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혈귀
찌리릿! 찌릿!
혈풍뇌전신공의 기운이 87호의 몸에 스며들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뇌전의 기운은 87호의 심장에 전해지고 있었다.
“으으으…….”
점혈을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87호는 가만히 황극린이 하는 것에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놈은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걸 알아채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흑살문에 들어올 때부터 심장에 생겨난 이물(異物).
혈고독은 심장이 뛸 때마다 기묘한 느낌을 선사했었다. 그런데 지금 황극린이 뇌전을 쏠 때마다 마치 혈고독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혈고독이 뇌전에 정신을 잃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대체 어떻게……?’
혈고독을 없앨 방법은 없었다.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특급의 살수가 되는 방법뿐이다. 암수 한 쌍을 모으는 것이 혈고독의 공포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의문의 사내가 내뿜는 뇌전은 정확히 혈고독만 노리고 있었다. 이게 가능이나 한가?
그리고 뇌전의 기운이 몸에 침범했는데 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사내는 누군가?
설마…….
‘이 사람이 바로…….’
흑살문의 문주 암혼마제인가?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예리하게 단련된 살수의 감각을 속이고 지척까지 접근하는 경신술을 보면 최소한 특급 살수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기다 암혼마제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사람은 흑살문에서도 특급 살수들뿐이다. 왜인지 겉모습은 어리게 보였지만, 외관만 보고 나이를 추측하는 것은 살수로서 실격이었다.
“설마 당신이… 암혼마제……?”
“점혈이 풀렸군.”
아마 황극린이 지속적으로 내뿜은 뇌전 때문일 것이다.
‘혈고독을 죽이려면 더욱 강한 뇌전을 빠르게 쏘아 내야 한다. 지금으로선 잠시 기절시키는 게 다인 듯하군.’
적어도 혈풍뇌전신공의 10성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 할 듯하다.
더 많은 내력을, 더 정확하고 빠르게 쏘아 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뇌전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몸이 버텨 주느냐가 또 문제였긴 하지만…….
‘언젠간 흑살문의 살수들을 빼내 올 수 있겠군.’
물론, 문제는 남아 있다.
흑살문의 살수들은 혈고독뿐 아니라 감정을 절제하는 훈련 때문에 욕심이 없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사 황극린이 혈고독을 없애 준다고 해도 살수로서 살아갈 놈들이 태반일 것이다. 흑살문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황극린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도 몇 명은 가능하다.’
황극린의 머릿속에 100번대 살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쯤 그들은 열심히 중원 어딘가에서 표적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윽…….”
기절했던 혈고독이 정신을 차리자 심장에 고통이 전해진다.
혈고독을 없애 준 것으로 착각했던 87호의 얼굴이 굳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갑자기 이곳에 암혼마제가 나타나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당신은 누구지? 어떻게 혈고독의 움직임을 멈추었던 거지?”
“실험을 해 보았다. 뇌전으로 혈고독을 없앨 수 있는지 말이다. 역시 안 되는군.”
“실험이라고……?”
87호의 얼굴에 살기가 깃든다.
까딱 잘못했다간 죽을 수도 있었다. 혈고독을 빼내려는 시도 자체가 목숨을 위협한다.
“넌 대체 누구지?”
“예전엔 207호라 불렸다.”
“207호라고?”
무슨 소리인가?
흑살문의 200번대는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이번 200번대는 너무 수준이 낮아 300번대에서 대규모로 인재를 모집하고 있다. 모집이라는 말보다 납치가 더 어울릴 테지만 말이다.
애초에 200번대가 자신을 이렇게 압박할 수 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스읏!
87호가 입안에서 바늘을 쏘아 냈다. 독이 발린 침이 빠른 속도로 쇄도한다. 점혈이 된 순간부터 혀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 정도 거리라면 피할 수 없다. 바늘에 발린 독에 조금이라도 스치면…….
‘네놈의 목을 가지고 암혼마제께 돌아가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분명히 바늘이 사내의 얼굴에 꽂혔어야 했다. 코앞의 거리에서 바늘을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황극린은 지척에서 쏘아 낸 바늘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챘다.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이었다.
“어떻게…….”
“아쉽군. 실력으로는 탐이 나는데 말이야.”
