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관심 없다
3차 예선이 끝으로 달려갈 때쯤.
마귀의 짓이라고 판단되는 시체가 세 구 더 나왔다. 당연히 화산파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화산의 장로까지 나서 대대적으로 화음현을 수색하고 있었지만,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보니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범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자들을 몇 잡아들이긴 했지만, 결국 그들은 인간의 생기를 빨아 먹는 마귀가 아니었다.
이미 황극린은 범인이었던 혈귀비를 죽였지만, 굳이 화산에 알려 주지 않았다. 혈귀비가 누구인지, 어떻게 잡았는지 말하며 시간을 빼앗길 바에 무공을 수련하는 게 이득이라 판단했다. 거기다 아직 사망교의 지흉이 화음현에 있다는 정보가 있다.
범인을 처리했다고 했는데 또 희생자가 나온다?
그럼 황극린을 의심하는 시선이 생겨날 것이다. 굳이 마귀를 처단했다는 명성을 얻는 것보다는 이번 일에서는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원했다. 만약 황극린이 명예와 명성에 집착했었다면 동려대협(桐廬大俠)이 자신이라는 것도 벌써 밝히고도 남았으리라.
황극린의 마지막 비무가 비교적 싱겁게 끝난 가운데.
두야랑과 그녀의 친우가 된 진주언가의 언교연이 다가온다.
“오늘 비무는 빨리 끝냈구나?”
“굳이 질질 끌 필요는 없으니까.”
두야랑에게 대답해 주고 나니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괴력을 가진 무인 언교연이 황극린에게 투지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 또한 권법을 익힌 무인이었다. 황극린이 오늘 비무에서 보여 준 두 번의 주먹질은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만약 성별이 같았으면 이미 그녀가 황극린에게 비무첩을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용봉지회의 우승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용(龍)의 대회에선 서로서로 본선에서 맞붙자는 생각이 있었기에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은 서로에게 비무첩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강자’와의 싸움을 추구한다. 특히 황극린과 같이 몸의 균형이 완벽한 사내라면 더더욱.
‘싸워 보고 싶다.’
그의 주먹엔 얼마나 강한 힘이 담겨 있을까?
자신의 근육을 뚫고 피해를 줄 수 있을까?
저 강인한 사내는 자신의 주먹을 어떻게 막아 낼까?
언교연이 뜨거운 콧김을 마구 내뿜고 있으니, 두야랑이 피식 웃는다. 그녀 또한 처음 황극린을 볼 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강자와 싸워 보고 싶은 것은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감정이다.
‘몇 번 비무하니 깨달았지. 황극린은 나보다 두 수는 위야.’
일단 두야랑은 황극린과 상성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독공을 익혔다. 상대를 중독시켜 차츰차츰 힘을 잃게 하는 게 그녀의 무공이다. 하지만 황극린은 두야랑의 독기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독이 통하질 않으니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이상하게 내 공격을 다 예상이라도 한 듯이 피해 낸다는 거지.’
두야랑의 강점은 강한 완력이 아니다. 민첩함과 정확성이다. 그녀는 암기를 다루고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여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전투의 이익을 가져가는 무공을 익혔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런 두야랑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냈다. 큰 동작으로 공격을 피해 내는 것은 그나마 수월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는 만들기 어렵다.
상대의 공격을 훤히 꿰뚫은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독공도 그렇고 싸우는 방식도 그렇고, 여러모로 두야랑은 황극린과 무공의 상성이 좋지 않았다.
뭐, 언교연이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긴 하다.
그녀는 민첩함보다는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부숴 버리는 무공을 익혔으니까.
“황 소협, 저랑 싸웁시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언교연.
하지만 황극린은 그녀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세 사람에게 다가온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극린의 대답을 기다리던 언교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란다.
“남궁운혜?”
천하육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 출신의 무인.
남궁운혜는 빼어난 외모로도 유명했지만, 무의 재능 또한 몹시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오봉(五鳳) 중 제일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으니 언교연으로선 당연히 꼭 한번 싸워 보고 싶은 상대였다. 아쉽게도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관전은 하러 온 모양이다.
“이젠 구면이군요.”
“…….”
