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89화 (89/316)

89화 각성의 계기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화산파의 무인들이 황극린의 별채를 점거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분위기가 험악했다. 광견살검은 화산파의 무인들과 언성을 높이고 싸우고 있었으며, 두야랑은 조용히 뒤에서 살의를 키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교연 또한 막무가내로 사람을 납치범으로 모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때 황극린이 돌아왔다.

그의 등장에 화산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황극린을 에워싼다. 당연히 광견살검이 달려와 황극린의 곁을 지켰다. 주인이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명견이 아니었다.

“황 장로님은 납치범이 아니라니까!”

그 뒤를 이어 두야랑과 언교연도 달려왔다.

“제가 곁에서 있어 본 바로는 황 소협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맞아. 황극린은 아니야. 만약 납치하려 했으면 더 은밀하게 했을 거야!”

뭐, 황극린은 이미 분노한 창천뇌검과 손속을 나누기까지 했으니 화산파 무인들의 반응에 딱히 분노하지 않았다. 굳이 그가 변명하지 않더라도 일은 곧 해결될 것이다.

“잠시만! 멈추어라!”

화산의 장로 중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창천뇌검과 황극린의 격돌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멍하니 황극린이 떠나는 걸 바라보다 아직 분타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따라왔다.

“황 소협은 남궁 소저의 납치범이 아니다! 오히려 남궁 소저를 구해 주신 분이다!”

“예?”

창천뇌검이 의심했기에 화산의 분타에서는 당연히 황극린이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광견살검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러 낸다.

“내가 아니라고 했지?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만뇌문이 약하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으응? 화산파면 막 이래도 되는 건가? 그래도 되냐고!”

“흥!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두야랑과 언교연 또한 차가운 분노가 깃든 눈동자로 황극린의 별채를 점거했던 무인들을 노려본다. 분위기가 반전되자 화산의 무인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남궁창천의 착각에 화산파까지 말려든 꼴이 아니던가?

“화산의 일양(一陽)이라 하오. 황 소협을 의심하는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소. 정말 죄송하오…….”

화산의 제자들이 푹 고개를 숙인다.

당연히 장로가 사과하는데 적반하장으로 고개를 빳빳이 쳐든 사람은 없었다.

“괜찮소. 피곤하니 그만 자리를 비켜 주겠소? 쉬고 싶군.”

일양은 황극린이 사과를 제대로 받아 주었는지 긴가민가했지만, 창천뇌검과 손속을 겨룬 걸 직접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

“내상을 입진 않으셨습니까? 의원을 불러 치료하시는 게…….”

당연히 내상이라는 말에 황극린의 일행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상? 장로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괜찮아?”

“설마 창천뇌검 대협께서……?”

황극린이 고개를 젓는다.

“괜찮으니 자리를 비켜 주시오. 쉬고 싶군.”

무뚝뚝한 황극린의 말에 화산의 무인들이 떠나간다. 쉬고 싶다는 상대에게 억지로 들러붙어 사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사라지자 광견살검이 울먹이는 얼굴로 묻는다.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괜찮소.”

황극린은 조용히 별채로 들어간다.

세 사람은 황극린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단지 걱정되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게 다 힘이 없어서 생긴 일이야. 빌어먹을 무림…….”

광견살검이 천하백대고수 중 하나라고 하나, 무림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광견살검이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지만, 구파일련이나 육대세가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그를 처리할 수 있었다.

만약 화산에서 작정하고 황극린을 몰아가려 했다면…….

광견살검의 머릿속에 확정된 비극이 떠올랐다.

“힘을 길러야 해.”

광견살검이 귀신처럼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두야랑과 언교연 또한 표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파는 다 이래? 막 사람 의심해 놓고 말 한마디 사과만 하고 떠나?”

두야랑의 물음에 언교연은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는 정파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속내는 검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진짜 협의를 추구하는 무인도 있었지만… 그리 흔한 편은 아니었다.

“아마 물질적인 보상도 해 줄 거야.”

