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과거의 악연
과거인 현재의 시점에서는 미래에서 황극린은 살수였다.
과거랑 현재와 미래는 확실히 다르다. 황극린은 처음으로 선택을 하여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던 황씨 가문의 생활에서 황극린은 고작 자존심 때문에 비 노인의 도움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이번엔 다른 선택을 했다. 비 노인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같은 문파가 되어 함께하고 있다.
천하의 대마두였던 뇌불을 살려 뒀던 것도 황극린에겐 색다른 선택이다.
분명히 위협이 될 상대였다. 몸을 회복하면 황극린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황극린은 뇌불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황극린과 함께 만뇌문에 있다.
절맥증을 앓았던 비 노인의 손자 비청하를 치료해 준 일.
흑살문에 끌려갈 운명이었던 백건악을 구해 주고, 그의 동생의 병을 치료해 준 것.
모든 게 다 황극린의 선택이었으며, 지금까지는 그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하게 되니 느낌이 기묘했다. 또한, 그녀의 옆에서는 황극린의 마지막 표적이었던 창천뇌검이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 표정이 떠오른다.
창천뇌검은 207호였던 황극린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를 보며 자신의 딸인 남궁운혜를 떠올렸을 것이다.
남궁운혜는 지옥에나 떨어지라며 황극린을 저주했었다.
황극린은 살수의 훈련을 받아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인 마음이 제거된 것도 아니다. 특히 다른 선택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왔던 황극린에게 두 사람과의 만남은 솔직히 고역이었다.
그랬기에 황극린은 두 사람을 그냥 지나치려 했다.
과거의 잘못을 현재에서 보답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굳이 남궁운혜와 창천뇌검과 인연을 맺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세 사람이 서로를 스쳐 가는 순간.
우뚝.
남궁운혜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멈추니 덩달아 창천뇌검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으음?’
창천뇌검은 의아해했다.
딸아이가 이제까지 다른 사내에게 시선을 두거나 관심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지금 남궁운혜의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왜인지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녀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회성이 없는 것이라며 타박하기도 했지만, 딸 바보인 그는 매번 남궁운혜를 변호했다. 그녀가 가진 무인의 자질이라며 말이다.
그런 딸이 사내에게 관심을 둔다?
거기다 머리는 산발하여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고, 왜인지 위험한 냄새가 나는 사내를 말인가? 사내에게선 잘 익은 고기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것은 뭐지?’
황극린은 지금 혈귀비의 시체를 담은 포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살수의 경험을 이용하여 시체의 냄새를 완전히 지웠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다행히도 창천뇌검 같은 고수도 그 안에 시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잠시만요.”
“……!”
창천뇌검이 기겁했다.
다른 사내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모자라서 말까지 건다고? 대체 왜? 창천뇌검의 예리한 눈빛이 처음 보는 사내의 면면을 세심히 훑는다. 대체 무어가 어떤 것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딸 아이의 시선을 빼앗았던가? 그리고 왜 말까지 거는가?
솔직한 말로…….
“으음? 운혜야, 왜 그러느냐?”
질투가 났다.
창천뇌검 남궁천우는 전형적인 딸 바보였다. 아들만 줄줄이 낳다가 마지막에 겨우 얻은 딸. 그녀의 미모는 오봉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평을 자주 듣기도 했으며, 자신이 봐도 외모로는 중원제일이라 할 만했다. 거기다 무공의 재능은 어떠하냐? 솔직히 말해 사내로 태어났다면 대(大)남궁세가를 물려받을 자질 또한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찌 딸 아이를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
하지만 딸 아이의 관심을 받은 사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마치 귀찮은 듯한 태도에 창천뇌검은 약간 황당했다. 사내 또한 무림인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딸을 모른단 말인가? 이것 나름대로도 자존심이 꽤 상한다.
‘그렇다고 해도 운혜를 내줄 수는 없지!’
창천뇌검의 의식 흐름이 벌써 혼인 결사반대까지 도달했을 무렵.
남궁운혜가 황극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일까?
사내를 보니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다. 이런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분노인지 설렘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단지… 처음 보는 사내와 마주치는 순간 남궁운혜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다 먼저 말을 걸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
황극린이 빤히 그녀를 바라본다.
남궁운혜의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창천뇌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적으로 사내의 기세가 돌변했다. 사내가 내포한 기운은 참으로 기묘했다. 분명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경계가 된다. 단순히 딸 아이의 관심을 끌어서 아비의 마음으로 경계하는 건 아니었다.
‘으음, 어디 출신인지 궁금해지긴 하는군.’
창천뇌검이 황극린을 빤히 바라본다.
딸 아이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내일까?
황극린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만.”
“아니에요. 분명히 당신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단호한 황극린의 대답에 남궁운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사내가 저리 단호하게 대답하는데, 뭐라 할 말이 있을까? 거기다 남궁운혜 또한 사실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묘하게 익숙하긴 하지만…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를 마주하면 묘한 감정이 용솟음친다고 할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황극린은 커다란 포대를 짊어지고 떠나갔다.
남궁운혜는 그를 막지 못하고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사내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것이더냐?”
“아니에요. 그냥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렇더냐…….”
그게 관심이 아닌가?
사내는 딸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답하지 않았던가?
“가요.”
“그래, 배고프지? 들어가자꾸나.”
두 부녀가 객잔 안으로 들어간다.
안휘성에서 섬서성까지 오랜 여정을 했다. 평소엔 용봉지회 같은 것에 관심도 두지 않던 딸 아이였지만, 왜인지 이번에 열린 용봉지회를 관전하겠다고 말했다. 뛰어난 기재들의 비무를 보는 것도 성취를 늘릴 방법이었으니 창천뇌검은 자신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섬서성으로 향했다.
