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2차 예선에서의 만남
2차 예선이 시작되었다.
황극린의 첫 상대는 쾌검극가의 장남이자 일점쾌검이라는 별호를 가진 극수인이었다. 아쉽게도 황극린의 첫 비무는 크게 주목을 받진 못했다. 왜냐하면 비무 상대 극수인이 비무가 시작되기 전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기권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황 소협-!”
열 개의 비무장이 모인 제2비무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청의 소유자. 무공을 수련한 후기지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사내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황극린에게 달려왔다.
“비무장에서 다시 보니 참으로 반갑소! 크하하하하!”
“나도 반갑소.”
적으로 마주할 때는 참 골치 아픈 사내였다.
거구에서 나오는 힘도 그러했지만, 목표를 끝까지 추격하겠다는 광적인 집념을 소유한 무인이다. 과거 황극린의 기억보다는 체구가 더 작았지만 그를 보고 있자면 무림맹 척살대에 쫓기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밉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과거일 뿐이었고, 팽여해는 맡은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비무는 끝내셨소?”
“그렇소.”
“당연히 이겼겠군! 상대는 누구였소?”
“쾌검극가의 극수인. 하나, 맞붙지는 못했소.”
“응? 왜 그렇소?”
“상대가 기권해서 말이오.”
“허! 그것참 아쉽겠군! 다음번에는 좋은 상대와 만나길 바라오!”
팽여해와 황극린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비무장 하나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저게 화산파의 검법인가!”
“대단하구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태양이 작열하는 느낌이 드는군! 소문이 사실이었어!”
관중의 대화를 들은 팽여해가 귀가 쫑긋한다.
“아, 맞다! 운 소협도 있었지! 황 소협, 갑시다! 운 소협은 이번 용봉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요!”
운평자.
황극린도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화산파의 대제자이자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화염신황(火炎神皇)의 무학을 이어받은 무인이었다.
‘한번 봐 둘까.’
황극린과 팽여해가 군중이 몰려 있는 비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짧게 머리를 자르고 붉은 의복을 입은 사내와 팽여해와 필적할 만큼 근육으로 뒤덮인 사내가 비무를 펼치고 있었다.
부우웅-! 부웅!
“저기 무식하게 근육이 많은 이는 서문세가의 서문청 소협이오!”
팽여해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어색했지만, 황극린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근육에도 종류가 있다. 상대가 위압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근육과 실전에서 써먹기 위해 단련한 근육. 서문청이라는 사내는 전자의 느낌이었다. 굳이 팽여해와 비교하자면 말이다.
“뭐, 그렇다고 서문 소협이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난 게지!”
팽여해의 말대로였다.
서문세가의 서문청은 우람한 근육을 밑바탕으로 거대한 도(刀)를 휘두를 때마다 파공성이 웅웅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막대한 힘이 담긴 일격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화산파의 대제자 운평자는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빈틈이 보일 때마다 검을 찔러 넣는다.
“크윽!”
서문청이 신음을 터트리며 뒤로 물러선다.
운평자의 검은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고통 가득한 표정으로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하하! 비무장 밖에서도 운 소협이 휘두르는 검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소? 저것이 바로 화산 제일의 절기라 알려진 화룡검법(火龍劍法)이오!”
팽여해의 설명을 들으며 황극린은 운평자의 검법을 감상했다.
비무를 관전하는 군중 대부분이 땀을 흘릴 정도로 열기가 강렬했다.
과거엔 화산의 검법 중 최고는 매화검(梅花劍)이었다. 하지만 현 장문인 화염신황이 등장한 후로는 화산 제일의 검법은 화룡검법으로 바뀌었다. 화룡검법은 화산의 절기인 매화검과 단천열화검(斷天熱火劍)을 조합한 무공으로 대성하면 검으로 바위마저 녹여 내는 열기를 띤다고 한다.
하지만 염공계의 무공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화룡검법을 보는데도 황극린은 큰 감흥이 없었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화산의 대제자의 수준이 낮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황극린은 만년화리의 내단을 취하여 화(火)의 기운에 내성이 생긴 상태였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감탄하는 ‘열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하아압!”
운평자의 검이 품은 열기에 더 이상 휘둘릴 수 없다고 판단한 서문청이 더욱 빠른 속도로 보법을 밟아 그에게 접근했다. 그의 도에는 푸르스름한 도기(刀氣)가 맺혀 있었다. 대부분 관중은 이번에도 운평자가 그의 검을 피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나, 아니다.
