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무림의 축소판
만화각(萬花閣).
2차 예선에 통과한 300여 명의 후기지수들이 머무는 숙소의 이름이다. 화음현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화각은 총 10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각마다 비무장이 존재하고 또 공동 연무장과 개인 연공실도 마련되어 있었기에 후기지수를 위한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만화각이라는 명판을 보고 두야랑이 감탄을 쏟아 낸다.
“와, 그냥 객잔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성이잖아?”
“확실히 크긴 하군.”
만화각의 입구에선 검집에 매화 수실을 장식한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황극린과 두야랑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는다.
“신분과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만뇌문의 황극린이오.”
“만뇌문의 야린!”
“몇 번 비무장에 있으셨습니까?”
“2번이오.”
“4번!”
“명패를 보여 주십시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은 일각 정도 소요됐다.
“황 소협께선 1번 전각 그리고 야 소저께서는 5번 전각입니다.”
“나랑 극린이는 사형제인데 같은 전각을 쓰면 안 돼?”
두야랑의 질문에 화산파의 무인이 인상을 찌푸린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됩니다.”
“나쁜 짓은 안 할 건데?”
“무슨… 안 됩니다.”
대체 무슨 나쁜 짓이냐고 물어보려던 화산파의 무인이 한숨을 내쉰다.
하마터면 말려들 뻔했다.
“칫, 아쉽게 됐네. 그지?”
“이제 들어가면 되오?”
“예, 들어가십시오.”
화산파 무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황극린이 들어간다.
황급히 두야랑이 따라붙는다.
“아쉽게 됐네. 같이 있으면 비무를 계속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나랑 비무할 필요도 없을 거다.”
“응?”
“저길 봐라.”
공동 연무장에선 먼저 온 후기지수들이 비무를 펼치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보인다. 후기지수들이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대체로 비슷한 또래와 사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후기지수라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진 않는다. 관계(關系)라는 것은 무림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였다. 이곳에서 맺은 인연이 언젠간 큰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후기지수들은 적극적으로 다른 참가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두야랑이라고 다른 이들과 인연을 맺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의 출신은 사흑련 중 하나인 만독문이지만 황극린은 사파나 정파나 크게 다르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정사의 경계를 넘어 친우가 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친우가 되지 않겠는가? 여기서 두야랑의 진짜 인연을 만날 수도 있었다.
“확실히 2차 예선에서 보던 무인들보단 실력이 나은 것 같긴 한데…….”
“더 있다.”
“뭐가?”
“네가 모르는 실력자가 말이다.”
“알겠어. 한번 잘 찾아볼게!”
동쪽으로 1번부터 5번 전각이 늘어서 있다. 2차 예선을 통과한 사내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이제 두야랑과 잠시 헤어질 시간이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래.”
두야랑과 헤어진 후, 황극린은 1번 전각으로 향했다.
외관보다는 실용성을 위주로 지어진 듯한 투박한 전각. 3층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층마다 열 개의 방이 있었다.
‘조용히 지내려면 3층으로 가는 게 좋겠군.’
아래층에선 이동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거슬릴 것 같았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여 감각이 예민해진 황극린이었기에 조용한 환경을 선호했다. 그나마 3층이 생활하기에 좋을 것이다.
그가 곧장 3층으로 향한다.
그런데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에 두 사내가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극린을 보고 위아래로 시선을 훑는다. 행동거지를 보면 흑도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디 문파 출신이오?”
“만뇌문.”
“만뇌문? 어디에 있는 문파요?”
“아, 들어 본 적이 있어.”
두 사내가 쑥덕거리더니 황극린에게 길을 비켜 준다.
“광견살검 대협이 만뇌문에 계시다는 소문은 들었소. 당신이 광견살검의 제자인 것이오?”
“아니오.”
“하하, 그렇군. 잘 지내 봅시다. 난 무릉파의 기등교라 하오.”
“난 성황파의 조심홍이오.”
“황극린이오.”
“당신은 왼쪽 끝방을 쓰면 될 것이오.”
딱히 어떤 방에서 묵든 상관없었기에 황극린이 그들이 말해 준 방으로 갔다.
“3층으로 올려 보내도 되려나? 만뇌문은 이제 막 생긴 신생 문파가 아닌가?”
“문파 내에 광견살검 대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할 만하지. 거기다 황극린은 팽 소협과도 꽤 친하다는 소문이 있더군.”
“설마 그 팽여해 말인가?”
“그래.”
“괜찮군. 3층에 올려 보내도 되겠어. 우리도 팽 소협과 연을 맺을 수 있으려나?”
“그럼 좋지. 흐흐.”
