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백색의 가면
황극린의 시선이 귀빈석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선 남궁세가의 가주 창천뇌검 남궁천우가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연유로 시간을 내 달라는 것일까? 이번 생에서는 남궁세가와 엮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그들과 부딪히게 된다. 남궁운혜도 그러했으며, 남궁천우도 그러하다.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할 것 같았다.
- 그러지요.
- 고맙네.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모용가아와의 비무를 본 관중이 함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수천 관중의 환호성이 진동으로 변해 황극린에게 전해진다. 딱히 흥분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군.’
황극린은 관중에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 후 비무장을 내려갔다.
“우아아아아-!”
용봉지회 본선 첫날.
황극린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알렸다. 이제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떠도는 소문에 기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광견살검이 그를 주군처럼 모신다느니 하북팽가의 대공자를 힘 싸움에서 이겼다느니 하는 추상적인 평가들 말이다. 오늘 황극린은 제대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 누구도 아닌 천하육대세가의 출신인 모용가아를 꺾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말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중소문파 출신이 용봉지회에서 육대세가 출신을… 그것도 가문을 이어받은 후계자를 꺾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 새로운 용(龍)이 등장할 수도 있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언제나 개천에서 난 용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꿈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황극린은 용봉지회 16강에 진출했다.
* * *
어느 한적한 찻집.
화음현에 있는 객잔이나 찻집 그리고 반점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것과 반대로 황극린이 방문한 찻집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찻집에서 주문을 받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화음현에 올 때마다 내가 방문하는 찻집이라네. 중원 각지의 명차들을 맛볼 수 있고,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라네. 괜찮지 않은가?”
창천뇌검 남궁천우.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마셔 보게. 심신의 피로가 싹 날아갈 것이네.”
황극린이 창천뇌검이 권한 차의 맛을 본다. 확실히 나쁘진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살수 출신인 그가 차를 마실 여유나 있었겠는가? 그건 살수가 아닌 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를 마실 시간에 근육을 더 키울 수 있게 고기를 섭취하는 게 더 이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무슨 연유로 절 보자고 하셨습니까?”
황극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며 사족을 나누기엔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황극린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만약 황극린에게 죽지 않았다면, 그는 천하칠대고수로서 중원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것을 끝내 버린 장본인이 황극린이었다.
“하하하, 보통 천하칠대고수 중 한 명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친분을 쌓아 보고자 하는데… 자네는 확실히 다르군.”
“…….”
“그래, 자네가 원한다면 굳이 사족을 덧붙일 생각은 없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남궁천우의 기세가 변화한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황극린이다. 기세만으로 그를 긴장하게 한 상대가 있었던가? 없었다. 거기다 황극린의 감각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남궁천우가 작정하고 황극린을 압박하는 건 아니었지만, 작은 기세의 변화에도 황극린은 긴장했다.
모용세가의 모용가아.
그 또한 중원에서는 분명히 고수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천하칠대고수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 이른 고수였다. 아무리 황극린이라도 창천뇌검에겐 이기지 못한다. 그걸 황극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최소한 두 번 이상. 유의미한 환골탈태를 거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황극린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창천뇌검을 마주한다.
“자네의 무공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더군.”
“예.”
올 것이 온 건가.
황극린은 창천뇌검이 무슨 이유로 보자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뇌기(雷氣)를 띤 무공은 중원에 흔치 않지. 본래 뇌기라는 건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야. 다만, 특별한 재능을 이어받거나 특정한 수련을 거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곤 한다네.”
“그렇군요.”
“자네는 뇌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혔어. 처음엔 긴가민가했었지만, 모용가의 아이와 비무할 때 확실히 알겠더군.”
창천뇌검의 기세가 조금 더 강해졌다.
“자네, 뇌불의 무공을 익혔나?”
“예, 그렇습니다.”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네. 난 그의 무공을 직접 마주한… 으음.”
황극린이 당연히 부정할 줄 알았던 창천뇌검이다.
그렇기에 그를 더 압박하려 했지만, 너무도 쉽게 수긍하다 보니 창천뇌검이 당황하여 차를 후르륵 마신다. 뜨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뇌불이 누군지는 알고 있는가?”
“예.”
“설마 자네는 뇌불의 제자인가?”
“아닙니다.”
“그럼 어찌 자네가 뇌불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인가?”
“그가 남긴 장보도를 따라가니 비동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서 무공서를 발견했고, 혼자 익혔지요.”
거침없는 답변.
거기다 황극린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도 않았다. 천하의 창천뇌검이 은근히 발산한 기운은 인간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그런데도 그는 태평하게 창천뇌검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혼자 익혔다?”
“예.”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믿지 않으시면요?”
“뭐……?”
창천뇌검이 당황한다.
이렇게 반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사실 황극린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뇌불과 최근 비무를 하기도 했지만, 혈풍뇌전신공을 익힐 때는 홀로 무공서를 보고 익혔었다.
“허허허, 자네가 뇌불이 남긴 비동을 발견하여 홀로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현재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로군.”
“예.”
“자네는 천재인가?”
“그건 어떤 기준을 세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제 기준에선 천재가 아닙니다.”
어떤 말을 해도 고민하는 모습도 없이 척척 받아친다.
마치 창천뇌검과의 만남을 예측하고 그것을 대비한 것처럼 말이다.
“뇌불이 무림공적이라는 걸 알고 있나?”
“예, 하지만 그가 남긴 무공은 사특한 마공이 아닙니다.”
“뇌불은 소림의 무공을 기초로 하여 그 무공을 만들었다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나?”
“무엇을 뜻합니까?”
창천뇌검이 말을 멈춘다.