순간적으로 운평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끝을 볼 모양이군.’
열기를 차곡차곡 쌓아 뒀던 운평자의 검에서 강렬한 기운이 맺힌다. 아직 검에 화염 자체를 발현할 순 없었지만, 열기만으로 얼마나 많은 내공이 담겼는지 알 수 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지은 채 비무를 관전하던 팽여해의 입이 다물어진다.
쿠웅!
힘과 힘의 대결.
승자는 화산의 대제자 운평자였다.
광기가 이는 눈으로 비무장을 내려오는 운평자를 바라보며 팽여해가 말한다.
“대단하지 않소?”
“그렇군.”
황극린 또한 작게 감탄했다.
당연하게도 운평자의 내력은 황극린을 크게 앞선다. 거기다 내력을 제어하는 수준도 대단하다.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에 이른 무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번 비무대회엔 많은 후기지수가 참가했소. 화산의 운평자, 모용세가의 모용가아. 그리고 소림의 천덕…….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실력자들이 즐비할 테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채 팽여해가 말을 잇는다.
“황 소협, 당신처럼 말이오.”
“높게 평가해 줘서 감사하오.”
“황 소협은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날 이겼으니 당연히 높게 평가해야겠지!”
하지만 팽여해는 패자의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황극린에게 강렬한 투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비무장에서 마주하면 그는 최선을 다해 황극린에게 승리하려 할 것이다.
왜인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가 비무장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된다.
팽여해가 황극린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방금 서문청과의 비무에서 승리한 운평자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팽 소협.”
“이게 누구신가! 운 소협 아니오? 하하하하! 비무는 잘 봤소. 5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더구려!”
“과찬이십니다.”
운평자의 시선이 흘끔 황극린에게 향한다.
“아, 이분은 만뇌문의 황 소협이오!”
“만뇌문 말입니까?”
당연히 운평자도 만뇌문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신생 문파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리라. 딱히 황극린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운평자였지만, 이어진 팽여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황 소협은 나와의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이기셨소! 보기와는 달리 괴력의 소유자요! 하하하하!”
자신의 패배를 거리낌 없이 언급하는 팽여해.
그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아니 전 무림을 통틀어서도 힘으로는 당해 낼 이가 몇 없었다. 그런 팽여해에게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이겼다? 황극린이라는 사내 또한 경쟁 대상이라는 뜻이었다.
‘또 다른 경쟁자인가?’
운평자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30년 만에 펼쳐지는 화산파의 용봉지회. 여기서 화산파의 대제자가 우승하지 못하면 강호인들이 화산을 비웃으리라. 그는 이번 용봉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 4년 동안의 폐관수련까지 마쳤다.
‘하나, 내가 이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극린에게 패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경쟁자를 무시하진 않지만,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4년간의 폐관수련에서 얻은 깨달음은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화산의 제자 운평자입니다.”
“황극린이오.”
“황 소협께서도 제 비무를 관전하셨습니까?”
“그렇소.”
운평자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묻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비무의 감상이 어떠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극린은 잠시 고민한다.
사실 딱히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운평자는 내공을 다루는 수준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의 검에 깃든 열기에 감탄하고 있을 때, 황극린은 그의 내공만 바라보았다.
황극린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 내공이었기 때문이다.
“내력이 많다고 느꼈소.”
황극린의 대답에 운평자의 눈빛이 바뀐다.
‘내공에만 집착하는 자들이 있지.’
과거의 운평자가 그러했다.
내공만 많아지면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다. 하지만 영약을 취하고, 오악 중 하나인 화산에서 운기행공을 하다 보니 그의 내력은 이미 천하백대고수의 반열에 들었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은 내공이 전부가 아니다.
‘팽 소협이 과장했던 건가.’
팽여해는 단순한 성격 탓에 작은 장점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내공에 집착하는 무인이라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간다.’
물론, 운평자는 황극린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비무의 감상을 말해 준 것이었으니까.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팽 소협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검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더군. 화룡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오?”
그의 질문에 운평자가 작게 미소를 짓는다.
“그건 비무에서 보여 드리도록 하지요.”
“오호라! 그게 더 재밌겠군. 기대하겠소!”