“흥, 사람 죽이고 나서 금자를 쥐여 주면 잘도 좋아하겠다.”

“그러게.”

두야랑 또한 고개를 저으며 떠나간다.

광견살검의 말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약해서 생긴 일. 맞다. 만약 두야랑이 용봉지회의 참가자 수준이 아니라 백대고수… 그 이상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더 강해져야 해, 독으로 쓱싹 죽여 버릴 수 있게. 최강의 독공을 완성해야겠어.’

두야랑은 현재 자신의 감정이 단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언교연.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화산파가 막무가내로 황극린의 별채를 점거하는 것을 보며, 진주언가가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만약 진주언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마 화산파보다 훨씬 더 과격했을 것이다.

‘언가를 바꾸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나도 강해져야지,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여인은 가주가 될 수 없다.

그런 규칙은 진주언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싸워야 할 것은 세상과 가문의 편견이었다. 그걸 깨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 한다. 결국, 힘이 있는 자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언교연 또한 자신의 방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화산 분타 전각의 지붕.

누군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황극린의 별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껄껄, 우연한 상황에 의해 사람은 각성하곤 하지. 저 아이들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구나.”

노인의 외관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건만 아무도 그가 전각 위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이 화산파의 분타라는 것을 감안할 때 몹시도 이상한 일이다.

노인은 황극린 일행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는 순간, 전각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누구도 노인이 움직이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 * *

황극린은 방으로 돌아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사망교의 천흉만 처리하면 미래에 일어날 혈겁을 쉽게 막을 수 있으리라. 지흉이 황극린에게 쉽게 죽은 것과 같이 천흉도 아직은 그리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지흉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것들도 정리했다. 그가 납치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값비싼 귀물들과 그가 익혔던 흡성대법의 사본이었다. 당장 태워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일단 가지고 있자.’

흡성대법을 익힐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마공이라 불리는 것들에서도 배울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황극린이 떠올린 것은 창천뇌검과의 격돌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것은 황극린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난 아직 약하다.’

창천뇌검이 진심을 다한 것도 아니다. 그의 진심은 과거에 지독하게 경험했다. 전성기의 황극린이 그의 급소에 검을 찔렀음에도 발휘되었던 천하칠대고수의 진정한 실력. 당시에 황극린은 결국 단전이 깨져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었다.

만약 이번에 끝까지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을까?

‘작정하고 도주했다면…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다. 물론, 꽤 잃는 게 많았겠지.’

하지만 황극린은 도피하고 도주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무공을 익힌 게 아니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살아가려 했다. 솔직히 지금 창천뇌검 수준의 고수에게 이기겠다는 게 욕심이긴 했지만, 그는 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성장 방식. 그것은 역시…….’

끼이익?

통통한 배를 드러내 놓고 인면지주가 황극린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왜인지 불안한 주인의 눈빛에 움찔하며 몸을 떨어 댔다.

“넌 먹지 않으마.”

과거 인면지주는 황극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대놓고 황극린이 발을 튕겨 바닥을 울리게 했어야지만 약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극린의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울림을 인면지주는 느낄 수 있었다.

끼이이이…….

황극린의 곁으로 와서 얼굴을 부비는 인면지주.

‘그런데 이상하군. 지흉의 단전을 취했기에 몸집이 더 커질까 걱정했는데…….’

왜인지 인면지주의 크기가 조금 더 작아져 있었다.

거기다 놈의 안면에 튀어나온 사람 얼굴이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허락해 줬지만, 함부로 사람을 먹으면 안 된다.”

끼이이…….

“네가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려 주마.”

끼이이……!

정말 인면지주가 황극린의 말을 알아들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될 것 같았다.

“쉬어야겠군.”

한 번의 격돌로 황극린은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

그 정도로 그와의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거다. 황극린의 목표는 창천뇌검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수준에 올라야지만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황극린은 눈을 감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주인이 중요한 걸 한다는 걸 깨달은 인면지주가 그와 살짝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끼이익…….

