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친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모용가아와의 만남은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또한 미래에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초고수가 될 테지만, 그런 이들은 막상 찾아보라면 널리고 널린 게 무림이다. 구파일련의 대제자와 육대세가의 소가주들은 모두 미래에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가지게 된다.
어릴 때부터 가문과 문파의 지원을 받은 재능 충만한 이들의 미래는 비슷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여인은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시선이 갔다.
‘정파의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히 아니다. 두야랑처럼 정체를 속이고 용봉지회에 참가했을 확률이 높지.’
이것도 황극린에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다.
정파 무림이 개최한 비무대회에 사파인이나 흑도인이 참가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여인의 출신 배경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긴 했으나… 조금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다.
‘아직 용봉지회는 꽤 많이 남았으니 괜찮겠지.’
아침을 먹기 위해 자하식당으로 발을 옮기던 황극린.
그가 한 무리의 일행과 눈을 마주친다.
“황 소협, 아침은 일찍 먹나 보오?”
묘하게 날이 선 무릉파의 기등교.
어제 황극린에게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했던 참가자였다. 그의 곁에는 딱 봐도 실력자처럼 보이는 외관의 참가자 8명이 있었다.
“그렇소.”
“되도록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것이오. 용봉지회의 3차 예선은 혼자 헤쳐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오. 만약 혼자의 힘으로 3차 예선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비무를 하다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소?”
황극린이 무심하게 답한다.
“기 소협과 같이 식사하면 상처가 절로 아무는 것이오?”
기등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둘이서 대화할 때 저리 말했으면 유쾌하게 넘길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백룡회의 무리가 다 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황 소협은 용봉지회의 적응이 덜 끝났나 보오. 혼자서 용봉지회를 헤쳐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오.”
조언하며 기를 세우려 했던 기등교였지만, 황극린은 딱히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군.”
황극린은 무심하게 자리를 떴다.
굳이 저들과 입씨름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뭐, 저들이 악심을 품어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비무첩을 받으면 냉큼 수락하면 그만이다. 승점을 빨리 채우고 여유로이 수련에 매진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황 소협이라고 했던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군.”
기등교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성황파의 조심홍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듯하오. 비무첩을 세 번 받으면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 아니겠소?”
백룡회 중 한 명인 고문종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조심홍이 혀를 차며 대답한다.
“여기 모두가 실력이 증명되었지 않소. 2차 예선을 통과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실력은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비무첩을 받다 보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겠지.”
조심홍의 말에 백룡회의 무인들이 동조한다.
“맞습니다. 강호 무림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지요.”
“아직 황 소협께서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듯하군.”
모두가 한심하다는 듯 황극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무리에 속한 이들이었기에 자신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황극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린다. 서로의 유대감을 더욱 끈끈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갑시다.”
“그럽시다.”
확극린을 따라 백룡회의 무인들이 자하식당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자하식당에서 식사하는 무인들은 많았다. 하루 만에 모두 저마다의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황극린처럼 홀로 식사하는 무인들도 간간이 보이긴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황극린은 어제처럼 그릇에 여러 종류의 음식을 듬뿍 뜨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백룡회 또한 자리를 잡고 앉아 들으라는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식사하는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게나 말일세.”
“자자, 됐네. 우리는 식사하며 3차 예선에 대한 대략적인 작전을 수립해 보세.”
“좋지.”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이들 중에서 명문가 출신이 아닌 자와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를 추리는 작업일 뿐이었다.
아직까진 황극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마 백룡회는 그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너무 예상대로 행동했기에 황극린은 짜증이 나기는커녕 저들이 귀엽게만 보일 지경이다. 전생에선 매일매일을 죽음과의 경계에서 싸워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꿉장난처럼 편을 먹고 아옹다옹하는 후기지수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백룡회와 어울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황극린이 백룡회의 시답지 않은 작전 회의를 들으며 세 그릇째를 비워 가고 있을 때.
“오오오! 황극린!”
한 여인이 반가움에 어쩔 줄을 모른 채 달려온다.
당연히 그녀는 두야랑이었다.
“드디어 만났다!”
“드디어?”
“응, 어제 너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남자들 숙소에는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너 저녁도 안 먹었지?”
“먹었다.”
“그래? 늦게 먹었나 보네?”
두야랑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백룡회의 시선이 더 진해지고 있었다.
“쟤들은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래? 아, 맞다. 나 친우 사귀었어! 네 말처럼 무공 실력이 괜찮더라!”
“친우?”
두야랑이 뒤를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든다.
“교연아, 이리로 와! 여기서 먹자!”
교연이라는 말에 백룡회뿐 아니라 다른 후기지수들의 시선도 집중됐다. 황극린이 고개를 갸웃한다. 교연이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저 멀리서 뭔가 찜찜한 표정의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다가왔다.
황극린은 그녀를 보고 누군지 떠올렸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 누구보다 강력한 근력을 소유한 무인. 권(拳)에 대해서라면 무림제일의 가문이라 불리는 진주언가의 출신. 봉(鳳)의 대회에서 유력한 우승자로 거론되는 여인이었다.
‘은봉(銀鳳) 언교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다.
황극린은 207호라 불리던 시절 그녀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팽여해가 척살대 3조 조장이었다면, 그녀는 2조 조장이었다. 먼 거리에서 팽여해와 동시에 황극린을 발견하고 달려오던 순간이 떠오른다. 물론, 황극린은 함정을 파 놓고 유유히 그들의 추적을 따돌렸었지만 말이다.
“난 남자랑 밥 안 먹는데.”
“남자가 아니라, 내 친우야.”
친우라는 말에 언교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남자와 여자는 친우가 될 수…….”
“자, 앉아.”
“아니, 야린!”