87호는 황극린의 휘하로 들일 수 없다.
그가 왜 흑살문에 들어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껏 만뇌문에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천화련에 복수하려 든다면 일이 꼬일 것이다.
그렇기에…….
쑤욱.
“쿨럭……!”
황극린의 손에는 뇌전이 아닌 핏빛 강기가 깃들어 있다.
강기가 깃든 손이 87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87호의 심장을 꺼낸 황극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혈고독은 한 번 기절한 탓인지 심장의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거기다 심장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지독한 벌레로군.’
황극린은 87호의 심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그가 모은 심장은 총 열 개.
혈고독도 열 마리나 된다. 모두 만뇌문에 가져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들도…….’
영물(靈物)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성도에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시체들이 열 구나 발견이 됐다는군! 거기다 하나같이 심장이… 먹혔다더라고!”
“허억!”
심장을 빼 먹는 요물이 나타났다!
당연히 무림인들은 요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대개 요물이라 하는 것들은 무인들, 정확히는 마공(魔功)을 익힌 이들을 뜻한다. 마공의 종류는 다양하다. 인간의 정기를 빨아먹는 놈들도 존재하고, 오늘처럼 심장만 빼 먹는 놈도 있었다.
물론 황극린은 마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정확히 심장만 뽑아낸 것 때문에 사천성에서 난리가 났다. 사천성의 패자 중 하나인 사천당문은 심장의 빼 먹는 마두의 출현에 경계병의 수를 늘렸으며, 관아의 관졸들도 성도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도의 뒷골목,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민가에선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중년 여인이 가슴이 뻥 뚫린 시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대체 누굴까?’
87호는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살수였다.
그런데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외에는 다른 상처가 없다.
‘저항하지 않았거나… 저항했지만 그걸 압도할 실력을 갖췄거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상대가 정확히 흑살문을 노렸다는 사실이다.
‘천기피독신주.’
당연히 87호의 시체에선 천기피독신주가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이의 집부터 싹 다 수색했지만… 발견할 수 없다. 심장을 가져간 놈이 천기피독신주도 훔쳐 갔다.
심장을 빼낸 것은 흑살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로 추측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혈고독인가……?’
여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천기피독신주가 없어진 것도 큰일이긴 했지만, 혈고독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면… 위험하다. 사흑련의 지존 중 하나인 암혼마제의 진노가 중원에 닿을 것이다.
여인이 황급히 소매 속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보고서를 작성한다.
- 천기피독신주 강탈.
- 정확히 흑살문의 살수들만 노려 심장을 뽑음.
- 혈고독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세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됨.
.
.
.
- 특수임무대 10개조 투입 요망.
어떤 놈의 짓인지 알 수 없겠으나.
흑살문을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를 것이다. 흑살문의 특수임무대는 몇십 년이 지나도 그를 추적할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하던 여인이 잠시 고민한다.
이름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심장을 꺼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
여인의 멈추었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 표적을 혈귀(血鬼)라 명명하겠음.
사천성의 성도에서도 심장에 미친 귀신이 나타났다고 난리가 났다.
여인의 머릿속엔 혈귀라는 단어가 명확히 떠올랐다.
‘혈귀, 언젠간 나와 마주할 수 있을 거다.’
여인은 87호의 시신을 바라본다.
장래가 촉망받는 살수였다. 이번 하오문의 문주 암살 시도가 끝나면 특급 살수로 진급하여 암혼마제의 가르침을 받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섰을 것이다. 전력의 손실은 언제나 아쉽다. 특히 200번대가 실패한 지금은 더더욱.
여인은 기름을 뿌린 후, 불씨를 던졌다.
순식간에 화마(火魔)가 민가를 집어삼켰다.
* * *
황극린.
그는 죽립을 푹 눌러쓴 채 성도 이곳저곳에 피어난 화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나 흑살문은 하루 만에 시체들을 모두 회수하여 소각했다. 흑살문의 무서운 점은, 실력 있는 살수들의 존재도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무인들의 숫자도 상당하다는 점이다. 과거 비동을 나선 황극린은 특수임무대의 존재 때문에 함부로 흑살문의 은거지를 탐하지 못했었다.
