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87화 (87/316)

87화 의심이라는 괴물

의심이라는 괴물은 자신도 모르는 새 자라나곤 한다.

작은 의심이라도 의식 속에 똬리를 트는 순간 폭우에 강물이 넘쳐흐르듯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상식적으로 황극린이 남궁운혜를 납치했을 리는 없었지만, 왜인지 창천뇌검은 그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했다. 그 이유에는 현재 상황과 황극린의 무공의 특성도 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사람 크기의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것까지 의심이 된다. 설마 그 마대 자루에 사람이 들어 있었다면? 황극린이 최근 벌어지던 기괴한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면?

일단 범인을 특정하면 조금이라도 납치범을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동시에 불안함과 초조함 또한 덮쳐 온다.

만약 황극린이 아니라면? 다른 이가 범인이라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상대는 자신이 화음현에 있다는 걸 알고도 딸을 납치했다.

이미 화음현에서 떠나 버렸을 수도 있다.

목적이 무엇인가? 차라리 돈이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딸아이를 되찾아올 것이다. 물론, 그다음에는 천하칠대고수의 분노에 직면해야겠지만 말이다.

창천뇌검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화산파의 화음분타였다. 그곳에는 수하인 후청을 치료해 줄 의원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연히 화산 분타가 발칵 뒤집혔다.

화음분타주와 용봉지회 관전으로 하산해 있던 장로들까지 죄다 몰려왔다.

“황극린 그 아이가 있는 별채가 어딥니까?”

창천뇌검이 묻는다.

모두가 의아함을 품었다. 여기서 황극린을 왜 찾는단 말인가?

그들은 우르르 몰려가 황극린의 별채로 향했다.

두야랑과 언교연이 마침 식사를 마친 후, 별채에 도착해 있었다.

“응? 왜 다 몰려온 거지?”

“야린, 잠시만.”

언교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황극린을 찾고 있었다.

“무림의 대선배님들을 뵙습니다.”

“황극린은 어딨느냐?”

창천뇌검이 조용히 묻는다.

두야랑이 대답하기 전, 언교연이 조용히 답한다.

“황극린은 만날 사람이 있다고 나갔습니다.”

당연히 만날 사람이라는 건 이곳에서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창천뇌검이었지만, 황극린이 두 사람에게 만날 상대가 누구인지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때 화산파의 장로 중 하나가 묻는다.

“광견살검은 어디에 있느냐?”

“광견살검 또한 어딨는지 잘…….”

그러고 보니 광견살검은 매번 집을 잘 지키고 있는 편이다. 황극린이 언제 돌아오나 오매불망 입구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아니야. 그러고 보니 최근 광견살검은 대부분 밖에서 지냈어. 극린이가 무슨 명을 내렸다고 했는데…….’

창천뇌검은 광견살검의 이름을 듣자마자 의심이 더욱 커졌다.

왜 두 사람이 하필 지금 부재중이란 말인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광견살검의 악명은 창천뇌검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사실 재밌는 사내라며 웃어넘겼을 뿐이었지만, 의심의 괴물이 똬리를 튼 지금은 쉬이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에선 상황이 짜 맞춰지고 있었다.

화산파의 분타주는 아직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창천뇌검의 분노는 잘 알고 있었다. 황극린이 범인이 아니더라도 일단 객잔에서 여인을 납치했다면 목격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막 장로, 제자들을 이끌고 공야객잔의 주위를 탐문하라고 하게. 사람을 등에 업고 도주하는 사람이나 혹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자루를 짊어지고 간 사람이 한 시진 동안 있었는지 확인하게.”

“예, 분타주님.”

“그리고 다른 장로들은 화음현 전체로 반경을 넓혀서 수색을 해 주게. 마귀 살인 사건으로 힘들겠지만… 남궁세가의 일이니 부탁함세.”

“그러지요.”

장로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두야랑과 언교연도 상황을 눈치챘다.

‘납치 사건.’

그것도 남궁세가의 공녀인 남궁운혜가 납치됐다.

설마 범인이 황극린이라 생각하는 건가? 평소 음침할 정도로 조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두야랑과 언교연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여인을 납치한다고?

그럴 것이었으면 이미 두야랑과 언교연에게 수작을 부려 왔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황 소협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맞아. 지금 분위기 뭐예요? 황극린이 그 여자를 납치할 리가 없어요. 걔가 뭐가 아쉬워서!”