그들은 자신들의 대화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황극린의 초감각은 그들의 말소리를 전부 듣고 있었다.
‘참가자들끼리 암묵적인 규칙이 있나 보군.’
가령 출신 배경이나 실력이 부족하면 3층에 올려 보내지 않는다는 규칙.
다른 전각에서도 똑같이 시행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관없지.’
황극린은 방에 가서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 보았자 똑같은 흑색 무복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황극린이 짐을 풀고, 평소 하던 대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을 무렵.
“안에 계시오? 황 소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오?”
“아, 같이 3층에서 지내게 된 기등교요. 아까 인사했었지 않소? 3층에 머무는 이들끼리 같이 식사를 가려는데 같이 갑시다.”
“난 괜찮소. 따로 가겠소.”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황극린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만화각의 존재 목적은 용봉지회 참가자들의 친목을 위한 것이지만, 참가자 중에서 남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황극린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통 남들과 다른 사람은 배척을 받기도 한다.
“만화각에 들어온 첫날인데 인사도 하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오?”
“황 소협,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오.”
끼익.
황극린이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두야랑이 보았다면 그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당신들끼리 가라고 했을 텐데.”
“아니, 인사도 하지 않을 셈이오?”
“필요 없소.”
“허허, 용봉지회에 처음 참가해서 모르는 모양인데… 같은 전각 내에서 모여 식사하러 가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요.”
“필수?”
“그렇소. 3차 예선의 진행 방식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10번의 비무 동안 최대한의 승점을 확보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집단에 소속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되오.”
용봉지회 3차는 승자전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화산이 아닌 다른 문파에서 개최될 때에는 또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화산의 용봉지회 3차는 승자전 방식 아닌 승점제로 진행된다.
참가자는 총 10번의 비무를 해야 한다.
패배하더라도 바로 탈락은 아니다.
단지 승점이 깎일 뿐이다.
승리하면 승점 3점.
무승부 승점 0점.
패배 시 승점 2점이 깎인다.
원하는 상대에게 백화당(百花堂)을 통해 비무첩을 보낼 수 있다. 당연히 얕잡아 보이면 무수히 많은 비무첩을 받게 되는데, 비무첩이 3장이 넘어가도 비무를 수락하지 않으면 백화당에서 비무첩을 받을 이들 중에서 강제로 상대를 정해 준다.
그러니 후기지수들의 표적이 되면 위험해진다. 후기지수들은 다른 이들과 친목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무리를 만들어야 한다. 집단을 형성하면 함부로 비무첩을 보내기가 힘들다. 무리에서 보복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반대로 집단에 속하지 못하면 비무첩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뭐,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무를 끝낸 참가자에겐 3일간 비무첩을 보낼 수 없다는 규칙과 한 번 비무첩을 보낸 상대에겐 10일이 지나야 비무첩을 보낼 수 있다는 방침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장치는 마련해 놓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승점이 총 10점이 깎이면 최종 본선 진출자 발표가 나기 전에도 탈락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용봉지회에선 급이 맞는 이들끼리 서로 무리를 형성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기등교가 황극린을 영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거 황 소협은 아무것도 모르고 3층에 올라오셨군? 뭐, 밑에 층에 있었어도 내가 영입했을 것이니 상관없었나? 아무튼, 얼른 갑시다. 백룡회(白龍會)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소.”
벌써 백룡회라고 모임 이름까지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등교가 모르는 게 있다.
굳이 무리를 형성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만화각에서 무리를 형성하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비무첩을 보낼 수 없는 무인. 대단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 비무첩을 보내면 승점이 깎일 수도 있는 실력의 무인. 그런 이들은 사실 무리를 형성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상대가 피한다.
대표적으로 과거 용봉지회에서 우승했던 적이 있는 팽여해가 그러했다.
거기다 그의 출신 배경은 하북팽가다. 3차 예선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대 문파의 후계자와 척을 지는 행위는 삼가는 것이 좋다.
보통 팽여해나 화산파의 운평자 같은 무인들은 비무첩을 거의 받지 못한다.
칠 주야에 한 번 비무를 치러야 하는 규칙도 있었기에 비무첩을 받지 못한 이들끼리 백화당에서 상대를 정해 준다. 물론, 팽여해나 운평자가 다른 참가자에게 비무첩을 보낼 수도 있었다.
아무튼, 황극린은 굳이 무리에 속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살수 출신인 그는 혼자 행동하는 게 더 편했다. 두야랑이나 구자광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차라리 빨리 비무첩을 받아 승점을 모으는 게 괜찮겠군.’