뭐, 지금은 초감각의 존재 덕분에 망설이지 않고 87호를 죽이긴 했지만 말이다.
‘성도부터 조사를 시작할 테지.’
황극린은 당연히 성도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먼저 만뇌문에 돌아갔다가 성수신의와 만난 다음 두야랑이 있는 운남성으로 향할 것이다.
‘잘 찾아봐라.’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만뇌문으로 향했다.
* * *
“이게 혈고독입니까……?”
만뇌문에 합류한 성수신의.
그는 황극린이 가져온 인간의 심장을 보면서도 혈고독을 보고 놀라워했다. 사실 인간의 체질을 바꾸려 했던 성수신의였다 보니 인간의 장기를 본 적은 무척이나 많았다.
꼬물꼬물.
죽은 심장이다 보니 피를 생성하지 않는다. 심장의 크기는 꽤 쪼그라들어 있었다. 심장을 기어가는 혈고독은 장난으로라도 ‘귀엽게’ 생기진 않았지만…….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로군요!”
“…….”
황극린은 성수신의의 생각에 동감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들을 연구할 수 있겠소?”
“만뇌문의 문도들에게 이걸 사용할 생각이신…….”
“아니오.”
황극린은 흑살문과 똑같이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수하를 들이더라도 사람답게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맺고 싶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흑살문을 처단한다면서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혈고독을 없애고 싶소. 그리고… 이놈들에게도 아주 작은 ‘내단’이 존재하는 것 같소.”
황극린의 말에 성수신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평범한 벌레는 아니로군요.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흑살문 살수들의 심장이오.”
“흐, 흑살문 말입니까?”
중원인들에게 흑살문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건 새어 나가지 말아야 하오.”
“나에게도 말이더냐.”
뇌불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가왔다.
“허허, 요놈들 꼬물꼬물 기어가는 게 참 귀엽구나! 기름에 살짝 튀겨서 술안주로 하면 딱 좋겠군.”
요즘 만뇌문의 약방이 장사가 꽤 되다 보니 뇌불은 다시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과거와 같이 망나니처럼 마시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들은 성수신의가 징그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귀엽긴 한데 안주로는 좀…….”
탁탁!
뇌불이 성수신의를 토닥여(?) 준다.
“컥! 컥! 아, 아픕니다……!”
“아무튼, 잘 키워 봐라.”
뇌불이 시선을 돌려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걸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냐?”
“흑살문은 혈고독을 이용하여 살수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소. 이것들을 없앨 방법을 알아보려 하오. 그렇다면 희생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테니까.”
“흑살문의 살수들을 휘하로 데려오면 편하긴 하겠군.”
물론, 뇌불도 알고 있었다.
설사 혈고독을 없앨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회유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인간이 아닌 살수(殺手)였다.
“당신이 성수신의를 도와줬으면 좋겠소. 혈풍뇌전신공의 뇌전으로… 혈고독을 기절은 시킬 수 있더군. 혈고독을 없앨 방법을 같이 찾아 주시오.”
“그래, 알겠다. 네가 하라면 해야지, 뭐 어쩔 수 있겠느냐?”
그러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성수신의가 깜짝 놀란다.
뇌불의 성정이 과거보다 유순해졌다는 건 만뇌문에 와서 확실히 느꼈다. 과거의 뇌물이었다면 한 문파의 문주직을 맡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기행이었으니까.
하지만 황극린의 말에 군말 없이 수긍하는 것을 보면…….
‘저 노인이 정녕 죽을 때가 됐나?’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참, 그리고 만독문주 놈을 만나러 간다면서?”
“만독문주가 아니라 그의 딸을 만나러 가는 것이오.”
“설마 그 아이와 연인이 된 건 아니지?”
왠지 모르게 걱정하는 듯한 뇌불의 얼굴.
“아니오.”
황극린이 가볍게 부정하자 뇌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뭐가 말이오?”
“언젠가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
“소개?”
“그래,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중에 말해 주겠다.”
뭐, 황극린에게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소개를 받을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듣자 하니 만독문주의 여식이 만년화리를 훔쳐 오겠다고 했다면서?”
“그렇소.”
뇌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혹여나 고놈에게 걸린다면 내 이름을 말해라. 고놈이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