이제 화음현에서 딸 아이와 함께 추억을 쌓아 올릴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창천뇌검이었지만, 왜인지 불안해진다. 딸과 평생 함께한다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 당장 사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창천뇌검이다.
고작해야 한두 마디 나눈 것으로 사위가 된다는 과대 해석을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내에게 저렇게 말을 건 딸 아이의 모습은 처음 보았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 후청.
- 예, 가주님.
- 저 사내의 뒤를 밟아 보아라.
- 존명.
창천뇌검의 명령에 남궁세가의 은밀한 그림자가 황극린을 쫓기 시작했다.
* * *
‘이상하군.’
지나고 보니 이상하긴 하다.
남궁운혜의 성격은 황극린이 잘 알고 있다. 현재의 남궁운혜가 인간을 불신하는 상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내에게 말을 걸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남궁운혜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까?
남궁세가의 추적을 손쉽게 따돌린 황극린이 혈귀비의 시체를 처리한 후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녀도 나처럼 과거로 귀환한 건가?’
그녀는 황극린이 과거로 귀환하는 시점에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이다.
남궁운혜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순간, 그는 따스함을 느끼고 황씨 가문의 우사에서 눈을 떴다.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아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남궁운혜가 만약 자신처럼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와 만나는 즉시 검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또한, 황극린은 개방이나 하오문과 접촉한 시점부터… 현재에는 있을 수 없는 정보를 탐색하는 이들을 경계했다. 가령 207호의 별호였던 ‘혈귀’를 찾는 존재가 있는지 확인하는 식이다. 당연히 이제까지 그런 이들은 없었다. 만약 남궁운혜 또한 황극린처럼 과거로 왔다면 그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혈귀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존재였으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번 생에서 남궁세가와 연을 맺을 일은 없다.’
황극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속죄는 할 것이다. 혈귀비를 잡고, 그 뒤에 있는 사망교의 천흉과 지흉을 잡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을 정리한 황극린은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만화각으로 돌아갔다.
* * *
용봉지회 3차 예선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넘어섰다.
황극린은 이미 본선 진출이 거의 확실시됐다. 우승을 목표로 두었으니 당연했겠지만, 3차 예선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들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하북팽가의 팽여해, 모용세가의 모용가아, 화산파의 운평자 그리고 소림의 천덕.
그 외에도 황극린처럼 처음부터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던 참가자는 아니었지만 비무대회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이들도 있었다.
일인전승 문파 출신인 건곤일원문(乾坤一元門)의 구강룡이나 잃어버린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철권이가(鐵拳李家)의 장남 이능파 등이 있다.
오늘은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황극린과 건곤일원문의 구강룡의 비무가 있는 날이다. 우승 후보끼리는 최대한 본선에서 맞붙으려 하기에 비무가 성사되지 않았지만, 구강룡은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황극린에게 비무첩을 보냈다.
여기서 황극린이 승리하면 단번에 최상위권을 확정 짓는다.
최상위권에 오르면 화산파에서 제공하는 편의가 많았기에 승점을 많이 모을수록 좋았다.
“건곤일원문의 구강룡이오. 당신과의 비무를 고대하고 있었소.”
“황극린이오.”
이번 비무에서 구강룡이 승리하면 황극린에게 쏠리던 관심이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다. 후기지수가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이유는 대개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다. 본선에서도 증명해야겠지만, 그는 3차 예선부터 주목받고 싶었다.
“건곤일원문의 도법(刀法)은 자비를 모른다오. 호신강기를 제때 사용하지 않으면 불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오.”
“조언 고맙소.”
황극린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제까지 비무에서 그는 비무첩을 받기 위해서 적당히 힘을 조절한 측면이 있었다. 처음 비무를 했던 기등교와 무식하게 보이는 힘 겨루기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황극린에겐 오늘의 비무가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질질 끌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가진 것을 모두 드러내서 싸우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굳이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때애애앵-!
비무의 종이 울리고, 황극린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이제까지 비무에서 황극린이 보여 줬던 기세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비무에서 상대를 탐색하고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상대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짓누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황극린은 다르다.
그의 손에는 뇌기가 깃들어 있었다.
“하아아압!”
거대한 도가 허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황극린은 초감각을 이용하여 그의 도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뇌전처럼 구강룡의 복부에 꽂힌다.
“커억!”
복부에 전해지는 충격.
초근접전에선 권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밀린다. 얼른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서야 한다.
구강룡이 황급히 거리를 벌리려 할 때.
쉬익.
퍽!
황극린이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그를 따라잡았다. 또다시 뇌전이 담긴 주먹이 구강룡의 복부에 똑같이 꽂힌다.
울컥!
구강룡의 입에서 피가 흐른다.
이미 내상을 입은 것이다.
“커억……! 이, 이대로 끝낼 수는…….”
무인들이 수치로 여기는 나려타곤마저 펼친 구강룡이었지만…….
“……!”
그 끝에는 황극린의 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황극린은 굳이 땅에 쓰러진 상대를 짓밟진 않았다.
“어쩌시겠소?”
“쿨럭… 제가… 졌습니다…….”
구강룡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패배를 선언했다.
멍하니 비무를 바라보던 군중에게서 환호성이 아닌 의아함이 터져 나온다.
“대체 뭐야?”
“황 소협이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건가?”
“어떻게 구강룡을 주먹질 두 번에……?”
“크크크, 황 장로님의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비무장 곳곳에서 경계심 어린 시선이 황극린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화산파의 장로들도 있었으며.
남궁세가에서 온 가주와 그의 딸 남궁운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