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과거의 인연
이번 화산의 용봉지회는 28회째로 개최되는 비무대회다.
3년에 한 번 개최되기에 용봉지회의 역사는 100년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용봉지회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정파의 비무대회였다. 그 전까지는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에서 비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구파일련이라는 명문거파의 연맹이 결성된 이후로는 10개의 문파가 서로 번갈아 가며 개최하며 현재의 용봉지회가 만들어졌다.
용봉지회는 정파 후기지수들에게 꿈의 대회라 할 수 있었다.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1차 예선에 통과하는 것만으로 강호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거기서 2차와 3차 예선까지 통과하여 본선까지 진출한다면?
최소한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는 100위 안에 꼽힌다는 말이 된다.
강호 무림은 줄 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명성을 떨치는 것은 대부분 강호인의 꿈이다. 강호에 악명을 떨치는 대마두를 상대하지 않고도 사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게 용봉지회다.
더군다나 용봉지회의 보상은 ‘명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봉지회는 실력 있는 후기지수가 한 장소에 모인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이 평생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 물질적인 보상도 있다. 본선에 진출한 이들에겐 보통 금자 10냥 이상의 상금이 주어지며, 우승이라도 하면 개최하는 문파의 보물을 받을 수 있다.
10개의 명문거파가 번갈아 가며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각 문파의 순서가 30년에 한 번 돌아오니만큼 경쟁하듯 우승 상품을 내건다.
27회 용봉지회에선 천화련주가 후기지수 시절 사용하던 옥황검(玉皇劍)을 내걸 정도였으니 만약 우승하면 평생을 부족함이 없이 놀고먹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돈이 부족하여 용봉지회의 우승 상품을 매물로 내놓는 경우는 없긴 했지만.
이번에 화산에서 개최되는 용봉지회의 우승 상품은 자하신단(紫霞神丹).
황극린으로선 이번 용봉지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쉽게도 용봉지회는 용(龍)과 봉(鳳)이 우승 상품을 나누어야 했기에 반절밖에 취할 순 없었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하신단은 지(地)와 화(火)의 기운을 품은 절세의 영약이다.
황극린은 자하신단을 취하여 내력을 크게 늘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화산이 있는 섬서성으로 오기 전, 남창에서 황극린은 성수신의와 여러 실험을 해 보았다. 특히 화령단을 몇 개 더 취했지만, 양기가 늘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내공은 이전보다 훨씬 많이 늘어났다.
이제껏 10년도 되지 않는 내공을 아끼면서 사용해 왔던 황극린이 15년의 공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천하백대고수에 분류되는 이들이 평균적으로 60년 이상의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많다고 할 순 없었지만… 영약의 특성을 흡수하여 체질 자체를 바꾸어 버린 황극린은 현재의 발전에 만족하고 있었다.
“화음현이다……!”
땀을 흠뻑 흘린 두야랑이 외쳤다.
황극린은 그녀와는 달리 딱히 지친 기색이 없었다.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지만 두 사람의 체력 차이는 확연했다. 그 모습을 본 두야랑이 감탄한다.
“넌 정말 지치지도 않는구나. 내단을 취해서 그런 건가?”
“그것도 있지.”
황극린의 체력이 뛰어난 것은 역시나 영물로 인한 체질 개선 덕이 가장 컸다.
물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효했다. 황극린은 매번 이동을 할 때 체력을 한계까지 소모하며 육신을 단련했다. 만뇌문에 머물 때에도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공이 부족한 황극린에게 중요한 것은 체력이었다.
“근데 저 아저씨는 백대고수 맞아?”
“맞다.”
“허어억! 허어어억!”
광견살검 구자광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헉헉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데려오지 않으려 했지만, 광견살검이 같이 가겠다고 사정했다. 용봉지회에 참가하게 되면 귀찮은 잡무를 모두 자신이 처리하겠다면서 말이다.
뭐,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황극린은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제기랄……. 두 사람 다 진짜 괴물이로군.’
객관적으로 두야랑은 구자광보다 실력이 아래였다.
하지만 체력 하나만은 두야랑이 구자광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광견살검은 이번 여정에서 자신의 체력이 얼마나 저질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저씨, 체력 좀 길러.”
“…그래.”
본래 그의 성격이었다면 두야랑과 한바탕했을 테지만, 황극린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다. 뇌불에게 제대로 정신 개조가 되어 광견에서 명견으로 거듭난 구자광이었다.
“처, 천천히 오십시오! 제가 숙소를 잡아 놓겠습니다.”
“그러시오.”
황극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구자광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간다.
“그래도 저 아저씨 네 말은 정말 잘 듣네. 나한텐 가끔 약한 살을 날리던데.”
“넌 만뇌문의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진짜 만뇌문에 들어갈까?”
“그럼 넌 광견살검 밑이다.”
“그럼 안 들어갈래.”
두야랑과 황극린이 화음현의 거리를 거닌다.