강제로 두야랑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성격이 차갑기로 유명한데, 자신의 사람에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두야랑은 친화력이 좋으니 이미 언교연과 친해진 모양이었다.
‘무리에 들어간 게 아니라 좋은 친우를 사귀었군.’
왠지 모르게 황극린은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샌가 성장한 제자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팽여해가 그러했듯 언교연도 황극린의 추격대에 속했던 무인이었지만,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황극린은 무려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를 죽였었다. 정파 무림의 입장에선 당연히 추격대를 꾸려야 했다. 흑살문 또한 당시에는 황극린을 버렸다고 해도 무방했었으니까.
“언교연입니다.”
무뚝뚝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언교연이다.
“만뇌문의 황극린입니다.”
“예,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내가 힘센 친우가 있다고 했거든. 교연이 얘도 힘이 장사야. 이렇게 자그마한데 어떻게 힘이 센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니까? 정말 대단하더라고!”
두야랑의 칭찬 세례에 언교연의 귀가 빨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큼! 그만둬.”
“왜? 극린이도 힘이 엄청 세. 어제 말했지? 하북팽가 대공자랑 손목 젖히기 싸움을 해서 이겼다고.”
“그랬었지.”
언교연이 묘한 시선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팽여해를 이겼다면 꽤 힘이 세겠군요.”
“뭐, 그렇지요.”
황극린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언교연 또한 힘에 자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맞다! 교연이 얘도 성수신의를 만난 적이 있대.”
“성수신의?”
“응.”
아, 설마.
성수신의가 무림에서 했던 체질 변화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개중엔 분명히 성공한 사례가 존재했었다. 언교연도 그중 한 명인 듯하다. 언교연이 사뭇 놀란 표정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설마 당신도?”
“아니야. 극린이는 성수신의를 만나기도 전부터 힘이 장사였어.”
“그렇단 말이지?”
언교연의 시선에 강렬한 호승심이 떠오른다.
초감각을 지닌 황극린은 보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어깨가 넓어진 것을 말이다.
‘체격이 변화하는 무공이라면… 축골공(蓄骨功) 중 하나겠군.’
아마 그녀가 저런 작은 체구에도 거력을 가지게 된 배경은 축골공에 있을 것이다. 내공도 압축되면 압축될수록 더 강렬한 힘을 발산하게 된다. 만약 근육이 압축된다면 어떨까? 지금 언교연의 근육이 그러한 상태가 아닐까, 짐작했다.
‘신기한 무공이로군.’
그녀가 비무를 하게 되면 꼭 관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교연이 추격대에 속하긴 했었지만, 과거 황극린과 직접 손속을 겨뤘던 적은 없었다.
“언제 저랑도 한번 손목 젖히기 싸움을 해 보죠? 저도 팽여해를 이겼으니까요.”
“좋소.”
처음에 황극린을 경계하던 언교연이었다.
사실 그녀는 사내뿐 아니라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가문 내에서도 이단으로 취급받은 적이 있었고, 형제자매들과도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운’이 좋아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고 형제자매들이 그녀를 질투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람을 경계한다.
앞에서는 친한 척 아부를 떨어 대도 뒤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나불대는 놈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에 관계를 맺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지도 않고,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황극린에게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야랑은 언교연이 처음으로 만난 친우였다.
그녀가 친우라고 말하는 황극린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길 빌었다. 다행히 황극린은 언교연이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느낌이었다. 아직 그의 모든 것을 알진 못했지만, 분위기가 그러했다.
황극린은 식사할 때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걸 아는 두야랑이었기에 조용히 시작했다. 언교연도 굳이 할 말도 없는데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세 사람 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언 소저.”
하지만 그들의 안락한 침묵을 깨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백룡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은 오봉 중 하나인 언교연과 대화할 기회라 생각하고 그녀를 찾아왔다. 최소한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트는 게 중요하다.
“전 무릉파의 대제자인 기등교라 합니다. 언 소저의 위명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검(劍)이 아닌 권(拳)을 다루는 무인인지라, 언 소저와 언제 한번 무(武)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교연의 대답은 몹시 짧았다.
“예.”
약간 당황한 기등교였지만, 여기서 억지로 말을 이어 가려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지금 여기에선 물러나는 게 상책이다.
“그럼 다시 뵙도록 하지요, 언 소저. 황 소협께서도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
일부러 이미 안면을 튼 황극린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무심하게 일어서더니 그릇에 요리를 채우러 떠나갔다.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기등교가 백룡회의 무리로 황급히 떠나간다.
물론,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날 무시한다고…….’
그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확고히 정해져 있었다.
진주언가 출신의 언교연을 욕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만만한 상대라고 한다면 당연히…….
‘황극린, 네놈이 여인들 치마폭에 둘러싸여 헤벌쭉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도록 하마.’
* * *
당일 저녁.
황극린의 숙소에 화산파의 무인이 찾아왔다.
“비무첩이 도착했습니다.”
“감사하오.”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는다.
자신이 비무첩을 보내면 상대가 거절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비무첩을 받은 상태라면? 비무를 수락하면 바로 비무를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극린의 예상대로 기등교가 황극린에게 비무첩을 보냈다.
혼자 보내기엔 민망했는지 성황파의 조심홍도 그에게 비무첩을 보냈다.
“비무를 수락하시려면 백화당에 방문하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 비무 상대를 정해도 됩니까?”
바로 정한다는 말에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화산파의 무인이다.
“예, 그러셔도 됩니다.”
“무릉파의 기등교, 이 사내의 비무를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참, 혹시 비무를 수락하면 성황파 조 소협의 비무첩은 사라지는 겁니까?”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무일로부터 칠 주야가 지난 후 다시 수락할 수 있습니다.”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2승 확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