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81화 (81/316)

81화 마귀

화음현은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장소이다 보니 중심가에는 늦은 시간인데도 인파가 몰려 있다. 등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고, 수많은 후기지수가 미소를 머금은 채 새로운 인연을 만나 현재를 즐기고 있다.

절강성에서 온 무인과 사천성에서 온 무인이 합석하여 서로의 술잔을 채워 주고, 강호 무림에 대한 담소를 나눈다. 또 어떤 이들은 검(劍)이 더 강한지 도(刀)가 더 강한지 열띤 토론을 펼치기도 한다. 가끔 시비가 붙어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피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분위기가 워낙 좋았기에 싸움은 금방 정리된다.

한차례 다투었던 이들은 술 한잔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새로운 인연이 된다.

그리고 화음현에서의 만남 중 가장 뜨거운 것은 역시나…….

“어머, 술이 많이 취했나 봐요.”

유난히 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이 휘청인다.

그러자 그녀와 같이 술을 마셨던 젊은 무인이 황급히 허리를 잡아 그녀를 부축해 준다.

“이런, 제가 실례를…….”

“오 소저, 묵고 계시는 객잔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여기선 조금 멀답니다. 어쩌죠……?”

“혼자 묵고 계신다고 하셨습니까?”

“네에…….”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 힘 셉니다!”

“어머…….”

“가시죠!”

여인은 못 이기는 척 사내에게 몸을 기대어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입은 헤벌쭉 벌어졌으며, 뜨거운 콧김이 새어 나오고 있다. 오늘은 두 인연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다. 용봉지회는 젊은 무인들이 서로의 인연을 찾으러 오는 장소이기도 했다.

‘내가 평생을 지켜 주겠소!’

사내의 다짐이 여인에게 전해졌을까?

여인이 사내의 품으로 더 다가갔다.

“흡!”

두 사람은 화음현의 중심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장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젊은 남녀를 주목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여인의 뭉툭했던 손톱이 어느샌가 길어져 뾰족하게 변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던 젊은 무인은 애초에 그것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등불이 밝혀지지 않은 뒷골목의 어둠 속이었다.

* * *

“그러니까.”

“용장문의 대상천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친우인데, 오늘 보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종이라는 겁니까?”

“예! 얼른 찾아야 합니다.”

화산파의 화음분타.

화음현의 분위기가 좋더라도 사건 사고는 끊임없이 생겨났다. 분쟁이나 사고를 해결해 주는 것은 용봉지회를 개최한 화산파였다. 사해방의 견휘는 이곳에서 새로운 친우를 만났다. 처음엔 눈을 마주쳐 싸움이 붙을 뻔했지만, 어느샌가 두 사람은 친우가 되었다.

어제 오후에 두 사람은 술을 마셨고, 오늘 아침에 매화객잔에서 만나 강호와 무공에 대하여 담론을 나누기로 약조했다. 견휘에게 있어 대상천은 약조를 어길 사내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중소문파의 출신이었고, 용봉지회의 3차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통하는 게 많았다.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접수했습니다. 용장문의 대 소협을 찾게 되면 어디로 연락드리면 되겠습니까?”

사무적인 대답이었다.

당연했다. 본래 서로 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화음현에 와서 처음 만난 사이란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실종이라니……. 화산파 무인들의 업무량은 용봉지회가 개최되고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기에 이런 신고는 적당히 처리하는 게 정답이었다.

“전 매화객잔에 묵고 있습니다. 꼭 좀 찾아…….”

그때였다.

“가 사형,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화산파의 무인 중 하나가 허겁지겁 분타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기묘한… 아니, 이상한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이상한 시체?”

“예…….”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그게 말입니다.”

화음현의 뒷골목에는 임시로 영업하는 객잔들이 많았다. 본래 민가였지만 용봉지회의 특수성을 이용하여 숙박업을 하는 백성들이 있었다. 오늘 그곳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온몸의 피가 다 빨린 듯… 새하얗게 질린 노인의 시체였습니다.”

