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과거의 빚
황극린은 지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워낙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이들이니 황극린으로선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시에 흑살문 또한 그들의 제거 의뢰를 받고 특급 살수가 직접 움직였을 수준이었으니까.
당시에 강호에서 천흉과 지흉의 악명은 대단했다.
소녀환희공(素女歡喜功)과 흡성대법(吸星大法)을 거의 대성하다시피 했던 사망교의 두 교주. 듣기로는 무한한 내력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내공이 많았고, 어찌나 전투 경험이 많은지 웬만한 고수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림맹에선 고수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초고수들만 소집하여 척살대를 꾸렸었다. 거기엔 두 명의 천하칠대고수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사망교가 강호 무림에서 어느 정도로 취급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성장하기 전에 지흉을 잡아 두면 되겠군.’
그리고 황극린은 혈귀비에게 지흉이 화음현에 있다는 걸 듣고, 그들을 없애기로 했다. 딱히 중원 무림의 정의를 위한 것 따위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황극린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함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과거 사망교는 남궁운혜를 납치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녀가 기지를 발휘하여 겨우 사망교에서 탈출했지만, 그녀는 사망교로 납치된 이후 인간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납치당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선 사망교를 없애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다.
황극린은 그것으로 과거의 빚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다만 지흉이 화음현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은거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황극린은 기다리기로 했다. 놈이 노리는 목표물은 남궁운혜일 것이다. 그녀의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다면 언젠간 기회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장로님! 남궁가의 여인이 납치당했습니다! 제가 쫓으려 했지만… 놈이 워낙 빨라서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다렸던 순간이었지만, 황극린은 속에서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혼인까지 할 뻔했던 사이였다. 현재의 남궁운혜는 과거의 그녀와 다르지만, 그래도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사망교를 처단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디로 갔소?”
“북쪽으로 갔습니다!”
“고생했소.”
황극린은 광견살검이 가리킨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 나갔다.
혈귀비를 찾았던 방식을 사용한다면 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극린의 후각은 공간에 남아 있는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일단 냄새만 맡으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종국에는 놈의 은신처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황극린은 지흉의 것으로 추정되는 썩은 냄새를 쫓아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평소에 경공 수련을 열심히 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 마음이 급하여 내공까지 꽤 소모했다.
‘…….’
황극린은 보았다.
지흉이 웃옷을 벗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의 앞에서 남궁운혜는 체념한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래턱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보니 과거의 그녀가 떠오른다.
창천뇌검이 죽은 날, 황극린을 쫓아왔던 남궁운혜.
그때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역겹군.’
본래 살수는 감정을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표적에도 감정을 이입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오늘 황극린은 분노했다. 저도 모르게 손이 튀어 나간다. 놈은 남궁운혜에게 집중하여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죽이는 건 쉬웠다.
삼류 무인이나 초절정의 고수나 목이 잘리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인간의 육신은 강기에 쉬이 잘려 나간다.
뎅겅.
길쭉한 묵철 검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의 검기가 지흉의 목을 잘라 버렸다.
“눈을 떠라.”
남궁운혜와 황극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어색해.’
남궁운혜는 가만히 황극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흉의 은거지를 열심히 수색하고 있었다. 마치 비동을 터는 도둑처럼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지…….’
하지만 왜인지 그에게 쉬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대화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 황극린의 주변에선 그러한 기운이 마구 분출되고 있었다. 기감이 예민한 남궁운혜는 공간에 깃든 분위기를 읽고 가만히 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건 뭐지?’
남궁운혜가 유심히 지흉의 몸통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본다.
‘그것’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몸을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다.
“흡……!”
그녀가 깜짝 놀라 두 걸음 물러섰다.
지흉의 몸 위에 있는 건 사람의 머리를 몸통에 매단 커다란 거미였다. 놈의 입가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는데… 설마 사람을 잡아먹는 건가?
“인면지주요.”
“네?”
“키우는 것이오.”
“그, 그렇군요…….”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남궁운혜는 조용히 지흉의 배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인면지주의 곁으로 갔다. 처음 보았을 땐, 소름이 돋았지만… 왜인지 지금은 귀엽게 보였다.
‘사람을 먹는 귀물을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사실 따지고 보면 지흉은 이미 인간의 탈을 쓴 귀물이었다.
구석에 겹겹이 쌓인 썩은 시체의 수만 수십이 넘는다. 아마 놈이 이제껏 취해 온 사람의 목숨은 훨씬 많을 것이다.
“열심히 먹는구나.”
끼이이……!
머리를 번쩍 들어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다리를 꼼지락대는 인면지주. 남궁운혜를 흘끔 바라보는 것 같더니 다시 지흉의 배 속에 머리를 박아 넣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인면지주가 지흉의 배 위에 벌러덩 누워 통통한 배를 자랑하며 뒤뚱거리고 있었다.
‘만져 봐도 되려나……?’
그때 황극린이 무언가를 봇짐에 가득 싸 들고 다가왔다.
“독이 있소.”
“아……!”
황급히 두 손을 숨기는 남궁운혜.
황극린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본 후, 발을 몇 번 굴렸다. 그러자 인면지주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영물이라 그런지 참으로 영리하다.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군.”
“구해 주셔…….”
“먼저 가겠소.”
“네……?”
황극린은 굳이 남궁운혜와 동행할 생각이 없었다. 점혈도 풀어 주었으니 알아서 화음현으로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 남궁운혜는 몹시 당황했다.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거기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어떻게 자신이 납치당했는 걸 알고 찾아왔는지와 왜 자신을 구해 줬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는 매번 그녀와 대화하지 않으려 했지 않은가?
