파일련 출신이었지만, 무난하게 승리를 쟁취했다. 본선에서 보여 준 실력으로 따지면 팽여해가 훨씬 인상이 깊다고 할 수 있었다.

“팽여해가 이기겠지?”

“천덕은 소림의 출신이야. 무언가 숨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팽여해가 질 가능성도…….”

두야랑과 언교연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광견살검도 말을 보탠다.

“당연한 것 아니냐. 하북팽가의 장남은 내가 인정하는 고수다. 나조차도 그와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팽여해가 진다는 얼빠진 소리는 하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광견살검.

“아니, 천덕이 이길 것이오.”

“암, 소림사가 어떤 문파인데? 당연히 팽여해는 패배할 것이다. 너희, 알겠어?”

황극린의 말에 귀신같이 의견을 바꾼다. 줏대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평소에 자주 보던 광경이라 두야랑이나 언교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황극린이 천덕이 이길 것이라 말한 게 의아할 뿐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언 소저의 말대로 천덕은 힘을 숨기고 있소.”

“힘을 숨기고 있다고? 난 그런 걸 못 느꼈는데?”

두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황극린은 천덕이 가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진하고 강렬한 향. 코를 자극하는 냄새는 그가 가진 내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거기다 사실 황극린은 과거에 28대 비무대회에서 누가 우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용의 대회에서는 천덕.

봉의 대회에서는 언교연.

두 사람은 미래에 천하칠대고수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신기한 점은 둘 다 권(拳)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비무 시작한다.”

팽여해와 천덕의 비무.

수많은 관중의 환호가 터져 나가고, 두 사람이 곧장 맞붙었다.

초반에는 팽여해가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타고난 괴력과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거세게 천덕을 압박한다. 거대한 도가 당장이라도 천덕의 몸통을 두 동강 낼 것 같았다. 그의 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비무장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주먹으로 저런 병기를 든 상대와 싸우는 건 너무한 것 같군!”

“그러게. 살과 뼈는 강철에게 베일 텐데 말일세! 이런 경우에는 부서진다고 해야 하나?”

관중이 팽여해가 도를 휘두를 때마다 퍼지는 파공성에 혀를 내둘렀다. 거기다 그의 도에는 강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만약 자신이 팽여해의 앞에 있으면 어떻겠는가? 그런 두려움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팽여해가 천덕을 압박하고, 그를 비무장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이제까지 요리조리 잘도 피해 냈던 천덕이었지만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어 보였다.

“천덕이 지겠는데?”

두야랑의 말에 언교연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광견살검만이 변치 않은 신뢰의 눈동자로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봐라, 신기한 것을 보게 될 테니.”

황극린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비무장에서는 기괴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까아앙!

“……?”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모두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파악한 이들이 경악했다.

지금…….

“저 사람 주먹 뭐야? 아니, 피부가 왜……?”

천덕의 피부가 금빛으로 환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불상과 비슷한 외관이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천덕이 주먹으로 팽여해의 강기가 깃든 도를 튕겨 버린 것이다. 그의 손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어 보였다.

“그, 금강불괴!”

당연히 저 소리가 튀어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천덕의 육신은 진정한 의미의 금강불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황극린이 남궁운혜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금강불괴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의 내공이 건재한 이상 어떤 강기로도 그의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

그의 피부를 가르려면 검강이 필요하다.

팽여해도 도강을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자유자재로 비무에서 사용할 수준이 아니었다.

천덕의 내력이 다할 때까지 버티면 팽여해가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황극린이 과거 들었던 이야기에서 천덕은 소림의 영약을 죄다 취했다고 했다. 그의 내력은 그 어떤 용봉지회 참가자들보다 많았다.

‘곧 끝나겠군.’

천덕이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냈으니 팽여해도 패배할 것이다.

얼마나 싸우느냐의 차이였다.

하지만 황극린의 예상도 가끔 틀릴 때가 있긴 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무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팽여해의 웃음.

그의 눈에서 광기가 내비친다.

“대단하시오! 그런 엄청난 무공을 익히시다니 말이오!”

팽여해는 분명히 천덕에게 쉽게 패배했었다.

황극린이 간섭하지 않았던 과거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팽여해는 달라졌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하면… 용봉지회 예선 첫날에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패배했던 일.

그것이 팽여해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황극린이 살수로 살아가던 시절의 과거에선 팽여해는 예선이 끝날 때까지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이길 만한 이들이 저잣거리에서 그런 놀이나 하고 있을 수 없었으니까.

팽여해는 그러한 투기로 강해지는 사내였다.

황극린을 꺾기 위해서 팽여해는 지독히도 열심히 수련하고 성장했다.

그러니…….

“나도 썩 괜찮은 걸 보여 주겠소이다-!”

팽여해의 기세가 일변했다.

황극린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날 추격할 때의 모습을 보는 듯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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