소림에 그것을 알리겠다고 말할 뻔한 것을 겨우 삼킨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황극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창창한 후배의 앞길을 작정하고 막는 게 된다. 하도 그가 거침없이 답을 내놓으니 오기가 생겼던 듯하다.
‘내가 이렇게 심적으로 흔들리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잠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창천뇌검이 입을 연다.
“자네가 위험할 수도 있다네. 소림이 그것을 요구할 수도 있어. 아니면 다른 문파가 무공을 노리고 자네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 강호 무림은 무서운 곳이라네. 천하칠대고수에 오른 나조차도 중원에서 긴장을 놓칠 수 없지.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더라도 말일세.”
“예, 조언 감사합니다.”
“…….”
황극린의 대답에 창천뇌검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자네는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는 건가?”
“무슨 말씀입니까?”
“운혜나 나나 솔직한 말로 연을 맺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자네의 행동은… 일부러 운혜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더군.”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런가? 뭐 그렇다고 치고, 난 자네를 협박하기 위해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라네.”
황극린 또한 창천뇌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황극린을 핍박하려 했다면, 둘이서 만날 것이 아니라 화산파의 장로들을 대동했을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처사였으니까. 이렇게 찻집에서 은밀히 만난 것은 황극린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묻어 두겠다는 걸 뜻했다.
물론, 황극린은 이미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혈풍뇌전신공의 존재가 드러날 각오를 했었지만… 늦게 밝혀질수록 좋긴 했다.
“그럼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네는 운혜를 어떻게 생각하나?”
황극린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는다.
설마 아니겠지?
“화음현에 온 지도 꽤 되었다네. 그런데 운혜는 자네를 생각하는 듯 보였어. 자네를 만나고부터는 늘 꾸던 악몽도 없어졌다더군. 솔직히 말해 난 자네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네. 하지만… 딸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아.”
“…….”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황극린은 살수로서 남궁세가에 접근했을 때도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여 혼인 허락을 맡았었다.
“어떤가? 운혜와 담소라도 나눠 볼 생각이 없는가? 솔직히 재미있는 성격의 아이라곤 말하지 못하겠네. 하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도 아니라네.”
황극린의 대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싫습니다.”
단호한 대답이다.
창천뇌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까지 대화를 나눠 본 것으로 황극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사랑스러운 딸아이에게 전혀 관심도 없었으며, 혹여나 남궁운혜가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들 그는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렇군. 알겠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창천뇌검이 고개를 젓는다.
“없다네.”
“예, 그럼 이만.”
황극린이 금세 떠나갔다.
창천뇌검은 아무도 없는 찻집에서 홀로 차를 마신다.
“참으로 당돌한 아이로군.”
창천뇌검도 사람이었다.
황극린의 오늘 행동에 무림의 선배에 대한 예의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창천뇌검이 황극린을 힘으로 겁박하는 성격은 아니다. 단지…….
‘필요 이상으로 나를 피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남궁세가에 좋지 않은 감정이라도 있는 걸까?
‘어쩔 수 없군. 운혜에게도 확실히 말을 해 두어야겠어.’
황극린은 사랑스러운 딸아이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생겼다.
* * *
창천뇌검이 묵고 있던 객잔으로 돌아왔다.
‘운혜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려나.’
사실 모든 것은 아비로서 그의 걱정이었다. 남궁운혜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그녀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황극린을 사내로서 마음에 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단지 아비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황극린을 만나 보니 그와 남궁운혜가 이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오늘의 일을 어떻게 딸에게 전해 줘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딸아이의 방문 앞에 섰다.
“운혜야, 안에 있느냐?”
몇 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니 창천뇌검이 문을 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으음? 수련이라도 하러 간 건가?’
화산파의 배려로 남궁운혜는 화산파의 분타에서 개인 연무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자주 무공을 수련하러 분타로 향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피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말이다.
창천뇌검의 몸이 흐릿해진다. 자연스레 펼쳐진 이형환위. 워낙 속도가 빨라 잔상이 남은 것이다.
“후청!”
객잔 방의 구석에 쓰러져 있는 수하를 발견했다. 남궁세가의 그림자 중 하나로 가주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하고, 호위의 역할도 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중위권 이상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가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서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후청! 후청!”
다행히 아직 그는 죽지 않았다.
창천뇌검이 그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자 조금씩 후청의 눈꺼풀이 움직인다.
“크으윽…….”
“정신이 드느냐? 대체 무슨 일이더냐?”
“공녀님… 공녀님께서…….”
“…….”
창천뇌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화산의 분타에 수련하러 갔다고 생각한 자신의 소중한 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설마… 만약 그러하다면…….
“누구인가.”
“백색의 가면을 쓴 놈이었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치 살수…….”
“살수라고?”
창천뇌검의 표정이 마치 악귀처럼 변한다.
만약.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이 털끝이라도 다친다면.
그는…….
“어디로 갔는가?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 보게!”
“잘 모르겠… 죄송합니다……. 쿨럭!”
후청이 피를 토한다. 창천뇌검은 그가 뿜어내는 피를 전혀 피하지 않았다. 백색의 의복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이 물드는 것처럼 말이다.
‘살수? 살수라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창천뇌검의 머릿속에 한 사내가 떠오른다.
처음 보았을 때도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긴 했었다. 마치 살수처럼 은밀한 보법을 밟은 사내. 그리고 오늘 펼쳐진 비무에서도…….
‘설마?’
황극린은 창천뇌검보다 훨씬 빨리 찻집을 나섰다.
모용가아와의 비무로 추정컨대 그의 실력이라면 뒤를 잡는다면 후청을 쉬이 제압할 수도 있으리라.
천하칠대고수의 분노.
그가 뿜어낸 기파로 객잔의 마룻바닥이 거칠게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