남궁운혜는 언교연을 철저히 무시하고 황극린의 앞에 섰다.
언교연의 표정이 볼만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 두야랑도 눈빛을 반짝이며 남궁운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쁘다!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생겼어.”
황극린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이번 생에서 남궁운혜와 연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 그가 한 짓이 있었으니까. 솔직한 말로 지금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껄끄럽다.
“가자, 야린.”
“어? 왜? 저 소저가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난 관심 없다.”
“흥.”
그녀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언교연이 남궁운혜를 바라보고 콧방귀를 뀌며 황극린과 두야랑을 따라간다. 남궁운혜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떠나가는 황극린을 바라볼 뿐이다.
‘왜일까?’
남궁운혜는 황극린을 바라본 순간부터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자꾸만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당장이라도 그를 따라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막상 그의 앞에 서면 뭘 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아버지의 말대로 처음 보는 사내에게 관심이 생겼단 말인가?
대체 뭘 보고?
그녀는 이제야 사내의 이름과 출신 문파를 알게 되었다.
“와, 대박이구나.”
“그러게. 어떻게 저 미모를 앞에 두고 쌩하니 가 버릴 수 있지?”
황극린이 남궁운혜를 무시하고 떠나가자 근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이 수군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긴 하네. 용봉지회에 오자마자 하북팽가의 팽여해에게 힘 싸움을 이기고… 3차 예선에서도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지. 거기다 천하의 광견살검 대협이 황 소협에게 빌빌 긴다는 소문도 있어. 거기다… 오봉에서 제일 미모가 뛰어나다는 남궁 소저까지……. 대체 황 소협의 정체가…….”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의 청각은 범인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군중의 대화를 모두 귀담아들었다.
개중엔 황극린에 대한 정보가 많이 있었다.
‘만뇌문… 광견살검…….’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은 남궁운혜가 눈을 뜨고, 아버지의 곁으로 향한다.
창천뇌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처음엔 딸을 다른 사내에게 줄 수 없다는 생각만 가득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황극린이라는 사내는 남궁운혜에게 전혀 관심도 없었다.
거기다가 그가 보여 준 무공은…….
‘뇌기(雷氣)를 띠고 있었다. 지극히 정순한 뇌기를 말이지.’
황극린은 극악무도한 자의 무공을 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창천뇌검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무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내와 이어지게 둘 순 없는 노릇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창천뇌검이 웃으며 남궁운혜를 맞이한다.
“오늘은 모용가 장남의 비무도 있다. 모용세가의 검법에선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예, 아버지.”
남궁운혜는 조용히 비무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크하하하! 황 장로님! 드디어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었군요!”
광견살검이 헤벌쭉한 표정으로 황극린에게 아부를 떨어 대고 있다. 객잔에서 홀로 얼마나 외롭게 지냈던가? 물론, 그에게도 가끔 화음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비무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타격! 이제 강호에서도 황 장로님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눈치챘겠지요! 크하하하하! 하북팽가의 대공자나 화산파의 대제자가 우승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답답하던지! 오늘 비무장 아래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보셨습니까? 가관이었습니다! 관중의 벙찐 표정을 보는데… 크크크크크!”
광견살검은 황극린의 비무를 보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황극린의 본선 진출 기념으로 함께 식사하던 언교연이 고개를 갸웃한다.
“저 사람이 정말 광견살검 맞아?”
“어, 맞아.”
“생각했던 분위기랑 다르네.”
“극린이한테만 저래. 내가 장난치면 미친개처럼 돌변해. 너도 조심해. 건들면 물어.”
“흐음, 그래?”
신기했다.
광견살검은 강호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고수 중 하나였다. 정파인이라 부르기도 조금 민망한 고수라고 할까?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광견이 아니라 충견이네.’
언교연이 피식 웃는다.
확실히 황극린은 무언가 달랐다. 무공의 실력도 그렇고, 오늘 남궁운혜를 대하는 태도도 의외였다. 대부분 무인은 그녀의 앞에 서면 잘 보이려고 애쓴다. 여인마저 감탄하게 하는 미모와 뛰어난 무공 실력. 그리고 남궁세가 출신이라는 배경까지. 연회에서 몇 번 남궁운혜를 마주한 적이 있던 언교연이었기에 그녀를 대하는 사내들의 태도를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남궁운혜를 마치 지나가는 개 보듯이 보았다.