방의 입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운기행공을 마치고 깨어난 황극린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

입구가 거미줄로 막혀 있다. 황극린이 깨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인면지주가 거미줄 사이에서 불쑥 머리를 꺼낸다.

끼이! 끼이!

마치 나 잘했지……?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 같다.

당연히 황극린의 예측일 뿐이다.

“설마 날 보호하려고 거미줄을 친 건가?”

끼이?

인면지주가 후다닥 달려왔다. 황극린의 방금 말은 확실히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단지 그의 앞에서 벌러덩 배를 뒤집어 뒤뚱거리고 있다. 마치 배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했다.

‘기특하긴 하군.’

거미줄을 치우는 건 일일 테지만, 인면지주가 방의 입구를 거미줄로 막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놈은 본능적으로 저곳이 적이 들어올 장소라는 걸 알아채고 거미줄을 쳤으리라. ‘내단’을 품은 동물. 그런 것들을 영물(靈物)이라 부른다.

‘넌 절대 먹지 않으마.’

사실 황극린은 인면지주의 내단이 커지면 취할까도 생각했었으나 오늘로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잘만 키우고 교육하면 오히려 수하 한 명보다 훨씬 나으리라. 그 악독한 흑살문에서도 수하를 믿지 못해 혈고독을 사용한다. 그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을 가진 수하는 쉬이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황극린이 인면지주의 배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황극린, 그 사람이 찾아왔어!”

왜인지 짜증이 담긴 두야랑의 목소리.

그녀가 짜증을 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누구지?”

“있잖아! 널 범인으로 의심한 아저씨!”

“크음…….”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창천뇌검에 대한 악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라면 남궁운혜가 납치당했을 때, 그리 행동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황극린은 남궁세가의 속사정을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과거의 삶에서 그는 남궁운혜와 혼인했었으니까.

“…….”

밖으로 나가려던 황극린이 가만히 입구를 바라본다.

“거미줄을 잘라도 되겠느냐?”

끼이?

작게 한숨을 내쉰 황극린이 묵철 단검을 꺼내 거미줄을 자르려 한다.

그런데…….

‘질기군.’

그가 가진 묵철 단검으로도 거미줄은 잘 잘리지 않았다.

묵철 단검에 강기를 불어넣으니 그제야 조금씩 잘리기 시작한다.

‘이거 대단하군.’

융중산에서 발견했던 인면지주. 사람보다 훨씬 컸던 놈의 거미줄은 이 정도로 질기지 않았다. 몸집이 작은 만큼 다른 능력이 더 극대화된 것인가? 같은 인면지주라도 다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황극린이다.

‘이건 확실히 써먹을 수 있겠어.’

대충 거미줄을 가른 황극린이 밖으로 나선다.

그곳에는 창천뇌검과 남궁운혜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곁으로는 못마땅한 표정의 황극린의 일행이 보인다.

그런 일행을 보며 황극린은 묘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남궁세가의 가주와 공녀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연.

과거 황극린은 그러한 것을 만들지 못했다. 호의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남궁세가의 앞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황극린이 재능이 촉망받는 고수라 해도 창천뇌검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그것이 조금 신기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군.’

황극린이 나서자 창천뇌검이 허리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은공. 제 착각으로 인해 은공의 명예가 더럽혀졌습니다.”

사과한 창천뇌검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딸아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운혜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은공께서 운혜를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후우… 정말 감사드립니다.”

“…….”

황극린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괜찮습니다.”

“은공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말뿐인 감사와 사죄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닙니다. 전 다 잊었습니다.”

황극린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들에게 뭘 받으려고 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황극린에게 사정하는 창천뇌검과 남궁운혜의 모습에 생각을 바꾸었다. 굳이 거절만 하면 이 실랑이를 계속 이어 가야 한다. 차라리 적당한 것을 받아 가면 된다.

“그럼 좋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순간 황극린이 남궁운혜를 바라본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묘한 기대감이 눈망울에 담겨 있었다.

황극린이 창천뇌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금패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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