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혈귀비
사망교(死亡橋)는 아직 무림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문파였다.
하지만 사망교의 교원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힘을 가졌으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이 스스로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사망교에 소속된 혈귀비는 지금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그녀가 훗날 취하려고 했던 목표물이었다. 자고로 맛있는 음식은 아끼고 아껴 마지막 순간에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용봉지회를 끝마쳤을 때,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한 후.
결국 황극린이 자신에게 빠져들었을 때.
혈귀비는 그를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왜일까? 단지 몇 번 마주쳤던 것일 뿐인데, 황극린이 자신에게 빠져들었던 걸까?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혈귀비는 황극린을 내치지 않았다.
그녀가 세워 놓았던 계획이 존재하지만, 눈앞에 있는 황극린의 유혹이 상당하다.
인간이 품고 있는 정기(精氣)는 저마다 맛이 달랐는데, 그에게선 분명히 이제껏 맛보지 못하였던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인한 육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정기를 지니고 있으니까. 최소한 그가 품은 내공만 해도… 얼마나 정순할까?
그렇기에 혈귀비는 황극린에게 앉으라 말했다.
부러움에 휩싸인 사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용봉지회에서 자진 탈락을 선언했다고 들었소.”
“예, 제 수준으로 용봉지회는… 아직 벅차더군요. 그래서 포기했답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을까요?”
“아니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
무슨 뜻일까?
만화각 내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는 뜻일까?
혈귀비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 소협께서 술을 즐기실 줄은 몰랐답니다.”
“가끔 하오.”
이건 황극린의 거짓말이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애초에 취한다는 감각을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고 생긴 내성으로 술에 잘 취하지도 않는다. 그에겐 술을 마셔도 물을 많이 마신다는 느낌뿐이었다.
“제가 잔을 올리겠어요.”
“고맙소.”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술잔을 채워 주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잔을 비울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극린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하아…….’
혈귀비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만화각을 나선 이유는 당장 그를 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식가(美食家)는 자신만의 특별한 기호를 가지고 있다. 원하는 상황과 분위기에서 취해야 마땅하건만 눈앞에 진미(珍味)가 있으니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황극린을 자리에 앉힌 순간부터 그녀는 선택을 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혈귀비는 저도 모르게 술에 특수한 독을 탔다.
황극린의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벌써 효과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황극린을 보내 준다? 그녀는 오늘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역시 기회가 됐을 때… 취하는 게 좋겠지?’
혈귀비가 윗입술을 핥는다.
모종의 신호였다. 그녀의 살결에서 미묘한 향이 터져 나온다. 주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던 손님들도 그녀를 힐끔 바라볼 수준이었으니 이미 독을 취한 황극린은 어떠하리?
산발하여 눈을 가린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눈빛이 어떠한지 확인할 수가 없는 게 혈귀비의 아쉬움이었다. 점점 타락하는 사내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었다.
‘이젠 어쩔 수 없어.’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한 시진이 흘렀을 무렵.
황극린이 먼저 운을 뗐다.
“이 자리는 파하시는 게 어떻소?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오.”
“아…….”
황극린의 재촉은 혈귀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여긴 너무 시끄럽네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죠?”
“갑시다.”
황극린이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혈귀비는 부끄러운 척 연기하며 그의 뒤를 따른다. 이미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취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미 먹잇감이 눈앞에 있다. 후회는 내일로 미루자. 그녀의 선택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객잔의 방으로 들어섰다.
‘용봉지회 3차 예선에서 성적을 내고 있으니… 황극린을 취하고 나면 화음현에서 자리를 떠야겠지.’
아쉬운 마음은 없다.
중원 어디를 가더라도 사내는 널려 있었다. 용봉지회는 특유의 활기가 마음에 들어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분위기에 취해 벌써 세 명의 사내의 정기를 빨아먹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톱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또한,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황 공자님,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시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만화각에서…….”