두 여인이 황극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사안이 너무 크다.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창천뇌검이 아끼는 딸이 납치됐다. 그가 황극린을 의심하고 있는 이상 화산파의 분타주도 일단 그의 생각에 동참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극린의 방을 수색해야겠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지!”

하지만 이미 창천뇌검은 별채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언제……?”

“……!”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천하칠대고수의 실력은 두 여인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창천뇌검 대협을 따라 황극린의 방을 수색한다.”

“예, 분타주님!”

“만약 황극린이 범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려고!”

“맞아! 걔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엉? 그리고…….”

화가 난 두야랑이 만뇌문에 있는 ‘그’의 존재를 발설할 뻔하다가 겨우 참아 냈다. 그 괴물 같은 노친네는 황극린을 무진장 아낀다. 만약 황극린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강호에 피바람이 불 게 분명하다.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아.’

두야랑은 살의를 띤 채 정파의 무인들을 보았다.

황극린이 말했었다. 사파나 정파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딴에는 상식적인 척 행동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면 별다를 것 없이 행동한다. 애초에 사파 출신인 두야랑은 정파인들이 쓴 가면의 역겨움을 교육받으며 자라 왔었다. 차라리 대놓고 악인이 낫다. 정의로운 척하면서 속에 음흉한 속내를 숨겨 놓는 것보다 나았다.

황극린을 의심하는 것도 똑같다.

두 시진 전까지만 해도 황극린은 새로운 용(龍)이 될 것이라며 세인들에게 찬양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그가 관심도 가지지 않은 여인을 납치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네.’

두야랑의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익힌 만청독수(萬靑毒手)가 진득한 살의에 반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품고 있는 천기피독신주가 웅웅 울려 대고 있었다.

두야랑은 저도 모르는 새 만독문주가 그녀에게 원하는 조건을 하나 더 만족했다.

* * *

지흉(地凶).

사망교의 두 교주 중 한 명. 천흉보다는 무공 실력이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절대 약한 것은 아니다. 천하칠대고수급은 아니더라도 천하백대고수에서 최상위권에 이를 실력. 거기다 그의 장점은 무공에 실력이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역용술.

그는 안면의 근육을 바꾸어 상대에게 방심을 유도한다. 뼈와 근육을 내공으로 움직여 생김새를 바꾸는 건 매우 위험한 무공이다. 흑살문에서도 그 부작용 때문에 포기했을 정도로 말이다.

지흉 또한 부작용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얼굴이 녹아내리는 고통보다 타인의 생기를 흡수할 때 오는 쾌락이 압도적으로 컸다.

인간은 저마다 다른 냄새를 품고 있다.

고귀하게 태어난 이들은 고결한 냄새가 난다. 천박하게 자란 이들은 추잡한 냄새가 났다.

거기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천지기에 의해 결정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망교의 지존 중 하나인 천흉은 인간의 ‘선천지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강호를 떠돌며 ‘맛집’을 기록해 두었다.

그중에서 최고는 당연히 천하칠대고수나 사흑련의 사대마제였다.

하지만 그들은 현 사망교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는 아득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이 먹잇감이었다.

대부분 남궁세가의 본가에서 머물며 얼굴도 잘 보이지 않던 먹잇감.

오봉 중 최고의 미색을 가진 남궁운혜가 화음현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지흉은 직접 나서기로 했다. 위험성이 클수록 흡기(吸氣)의 쾌락은 더욱 커진다.

‘남궁운혜는 1등급의 표적이지.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줄이야. 크크크.’

지흉은 점혈된 남궁운혜를 짊어지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화음현을 벗어나 은신처로 달려갈 것이다.

‘이년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바로 취해 버리기엔 아깝긴 하군. 흐흐.’

즐거운 상상이 뇌리에 맴돈다.

그는 내리 두 시진을 달려 비밀스러운 은신처에 도착했다. 외관으로 보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지나칠 것이 분명한 장소.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경악하고 말리라.

‘혈귀비 고년은 대책 없이 시체를 그냥 두고 나오지만… 그렇게 하면 금방 걸린단 말씀이야.’

지흉은 다르다.

그는 직접 납치하여 여기서 시체까지 처리한다.

이미 생기를 뽑혀 고깃덩이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겹겹이 쌓여 썩어 가고 있었다.