“노인이라? 그런데 피가 빨려?”

“예, 이게 말로 설명하려니 어렵군요. 사형께서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실 듯합니다.”

“가자.”

견휘는 묘한 직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저도 같이 가서 시체의 얼굴만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의 시체라 하지 않았습니까? 친우분은 20대 초반이라고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요.”

안 그래도 바쁜데, 견휘가 같이 가겠다고 나서니 화산의 무인은 짜증이 치밀었다. 무공을 익히고, 도(道)를 닦는 무인이라 해도 사람이었으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얼굴만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화산의 무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견휘의 표정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확인만 시켜 드리죠. 가자.”

“감사합니다!”

세 사람이 노인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사람이 잔뜩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잔뜩 모여 있어?”

“시체가 발견됐다는구먼.”

“시체? 별일 아니구만.”

“아니야, 이 친구야. 보통 시체가 아니란 말이야.”

화산의 31대 제자 가검통이 내력을 담아 크게 외친다.

“모두 물러서 주십시오. 화산에서 왔습니다.”

인파가 갈리며 길이 생겨난다. 가검통과 견휘가 그곳을 지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체를 지키고 있던 화산의 무인들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키거라.”

가검통이 시체를 덮은 두꺼운 천을 거두었다. 그리고…….

“……!”

가검통은 용봉지회가 열리는 동안 순찰대의 대장직을 맡고 있다. 사람이 몰린 것치고는 사상자가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싸움이 일어나 죽은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가 최근 본 시체만 다섯 구가 넘었다. 검에 복부가 베여 튀어나온 내장을 본 적도 있고, 머리가 깨져 인간의 뇌수도 보았다.

그때도 속이 안 좋긴 했지만…….

지금은 비교할 수 없는 역겨운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대체 이건…….”

가검통이 시체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리고 억지로 그를 따라온 견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안 그래도 이런 상황에 짜증이 나는데, 괜히 따라와서 뭐 하는 건지.

그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려는 찰나.

“사, 상천! 상천이가 맞습니다!”

“뭐라고요?”

“주, 주름 때문에 노인처럼 보이지만… 이건 정상적인 주름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온몸에 이렇게 주름이 생긴 노인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견휘는 벌벌 떨면서도 시체의 얼굴을 직시했다.

분명히 친우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합니다. 주름에 비해 피부에 검버섯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인위적으로 주름을 늘린 것처럼 탄력이 거의 없습니다.”

“생기(生氣)라도 뽑혔단 말이더냐?”

가검통이 자신이 말하고 몸을 떨었다.

소문으로는 들어 본 적이 있다. 사람의 생기를 뽑아 먹는 마귀(魔鬼). 요물이나 요괴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무림에는 괴이한 마공을 익혀 잔혹한 짓을 일삼는 이들이 많았다. 마두라 불리는 이들은 그나마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마귀 놈들은…….

“육 장로님을 호출해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듯하다.”

가검통의 상황 판단은 빨랐다.

여기서 공적을 세우겠다고 시체를 훼손하거나 하면 오히려 문책이 떨어질 것이다. 차라리 빨리 장로급의 인사에게 보고하는 게 좋았다.

‘육 장로님이라면 마귀 놈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가검통은 그러길 바랐다.

영광스러운 용봉지회에서 마귀가 날뛰었다는 건 화산의 명예가 추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 * *

황극린은 모용가아를 먼저 찾아갔다.

평소 그와 여인이 매번 붙어 있던 걸 지켜보았으니까.

“등 소저 말입니까?”

모용가아의 표정에 불쾌함이 깃들었다.

그것은 황극린을 향한 것이 아니다. 등소명이라는 여인에게 향한 것이다.

“설마 황 소협, 등 소저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오만.”

하지만 모용가아는 황극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젊은 사내들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주변에서 그러한 경우를 많이 본 모용가아였기에 황극린도 그럴 것이라 착각했다.

“등 소저는 용봉지회를 포기하고 오늘 만화각을 떠났습니다.”