황극린은 어두운 방 안에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시선이 혈귀비를 더 흥분시켰다.
“모용가아와 내 정기를 흡수하려 했겠지.”
“네에……?”
잔뜩 흥분해 있던 혈귀비는 황극린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기를 흡수하려 했다고?
“지금 그게…….”
혈귀비가 기세도 끌어 올리기 전.
황극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
툭. 툭. 툭.
황극린의 손가락이 혈귀비의 혈을 점했다. 아무리 그녀가 방심했다고 해도 너무도 쉽게 점혈당했다. 황극린의 방금 움직임은 뭐였지? 중독됐다면…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움직임이다.
‘설마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혈귀비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망교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면 모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그녀는 강호에 수많은 원수를 만들어 놓았다. 아직 그녀가 원수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겠지만.
그녀가 혀 밑에 품고 있던 독단을 깨트렸다.
그 독단에는 한 방울로도 호랑이 수십 마리를 중독시킬 정도의 강력한 독이 들어 있었다. 미련하게도 황극린은 아혈을 짚지 않았다. 그렇기에 혈귀비는 입을 움직여 독단을 터트렸다.
“후우우……!”
공간에 녹아든 뿌연 연기.
이것은 초절정 수준의 고수라도 견디지 못한다. 황극린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흐물흐물하게 녹아 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그때가 바로 사내가 가장 취약한 시점이었다.
‘아아…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지.’
알고 보니 황극린은 혈귀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방심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그녀에게 다른 수가 있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가 오늘 죽는 이유였다.
“그것도 괜찮은 결말이겠군요.”
혈귀비가 점혈을 당했음에도 여유로이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분명히 색화요독(色化妖毒)은 초절정 고수도 한번 코로 흡입하면 버텨 낼 수 없는 극독이다. 황극린의 수준은 초절정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도… 쉬이 빠져나갈 순 없는 특급의 독. 자신이야 특별한 무공으로 그것에 내성이 있다지만…….
“왜……?”
혈귀비가 두 눈을 깜빡인다.
대체 황극린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말인가?
툭. 툭툭.
황극린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손바닥을 두 번 부딪친다. 그러자 기묘한 감각이 혈귀비의 살갗에 전해지고 있었다.
사라라락.
벌레가 기어 오는 것 같은 느낌. 대체 그가 무슨 짓을…….
눈동자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꺄아아악……!”
거의 사람의 손보다 두 배는 큰 거미가 그녀의 몸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징그러운 요물은… 엉덩이에서 실을 뽑아 혈귀비의 팔과 발목을 묶고 있었다.
“사망교원들은 숨겨 둔 기술이 있다더군. 점혈도 풀 수 있다지?”
“……!”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대체 이자는 누구란 말인가?
어떻게 사망교의 이름까지 알고 있지? 사망교는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름을 정한 것도 고작해야 2년 전이다. 설마 사망교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사망교원들은 그들이 3살 때부터 함께했다. 교원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가…….
“혈귀비.”
“……!”
대체 어떻게 자신의 이름마저?
이 사내는 대체 누군가? 누군데 사망교와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천흉(天凶)과 지흉(地凶)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꺼흑……!”
천흉과 지흉까지 알고 있다고?
혈귀비는 졸도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다, 당신은 대체? 대체 누구죠? 어떻게… 어떻게 사망교의 모든 것을…….”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해 둘까.”
“예……?”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렇게만 알아 둬라.”
황극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혈귀비를 살려 둘 생각이 없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함락시키더라도 수하로 거둘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사망교의 놈들이 마귀로 불렸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미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반인륜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황극린이 아는 한 그들은 중원에서 가장 추악했던 무리였다.
‘이놈들을 척살하기 위해서 10년 뒤에 흑살문의 특급 살수 두 명이 투입되지.’
거기다 사망교는 10년 뒤에 흑살문뿐 아니라 사흑련과 무림맹과도 척을 지게 된다.