황극린은 오래만에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구경했다.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장소에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이들만 오는 게 아니다.
참가하진 않더라도 촉망받는 인재들의 비무를 관전하러 오는 무인들도 있었고, 자파의 문도들이 잘하는지 확인하고 그들을 인솔하는 기성 무림인도 있었다. 그리고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성들도 비무를 관전하기 위해 여행을 오곤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용봉지회 하나로 화음현에 모여든 것이다.
“사파인들도 많네.”
두야랑도 반짝이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두운 기운을 가진 존재들도 몇 보였다. 그녀의 탁월한 감각은 그들에게서 피 냄새를 맡았다.
“그렇겠지.”
“왜 사파에는 이런 대회가 없을까?”
한탄하듯 말하는 두야랑에게 황극린이 말한다.
“생길 수도 있을 거다.”
“응? 생길 수도 있다고?”
“그래.”
황극린은 알고 있었다.
사흑련 중 하나인 혈마교가 5년 뒤에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정파 무림은 혈마교도들과 사파 후기지수들의 무위에 깜짝 놀란다. 특히…….
‘백수천왕도 거기에 참가하지.’
언젠간 녹림의 총채주가 될 사내.
흑도 취급을 받는 녹림을 사흑련 수준으로 끌어올릴 제갈세가의 망나니 제갈창해. 그뿐 아니라 사파 무림에는 참으로 많은 인재가 있다. 황극린은 그들 모두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미래에 어느 정도로 명성을 떨치는진 알고 있었다.
“오오, 그럼 그땐 만독문의 이름으로 참가해야겠다! 재밌겠어! 너도 참가할 거지?”
“…….”
순간 황극린의 머릿속에 혈마교의 우승 상품이 떠오른다.
“네가 만뇌문의 이름을 빌려줬으니까 만독문의 이름도 빌려줄게.”
“생각해 보지.”
“그래, 그때도 같이 나가자!”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던 것과는 다르게 여유로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어, 저기 봐!”
두야랑이 아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간다.
“사람이 엄청 몰려 있다!”
웅성웅성!
마치 무언가를 구경하듯 관중이 서 있다. 쾅쾅, 소리가 날 때마다 모두가 탄성을 내지른다.
“우와!”
“지금 몇 연승이지?”
“백오십? 이백?”
“이백오십삼 승.”
“와, 벌써 그렇게 됐다고?”
“괴물이네, 괴물이야!”
둥근 원형의 탁상을 앞에 두고 거구의 사내가 상의를 탈의한 채 미소를 짓고 있다.
그의 앞에서는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두꺼운 팔근육을 자랑하는 사내가 어깨를 떨구고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황극린이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
“다음! 도전자! 없소!”
귀를 때려 대는 웅장하면서 과격한 목소리에 가까이에 있는 관중들이 귀를 막는다.
더 놀라운 것은 목소리에 내력을 담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뭘 하는 거야?”
어느샌가 두야랑이 탁상 가까이에 가서 두 눈을 반짝이며 질문한다.
“손목 젖히기 싸움이다!”
“손목 젖히기? 그게 뭔데?”
“이렇게 손을 마주 잡고 손등이 탁상에 먼저 닿는 쪽이 패배하는 거지!”
“오, 내공을 써도 되는 건가?”
“아니! 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 오로지 근력! 팔의 힘으로만 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두야랑.
그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해볼래!”
“네 손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
“안 부서져!”
“크크크! 좋다!”
그때 탁상의 옆에 서 있는 청의 사내가 말한다.
“참가비는 은자 한 냥입니다.”
“은자 한 냥?”
“예. 하지만 승리하신다면… 여기에 쌓인 은자는 모두 소저의 것이 되는 거죠.”
웅성웅성.
몇몇 관중이 두야랑을 말린다.
“하지 마시오. 저 사내 지금 이백 번도 넘게 이겼소이다.”
“맞습니다! 팔이 부러진 자도 있는데, 여인이 참가할 것은…….”
두야랑이 눈을 가늘게 뜬다.
오히려 관중들의 걱정이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다.
“할래!”
“그 누구든지! 도전은 마다하지 않는다. 와라!”
“좋아!”
두야랑과 거구의 사내가 손을 맞잡는다.
서로의 팔꿈치는 탁상에 닿아 있었다.
“손등이 먼저 닿는 쪽이 지는 거다!”
“아, 간단하네. 좋아!”
“제가 신호를 주면 힘을 주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
쿠웅!
단번에 결판이 날 줄 알았던 관중이 깜짝 놀란다.
어떤 상대든 눈 깜짝할 사이에 넘겨 버렸던 것과 다르게 여인은 버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지 관중들이 탄성을 터트리고 있다.
“우아아아! 설마 저 날렵한 소저가 이길 수도?”
“설마?”
드드드드드!
두 사람의 팔꿈치가 닿은 탁상이 크게 진동한다.
그리고…….
쿵!
“와!”