사실 최종 32인에 선발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승점을 많이 모아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필요 승점을 빨리 모아 놓으면 남은 시간에 더 수련에 투자할 수 있으리라.
참가자들 대부분이 통과를 염원하는 3차 예선이 황극린에겐 지루한 과정에 불과했다.
“거절하겠소.”
“거절……? 지금 거절이라 했소?”
“그렇소.”
기등교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팽여해나 광견살검을 믿고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이미 백룡회 내에는 팽여해와 비등한 무인이 들어온 상태였다.
‘하지만 광견살검은 조금 무섭군.’
강호백대고수 중에서 실력이 최상위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험성은 최상위에 속한다. 한번 물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독종. 오죽하면 별호에 광견이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뭐, 알겠소. 혼자가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언제든 백룡회의 도움이 필요하면 나 기등교를 찾아오시오.”
“알겠소.”
기등교는 더 이상 황극린을 압박하지 않고 떠나갔다.
여기서 굳이 그와 적이 될 필요는 없다. 혼자가 된 황극린을 노리는 이들은 많을 테니까.
떠나가는 그들을 보고 황극린은 눈을 가늘게 뜬다.
‘용봉지회……. 어찌 보면 강호 무림의 축소판이로군.’
막상 직접 겪어 보니 확실히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무림은 잔혹하고 냉정한 곳이다. 용봉지회는 후기지수들에게 꿈과 희망만을 심어 주는 대회가 아니다. 강호라는 세상이 어떠한지 알려 주는 비무대회였다.
‘두야랑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궁금하긴 하군.’
그녀는 과연 무리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황극린처럼 행동했을까?
그녀는 친화력이 좋았다. 사실 무리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용봉지회에서 표적이 되지 않겠다는 의도보다 처음 보는 후기지수들과 어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황극린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매화각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자시(子時)까지 영업하니 늦게 가도 상관없으리라. 300명이 북적북적한 장소에서 식사하고 싶진 않았다.
‘적당히 명상하다가 가야겠군.’
* * *
매화각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자하식당이라는 명판이 붙어 있었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의 출신지는 다채롭다. 바닷가와 가까운 강소성이나 절강성 출신도 있었고, 일반적으로 음식의 향이 강한 사천성 출신도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파에선 참가자들을 위해 다양한 요리를 준비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많은 종류의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있다.
식도락(食道樂).
황극린이 최근에 찾은 취미 중 하나였다. 그가 개발한 특제 양념을 육포나 구운 고기에 발라 먹는 것도 좋았지만, 자고로 음식은 남이 해 준 게 가장 맛있다던가?
뇌불이 환장하는 그 양념도 황극린은 자주 먹지 않았다.
‘화산파에서 중원 각지의 숙수들을 거금을 들여 고용했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황극린은 자하식당 안으로 들어가 처음 보는 요리들을 그릇에 담아 자리를 잡았다.
명상하느라 식사 시간을 놓친 탓인지 상당히 허기가 졌다.
‘괜찮군.’
한 그릇. 두 그릇. 세 그릇.
황극린의 탁상에 그릇이 쌓여 가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일행이 자하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총 네 명. 한 명의 귀공자와 그를 따르는 여인이 셋이었다. 당연히 사내의 외모는 귀공자라는 단어가 어울리게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황극린은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무리 중에서 황극린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백의를 입은 사내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만뇌문의 황 소협?”
“그렇소만.”
“처음 뵙겠습니다. 전 모용세가의 모용가아라고 합니다.”
모용가아.
그 또한 유력한 용봉지회의 우승 후보 중 하나다.
하지만 황극린의 시선은 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선 유난히 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묘하군.’
황극린의 초감각은 상대가 익힌 ‘내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여인이 품은 내공의 향은 순수한 듯하면서도 혼탁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하다.
하지만 황극린은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살수는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황극린이 모용가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날 아는가 보오.”
“예, 여해와 손목 젖히기 싸움을 하는 걸 봤었거든요. 상당한 힘을 가지셨더군요.”
환한 미소를 머금은 모용가아.
팽여해처럼 저돌적인 투기가 아니라 은밀하면서 예리한 기운이 황극린을 서서히 옭아매기 시작한다. 무공을 익힌 이들끼리 흔히 일어나는 기 싸움. 상대의 수준을 간단하게 확인하는 수단 중 하나다.
“그렇군. 만나서 반가웠소. 식사 맛있게 하시오.”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모용가아의 기운을 흘려 내고 네 번째 그릇에 음식을 담으러 떠나갔다. 오랜만에 수준 높은 기 싸움으로 재미를 보려 했던 모용가아였지만, 황극린은 그것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이런 성격도 나쁘지 않지.’
왜인지 모용가아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