“떠났다는 말이오?”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떠나다니?

“성격이 밝고 쾌활하여 곁에 두기 좋은 여인이라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젯밤 그녀가 제 숙소로 찾아와 술을 권하더군요. 제가 여색을 밝힌다고 생각하여 쉽게 생각한 모양인데… 착각이지요. 전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식당에 올 때마다 여인을 끼고 오는 모용가아의 말이니 딱히 신뢰는 가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육체적인 쾌락을 탐하는 사내는 아니었다. 단지, 사내보다 여인과 대화하는 게 더 편한 성격이라 할까? 아무튼, 황극린에게 그런 부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더군요. 왜 갑자기 술을 가지고 절 찾아왔을까? 몸에 찰싹 달라붙는 옷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술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아십니까?”

“무엇이오?”

“술에는 강력한 최음제가 섞여 있었습니다. 한 방울만 맛보았는데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더군요. 바로 운기행공을 해서 몰아냈기에 망정이지… 만약 술을 그대로 마셨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더군요.”

모용가아가 황극린에게 조언하듯 말한다.

“그러니 등 소저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반려를 잘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외모만 보고 여인을 만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되도록 오랜 기간 만나 보고 성정이 어떠한지 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황극린에 대하여 무언가 착각한 듯하다.

거기다 묘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배경도 외모도 무공의 실력도 뛰어난 사내에겐 여인이 들러붙기 마련이지요. 황 소협께선 무공의 실력이 출중하시니 들러붙으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비단 여인들만 조심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평정심을 가지고…….”

어느샌가 모용가아는 황극린에게 훈계 같은 조언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쳐 낸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내에게 가지는 묘한 우월감이라고 할까?

“만화각에서 떠났다는 말이오?”

“황 소협, 그녀를 찾지 마시라니까요. 위험한 여인입니다. 최음제를 쓸 정도로 독한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모용가아였다.

혈귀비는 한번 정한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집어삼켜 버린다. 만약 그녀가 모용가아를 노렸다면 뻔히 보이는 수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떠난 이유는…….

‘다른 목표물을 찾았을 때.’

그녀의 진짜 이름은 등소명이 아니다.

그건 그녀가 만든 가명이다. 그녀의 진짜 정체는 혈귀비. 과거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사망교(死亡橋)의 일인이었다.

‘나나 모용가아를 노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가?’

아쉽게 되었다.

손쉽게 혈귀비를 처단할 줄 알았는데, 이미 다른 목표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용봉지회는 사망교에겐 연회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럼 다음에 뵙겠소.”

황극린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실망감이 있다고 생각한 모용가아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제 조언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요.”

* * *

황극린이 최근 집중해서 훈련했던 것은 감각의 제어였다.

예민해진 청각이나 후각 따위를 인위적으로 차단하거나 감각 중 하나를 최대한 극대화하는 수련을 해 왔다.

황극린은 중심가를 거닐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혈귀비는 분명 인파가 몰린 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진쯤 거닐었을까?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뭐?”

“피가 다 빨린 시체가 벌써 두 구나 발견됐다는군.”

“피가 빨렸다고?”

“듣기로는 원래 젊었는데… 생기까지 빨려서 폭삭 늙어 버린 채로 죽었다는군. 징그럽지 않은가?”

“허허…….”

혈귀비는 분명 아직 화음현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엇을 노리고 모용가아를 포기하고 나갔는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탐스러운 먹잇감을 찾은 것은 분명했다.

‘아마 혼자 있진 않겠지. 어쩌면 그놈도 같이 있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황극린이 청각과 후각에 정신을 집중한 채, 한 시진 동안 중심가를 거닐었을까?

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건…….’

황극린이 불쾌한 내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에서는…….

“…….”

한 여인이 객잔 구석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더 짙어진 듯하다. 아름다운 여인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니 몇몇 사내들이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려는 순간.

황극린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합석해도 되겠소?”

찰나의 순간 여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깃들었지만…….

여인은 황극린의 합석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앉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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