팽여해는 긴장하기는커녕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운평자 또한 지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고 그를 마주 본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다.
“그럼 팽 소협, 운 소협, 다음에 뵙겠소.”
두 사람이 그러든 말든 황극린은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팽여해가 반색하며 말한다.
“벌써 가시려 하오?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소? 이왕 만나 김에 손목 젖히기도 다시 해 보고 말이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아마 손목 젖히기이리라.
하지만 황극린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굳이 손목 젖히기 싸움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그와는 비무장 위에서 만나고 싶었다.
“승부는 비무장 위에서 봅시다.”
황극린에 말에 팽여해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크하하하하! 그렇군! 비무장 위의 싸움이 더 재밌겠지! 비무장 위에서 봅시다. 그래도 2차 예선에서 황 소협과 만나고 싶지 않구려! 최소한 3차 예선에서 만나길 기원하겠소!”
황극린이 떠나간다.
그것을 본 운평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후기지수들 같으면 팽여해와 운평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기를 썼을 테지만, 황극린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운평자의 마음에 들었다. 실력도 없이 인연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처럼 꼴불견도 없었으니까.
‘팽 소협이 황 소협을 좋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군.’
무공을 보는 안목은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썩 괜찮은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 소협.”
“예, 말씀하십시오.”
“황 소협을 얕잡아 보면 안 될 것이오.”
“예?”
“고작해야 손목 젖히기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 팽여해가 패배했소이다.”
그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를 과대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도 문제였지만,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우승을 노린다면 황 소협은 넘어야 할 산일 것이오.”
“예, 조언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그럼 나도 이만 가 보겠소. 운 소협의 비무를 보고 있으니 몸이 달아올라서 말이오! 가문의 장로님들과 비무라도 해야겠소!”
팽여해가 다급하게 제2비무장을 떠나갔다.
운평자는 바로 떠나지 않고 비무장을 둘러보았다. 적어도 제2비무장에서 팽여해와 황극린을 제외하곤 긴장할 상대가 없었다.
‘이번 용봉지회에선 나 운평자가 우승해야 한다.’
그는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일깨우고 있었다.
* * *
황극린과 두야랑은 가볍게 2차 예선을 통과했다.
딱히 인상적인 상대는 없었다. 황극린이 비무를 하는 제2비무장에선 팽여해와 운평자를 제외하곤 고만고만한 실력자들이었다. 두야랑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용봉지회가 너무 쉽다고 불평하고 있었지만 황극린은 그녀가 고비를 만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진주언가의 언교연과 종남파의 임화경.’
두 여인은 미래에 정파 무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고수로 거듭난다.
그런 자질을 가진 무인들인 만큼, 용봉지회에서도 상당한 활약을 펼치리라. 현재의 두야랑이 두 여인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용(龍)의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지.’
칠룡 중 세 명이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했다.
강호 무림의 전통 중 하나가 칠룡에 속했던 이들이 결국 천하칠대고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천하칠대고수에 오를 재능이 있는 후기지수들이다.
패배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방심할 이유도 없었다.
“황극린! 빨리! 빨리!”
2차 예선에 통과한 이들은 전용 숙소를 배정받는다.
용봉지회는 후기지수들이 무공 실력을 겨루고 명성을 떨치기 위해 개최되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용봉지회가 처음 만들어졌던 이유는 바로 후기지수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구파일련과 천하육대세가라는 정파 무림의 거대한 틀이 만들어지기 전.
각 지역의 패자들은 서로의 힘을 과신하여 수많은 전쟁을 벌여 왔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후기지수 시절부터 후계자들끼리 안면을 트게 해야 한다는 게 소림사가 용봉지회를 개최한 첫 번째 이유였다.
물론, 현재는 구파일련이나 명문가의 자제들뿐 아니라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만큼 모두에게 친목 도모의 기회가 주어지진 않는다.
오로지 3차 예선에 통과한 300명 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다.
두야랑은 현 정파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아침 일찍부터 봇짐을 싸고 황극린을 재촉했다.
“가자.”
“응!”
두야랑과 황극린이 화산파에서 3차 예선 참가자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로 향했다.
“황 장로님…….”
숙소에는 참가자들을 제외한 외인은 들어갈 수 없다.
그렇기에 광견살검 구자광은 홀로 객잔을 지켜야 했다.
왜인지 구자광의 뒷모습이 모습이 처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