두야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내가 제대로 힘을 주자 바로 승부가 났다.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력을 끌어 올렸지만, 사내의 거력에 밀려 버렸다. 어떻게? 사내는 내공을 사용한 것 같지 않았다.
“너 진짜 세구나……! 나도 모르게 내공도 썼는데.”
“너도 세다! 처음엔 내공을 쓰지 않았지 않은가? 사내도 나에게 그리 버티지 못한다! 크하하하!”
두야랑이 반칙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승부를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녀의 장기는 힘이 아니었으니까.
두야랑이 싱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온다.
“진짜 세다. 괴물이야, 진짜. 내력을 썼는데도 힘에서 밀렸어.”
“그렇게 보이는군.”
거한 사내는 외관만 보더라도 힘이 예상된다. 단단한 바위와 같은 근육과 툭 튀어나온 핏줄을 보면 극한까지 육체를 단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도 해 봐. 힘이라면 너도 장난 아니잖아.”
찰나의 순간.
황극린의 귓가에 관중의 대화가 스쳐 간다.
“역시 하북팽가의 대공자인가?”
“힘으로는 중원제일이라더니… 사실인가 보군.”
“아니지. 중원제일은…….”
하북팽가의 대공자.
후기지수이지만 후기지수가 아닌 자.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를 칭하는 별호가 있다. 칠룡오봉(七龍五鳳). 이미 그들의 실력은 천하백대고수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저 장대한 기골의 사내는… 황극린이 실제로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거룡(巨龍) 팽여해. 이번 용봉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 그리고…….’
혈귀 척살대 3조장.
‘벌써 만나게 되는군.’
황극린은 과거 무림맹의 척살 대상으로 지정되었었다.
무림맹의 척살대와 천라지망은 아직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시의 황극린의 도주 실력도 좋았지만, 운이 상당히 따라 주어서 오랜 기간 그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아무튼, 팽여해는 황극린을 몇 번이나 잡을 뻔했던 실력자였다.
겉모습만 보면 호탕하면서도 무식해 보였지만, 본능을 따르는 추종술 하나만큼은 당시 황극린이 치를 떨게 했었다. 그의 주먹질 한 방에 부서진 왼쪽 팔도 떠오른다.
황극린은 그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젊은 시절의 팽여해를 만나는 게 조금 신기한 느낌도 든다.
“응? 진짜 하게?”
두야랑은 당연히 황극린이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는 딱히 관심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음침하게 뒤에서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다. 두야랑이 파악한 황극린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인지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이기고 와!”
팽여해의 시선이 황극린에게로 향했다.
“도전하겠소?”
“그렇소.”
탁상 옆에 선 청의 사내가 규칙을 설명했다.
황극린이 잠시 팽여해의 팔뚝을 바라본다. 모르긴 몰라도 이백 명과 넘게 힘 싸움을 했다면 꽤 체력을 소모했으리라.
“당신이 최선의 상태로 싸웠으면 하는데 말이오.”
“크크크크! 사내로군!”
이제껏 그의 사정은 생각해 주지 않고 이기려고만 하는 상대와만 맞붙었다. 개중엔 확실히 위협적인 상대도 있었다. 화음현에는 후기지수만 있는 게 아니라 기성 고수들도 있었으니까. 또 두야랑처럼 자신도 모르게 내력을 사용한 자들도 있다.
“하나, 걱정할 필요는 없소! 지금의 나는 최선이니! 나는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강해진다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다.
팽여해는 열기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다. 기대를 품은 눈빛. 과연 당신은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앉으시오.”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다.
사실 손목 젖히기를 할 때는 손을 마주하는 순간 상대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으음, 실망인데.’
사실 팽여해는 조금 전 손을 맞잡았던 여인과 황극린이 일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대했다. 겉모습은 우락부락해 보여도 힘을 쓰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겉으로는 왜소해 보이는데 대단한 힘을 가진 장사도 있다.
황극린은 후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손을 잡아 보니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데?’
팽여해가 걱정이 담긴 얼굴로 묻는다.
“괜찮겠소?”
“뭐가 말이오?”
팽여해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말로 상대의 자존심을 뭉개는 성격이 아니다. 아마 팔이 부러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면 사내의 기분이 나쁠 것이다.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즐겁게 해봅시다!”
“좋소.”
청의 사내가 시작의 신호를 알렸다.
관중은 당연히 팽여해가 이기리라 여겼다. 하지만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지?”
“지금 시작한 것 맞나?”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로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왜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오!”
청의 사내에게 질문하려는 순간.
쿠직-!
탁상이 우지끈 비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제껏 손목 젖히기를 하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단 팽여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아아아아-!”
맹수가 포효하듯 팽여해가 기합성을 내지르는 순간.
쿠웅-!
한 사람의 손목이 탁상에 닿아 굉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힘이 그리도…….”
“체질이라서.”
거력 팽여해가 패배했다.
그것도 순수한 근력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