‘이곳도 금방 태워 버려야겠군. 냄새가 좋기는 한데…….’

더 냄새가 쌓이다간 우연히 발각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제 남궁운혜라는 1등급 표적을 손에 넣었으니 이것만 처리하고 가면 될 것이다.

꽤 넓은 지하실.

그곳에서 지흉이 가면을 벗는다. 그의 얼굴은 마치 용암에라도 들어갔다 온 듯이 기괴하게 녹아 있었다. 콧대는 완전히 주저앉았으며 한쪽 눈은 살에 파묻혀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역용술의 부작용.

지금도 막대한 내력으로 얼굴을 유지하는 중이다. 내력이 고갈되면 그의 얼굴은 폭삭 내려앉을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타인의 생기를 흡수해야 한다.

“기절한 척하지 마라. 숨 소리가 달라진 걸 다 느꼈다.”

“…….”

남궁운혜가 조용히 눈을 뜬다.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 지흉이 잔혹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똑같았다. 징그러운 그의 얼굴에 비명을 지르거나 혐오의 감정을 담아 바라볼 것이다. 남궁운혜라고 다를 것이 있으랴?

“감히 내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질…….”

“…….”

하지만 왜인지 남궁운혜는 무표정했다.

마치… 얼굴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뭐야? 비명도 안 질러?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거기다 목소리의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평범한 사람을 대하는 듯하지 않은가?

‘이년이 정신이 나갔나?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

지흉마저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껏 수많은 인간을 납치해 왔다. 그런데 남궁운혜처럼 태평한 것은 또 처음이다. 설마 창천뇌검이 찾아와서 구해 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크크크크, 참으로 어리석네. 네년의 아비가 널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건 불가능할 거다. 이 넓은 중원을 어찌 다 뒤질 수 있겠느냐? 어차피 넌 저기 있는 시체들처럼 썩어 문드러질 텐데 말이야.”

남궁운혜가 지흉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겹겹이 쌓인 시체를 바라본다.

지흉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는 반응을 보여 주겠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에 질린 비명을 터트리리라. 살려 달라고 빌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반응이다.

하지만.

남궁운혜의 반응은 달랐다.

“그렇군요.”

“…너 뭐냐.”

지흉이 인상을 찌푸린다. 저 여유는 대체 뭔가? 나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말인가? 점혈당해 납치당한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사람은 언젠간 죽습니다. 무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 각오도 없진 않았습니다.”

“뭐라고?”

지흉이 분노한다.

사람은 당연히 죽으니까 이렇게 납치당해 죽는 것도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짜증이 난다. 자신이 원했던 반응은 이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살려 달라며 울고불고 빌어야 정상이다. 그래야지만…….

‘잠시만…….’

지흉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간다.

이년이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인 이상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네년이 천흉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흐흐흐흐.

분노로 일그러진 지흉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하지만 녹아내린 얼굴에서 피어오른 미소는 더욱 흉악하게 보이기만 했다.

“좋다. 결정했다.”

“…….”

“네년은 친히 사망교까지 데려가 주도록 하지. 거기에 가서도 그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지 내 확인해 보마.”

사망교?

남궁운혜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사실 세상을 달관한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젠간 일어날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서 죽는 것보단… 그곳에 가는 게 나을 수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그때 남궁운혜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에도 이런 경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이런 상황을 본 것 같은…….

“그 전에 말이야. 네년이 날 너무 안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지흉이 흉악하고 징그러운 얼굴을 씰룩이며 기괴한 쇳소리를 낸다.

그가 의복을 벗고 있었다.

“……!”

남궁운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제 조금은 무섭나 보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무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남궁세가의 공녀라는 위치 그리고 타고난 그 미모에 따라 그녀는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할 만큼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도 살아야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덜 슬퍼할 것 아니던가?

“크크크, 뭐 자포자기한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겠지.”

푸슛……!

그때 따스한 액체가 남궁운혜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녀의 아래턱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대체…….

‘비린내…….’

남궁운혜가 눈을 감고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눈을 떠라.”

악몽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용기를 낸 남궁운혜가 눈을 뜬다.

웃통을 깐 지흉.

아니, 지흉이었던 시체의 목이 뎅겅 잘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눈동자에 붉은 광채가 번뜩이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황극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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