사내가 그럴 수 있는가? 아니다. 남궁운혜의 미모는 두야랑도 감탄한 것처럼 선녀와 같다. 단순히 예쁘다기보단… 고귀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흘러넘친달까? 과거 언교연도 그녀의 미모를 홀린 듯이 바라봤던 적이 있었다.
‘마음에 드네.’
언교연은 황극린의 태도가 좋았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외모일 뿐이다. 언교연은 사람의 외면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황극린은 외모에 휘둘리지 않는 진짜 무인이다.
‘그런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니 강해질 수 있었겠지.’
황극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언교연이 황극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한번 싸워 보고 싶은 무인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무인으로 말이다.
“참, 우리도 같이 네 별채에 머물면 안 돼?”
두야랑이 황극린에게 묻는다.
3차 예선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 황극린에게 화산파는 개인 연무장이 딸린 최고급 별채를 내어 준다. 들어보니 스무 명이 묵어도 될 만큼 방이 많다고 한다.
“그래.”
황극린으로선 별 상관 없는 일이다. 두야랑이나 언교연이 함께 머문다면 같이 비무도 할 수 있으니 괜찮은 선택이다. 그런데 왜인지 광견살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황 장로님은 내가 모셔야 한다.”
“누가 뭐래?”
“만약 그걸 방해한다면…….”
광견살검이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광기를 발산하려 할 때.
“그만. 조용히 먹자.”
“예, 장로님!”
금세 기분이 풀어져서 광견살검이 식사에 집중한다. 두야랑은 수하를 얻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고 있었으며, 언교연은 황당한 상황에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재밌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자연스러움을 겪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모두들 그녀를 명문가의 자제로만 본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녀를 장남의 자리를 위협하는 애물단지로 취급했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또한, 무언가 뜯어낼 게 없는지 살펴보지도 않는다.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길 잘했어.’
언교연이 미소를 띤 채 식사를 한다.
딱히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가 좋은 언교연이었다.
* * *
3차 예선이 끝났다.
모용세가의 모용가아는 승점으로는 10위에 올랐다. 모용세가 출신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성적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용봉지회에서 3차 예선은 명문가 출신이 상위권을 차지하기 힘들다. 모두 지레 겁먹고 비무첩을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3차 예선 따위의 성적은 그에게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본선에서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냐는 것이다.
‘팽여해, 천덕, 운평자…….’
이번 용봉지회에서 베어야 할 상대를 떠올린다.
상상 속에서 세 사람은 모용가아의 검에 피를 흩뿌린다.
하지만…….
‘황극린.’
그 사내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 내는 게 상상되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제까지 비무에서 실력을 숨겼다 이거군.’
물론, 실력을 숨긴 건 모용가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극린은 정도가 심했다. 그의 경지가 어디까지 올라와 있는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었다.
거기다 모용가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또 다른 이유.
황극린이 무공 실력을 숨겼다는 것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었다. 바로 남궁운혜와 황극린에 대한 소문이다.
듣자 하니 황극린이 3차 예선 마지막 비무를 끝냈을 때, 남궁운혜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황극린은 남궁운혜를 철저히 무시했다고 한다.
황극린이 등소명을 찾았을 때,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그에게 조언했던 모습이 모용가아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황극린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남궁운혜가 모용가아와의 혼약을 거절한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왠지 패배한 것 같은 기분.
자신이 거느리고 거절했던 여인을 찾던 황극린에게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황극린을 이겨야 한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승리하여 치욕을 되돌려줘야 했다.
그렇기에 모용가아는 비무 상대가 황극린이길 바랐다. 결승에서 만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황극린이 만약 다른 우승 후보에게 패배한다면… 이 더러운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모용 공자님, 본선 일정이 발표되었어요!”
모용가아를 따르는 여인 중 한 명인 영운설이 달려왔다.
“누굽니까?”
“황극린이에요!”
역시 하늘은 자신을 돕는다.
모용가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베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