몇 번 겪었던 그의 태도였지만 적응할 겨를이 없었다.
‘설마 나와 대화하기조차 싫은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사내라면 대부분 남궁운혜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려 혈안이 되어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남궁운혜는 욕망이 가득 찬 사내의 시선을 혐오했다. 오히려 그녀에겐 황극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야 하지만…….
왜인지 섭섭한 마음이었다.
‘이럴 거면 왜 구해 줬…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작게 한숨을 내쉰 남궁운혜.
“가, 같이……!”
남궁운혜가 황급히 황극린을 쫓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었다. 경공이 어찌나 빠른지 오봉 중 하나인 그녀도 쉬이 쫓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지!’
각오를 다지며 경공을 펼치는 남궁운혜였다.
* * *
“제기랄!”
평소의 창천뇌검은 분노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무릇 무공의 고수란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납치당하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점잖을 떨고 있을 부모는 없다. 창천뇌검은 욕설을 내뱉으며 화음현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장소는 모두 들어가서 확인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딸아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세상에 분노를 느꼈다.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을 내리는 걸까?
차라리 자신이 납치당해 죽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이제 막 뜻을 펼쳐 삶을 살아가려는 딸을 왜 납치했단 말인가.
“대체 왜!”
사자후(獅子吼).
거대한 울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감히 그에게 접근하여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소리만 지르고 있을 수는 없다.
계속 찾아야 한다. 딸아이를 납치한 놈을 찾아 찢어발겨 버릴 것이다. 그 배후가 있다면 남궁세가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멸문할 것이다. 그런 다짐을 한 채 화음현을 탐색하던 창천뇌검.
“남궁 대협! 찾았습니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창천뇌검이 화산파 무인들의 앞에 섰다.
“운혜를 찾은 것이오!”
“그, 그게…….”
창천뇌검의 기세에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창천뇌검이 겨우 기세를 가라앉히고 다시 묻는다.
“운혜를 찾았소?”
“그게 아니라… 황 소협이 막 화음현에 도착했습니다.”
“어디에 있소.”
“저기…….”
화산의 무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창천뇌검이다.
쏜살같이 달려가던 그의 시선에 익숙한 사내의 외관이 보인다. 덥수룩한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사내.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창천뇌검이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콰지지직-!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남궁세가의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의 뇌전이 검에 맺혔다.
“이노오오옴!”
창천뇌검의 뇌전이 황극린을 향한다.
그러다가 놈을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중간에 내력을 거두어들이긴 했지만, 이미 검은 황극린을 향해 뻗어 가는 순간이었다.
“……!”
창천뇌검의 검에 깃든 막대한 기운에 사방으로 기파가 터져 나가고 있다. 순간 머리카락이 흩날려 황극린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정확히 창천뇌검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찰나의 순간 묵철 단검을 꺼냈다.
묵철 단검에도 뇌전이 맺힌다. 하지만 창천뇌검의 것과는 다르게 검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쿠으으응!
먼지가 걷히고 검과 검을 마주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산의 무인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창천뇌검의 기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런데 황극린은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황극린은 창천뇌검의 일격을 버텨 냈다.
그것만으로도 화산파의 무인들이 깜짝 놀란다.
“내 딸은 어디에 있느냐?”
“곧 올 겁니다.”
“이놈……!”
창천뇌검이 다시금 황극린을 겁박하려 할 때였다.
“아버지, 멈추세요!”
다급한 목소리.
남궁운혜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억지로 황극린을 따라잡으려다 보니 체력을 죄다 소모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남궁운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창천뇌검을 흘겨본다.
“운혜야! 다친 곳은……!”
“잠시만요.”
딸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는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남궁운혜는 그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따갑고 매서운 시선. 딸아이가 자신을 저렇게 바라볼 줄도 알았던가? 세상 어느 무엇도 무섭지 않은 창천뇌검이었지만, 남궁운혜의 서늘한 분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황 공자께서 절 구해 주셨어요.”
“구해… 줘?”
“예, 황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사실 당장 죽지 않고 살아갔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황극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화음현에 도착하자마자 은인을 공격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지만, 그의 모든 잘못을 덮어 주고 옹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 공자님. 그리고 감사드려요, 구해 주셔서…….”
남궁운혜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황극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제야 창천뇌검이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대체 무슨 미친 짓을 벌인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황극린이 운혜를 구해 준 은인……. 난 지금 은인에게 검을 겨눈 건가? 내 딸아이를 구해 준… 은인에게……?’
창천뇌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 공자님, 다치신 곳은…….”
“없소. 상황이 정리된 것 같으니 가겠소.”
남궁운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상황이 악화됐다.
‘황 공자님은 날 더 멀리할 거야…….’
무림에서 검을 겨눴다는 것은 목숨을 잃더라도 할 말이 없는 잘못이다. 그에게 은혜를 입음과 동시에 죄를 지었다. 창천뇌검의 잘못이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무심하게 걸어가던 황극린이 지나가듯 말한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소. 이런 일로 원한을 품을 생각은 없으니까.”
“네……?”
“따라오지 마시오. 피곤하오.”
황극린은 두 사람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그 빚을 청산했다. 남은 것은 사망교의 천흉뿐이다.
“운혜야…….”
“아버지는 황 공자님께 정식으로 사과하셔야 해요.”
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절망과 분노가 사그라든 지금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무림의 고수라 하여 세상사 모든 것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는 없었다. 내뱉은 말과 행동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에게 함부로 의심하고 공격한 데 대한 사죄와 동시에 남궁운혜를 구해 준 은혜도 갚아야 한다.
“그리하도록 하마…….”
남궁운혜는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이 빚을 갚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