그만큼 10년 뒤에는 그들의 세력은 황극린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사실 10년 후의 혈귀비였다면 황극린에게 이렇게 어이없게 잡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 그녀는 수많은 무인의 정기와 내공을 취하며 막강한 고수로 거듭난다.
순간적인 전투력은 천하칠대고수에 버금갈 정도로 말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전투를 오래 끌면 천하칠대고수에게 패배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황극린은 그녀에게 얻어 낼 것이 많았다.
첫째로…….
“소녀환희공(素女歡喜功)은… 여깄군.”
그녀의 품을 뒤져 허름한 서책 하나를 꺼내 든다.
표지에는 어떠한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황극린은 구결을 대충 살펴보고 그것이 소녀환희공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제 천흉과 지흉이 어딨는지 말해 줄 차례인가?”
“내, 내가 그것을 말해 줄 것 같으냐? 네놈이 누군지나 말해라. 네놈은 대체……!”
황극린이 작게 미소를 머금는다.
“난 황극린이다.”
“뭐?”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황극린에게 살의가 치민다. 당장이라도 놈의 뇌수를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점혈을 풀어도 끈적한 거미줄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살수였기도 하지.”
“살수……?”
황극린은 무심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네가 어떻게 해야 고통스러울지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황극린은 더는 말로 협박하지 않았다.
그가 묵철로 만든 단검을 뽑는다. 뇌전의 기운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중 하나였다. 그가 묵철 단검으로 여인의 피부를 갈랐다.
동시에.
찌리리리릿-!
뇌수까지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뇌전이 혈귀비의 몸에 깃들었다.
“끼아아아악!”
머리가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뇌가 녹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황극린이 묵철을 뗀다.
그리고 묻는다.
“천흉과 지흉의 위치를 말해라.”
“하아악… 그, 그건 왜…….”
황극린이 다시금 묵철을 가져다 댄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그녀는 결국 정보를 털어놓게 될 것이다.
찌리리리릿!
“꺄아아아아악!”
혈귀비의 눈이 뒤집혀 흰자위를 드러냈다.
* * *
“…….”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혈귀비.
그녀는 미래에 수많은 무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황극린이 이름을 아는 피해자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만큼 그녀의 악명은 10년 뒤에 절정에 달한다는 소리다. 황극린이 이름을 아는 무인이라면 중원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사망교의 교원들은 모두 특이하고 특별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흡수하는 흡성대법이나 소녀환희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자들. 천흉과 지흉이 대체 어떻게 그런 자질을 가진 이들을 선별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사망교는 힘을 가지지 못했다.’
혈귀비는 결국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창천뇌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천하칠대고수가 나서야 할 만큼 사망교의 세력이 그만큼 힘을 가지려면 10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 전에 놈들을 말살해야 한다. 그들이 중원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건 황극린이 전생의 잘못을 반성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사망교, 정확히는 사망교주인 천흉과 지흉은 ‘그녀’가 인간 불신을 가지게 만든 이들이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그러한 불신을 도구로 삼아 그녀에게 다가갔었다.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혈귀비에게 얻어 낸 정보.
천흉과 지흉 중 하나가 화음현에 있다. 그들이 왜 굳이 화음현까지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혈귀비도 모른다고 했다.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볼 차례였다.
황극린은 어느 정도 이유를 예측하고 있었다.
천흉과 지흉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로 탐스러운 먹잇감이 화음현에 있지 않을까?
혈귀비의 시체를 깔끔히 처리한 황극린이 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예민한 청각으로 누군가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와, 보았는가?”
“봤지. 암, 봤고말고.”
“오봉(五鳳) 중 미모로는 으뜸이라더니 그 사실이 틀리지 않았구만……. 어찌 사람의 외모가 저리도 아름다운지…….”
“그러게나 말일세.”
미(美)에 대한 순수한 감탄.
그런 수군거림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황극린은 젊은 날의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창천뇌검.’
살수 207호의 마지막 표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