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69화 (69/316)

69화 87호

흑살문은 중원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대 규모의 살수 문파다.

인원이 여타의 살수 문파보다 많다 보니 문도들의 관리도 철저한 편으로 그들이 절대 배신하지 못하게 혈고독을 사용한다. 혈고독은 암수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 하나가 죽는다.

혈고독이 죽게 되면 막대한 양의 독기를 방출한다. 심장은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심장에 독이 퍼지면 어떤 해독제도 통하지 않는다. 강제로 떼어 내려 해도 혈고독은 독을 뿜어내기에… 그것을 떼어 내거나 치료하지 못하는 불치병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공포로 문도들을 지배했지만 혈고독의 공포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급 살수가 되면 흑살문에서는 자유를 선사한다.

혈고독을 없앨 수 없다고 하지 않았냐고?

굳이 없애지 않아도 된다. 혈고독의 공포에서 벗어날 방법은 나머지 하나의 혈고독을 삼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를 또 심장으로 보내면 한 쌍이 된 혈고독은 서로에게 달라붙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게 된다. 단지 심장에서 피를 조금씩 빨아 먹으며 살아갈 뿐이다.

흑살문의 모든 살수는 혈고독을 한 쌍으로 만들기 위해서 살아간다.

특급 살수가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흑살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원하는 의뢰만 맡을 수도 있고 다른 살수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이제껏 명령만 받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07호로 불렸던 황극린은 특급 살수가 되지 못했다. 분명히 특급 살수가 될 자질과 업적을 쌓았지만, 마지막 임무에서 단전을 잃었기에 무인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 황극린이 오르지 못한 특급 살수에 도달한 최상급의 살수가 있다.

87호.

소위 ‘그림자’라 불렸던 그는 3년 뒤에 특급 살수에 오른다. 80번대의 특급 살수. 황극린은 그를 딱 세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황극린과는 등급의 격차가 심했기에 제대로 대화를 해 보진 못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흑살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급 살수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87호는 막대한 업적을 쌓고 특급 살수가 되었다. 황극린이 살아남는 방법은 그의 방식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살행에 나서고, 어떤 무공을 주로 사용하는지 연구했다.

흑살문은 살수들에 대한 자료를 문서로 보관하고, 세 명의 특급 살수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살수들의 성장은 곧 흑살문의 세가 강해지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림자가 진행하고 있는 표적은 1등급.’

보통 의뢰를 받은 후 표적을 조사하고 살행까지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반년에서 일 년이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1등급 표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최소 2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지금쯤 그림자는 그곳에 잠입하여 표적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리라.

‘그놈 혼자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겠지.’

사실이 그렇다.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죽이기 매우 수월해진다. 황극린은 그의 얼굴도 알고 있었으며, 현재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 거기다 현재의 그림자는 과거 황극린이 최상급 살수로 활동할 때보다 경험이 부족하다.

문제는 그림자 주위에는 다른 최상급의 살수도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천기피독신주는 흑살문의 보물 중 하나였다. 만약 살행에 실패하여 그 물건을 잃게 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기에 그의 주위에는 흑살문의 살수들이 포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극린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흑살문의 전력을 크게 약화할 수 있는 기회.’

혈귀라 불렸던 살수가 그림자를 노리고 있었다.

* * *

87호.

그는 흔치 않은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백호신가(白虎神家).

과거 사천성에서 이름을 떨쳤던 무가였다. 그는 명문정파의 자제였지만 흑살문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강호 무림에서는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사건 속에서는 은원이 끝없이 피어난다.

은혜는 안 갚아도 원한은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있다.

백호신가의 장남은 가문을 멸문한 천화련에 복수하기 위해 흑살문에 들어갔다.

물론, 흑살문의 특급 살수가 되더라도 천화련에게 원수를 갚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는 끝없이 노력했다. 업적을 쌓기 위해 작은 의뢰라도 철저히 수행해 왔다. 목격자가 생기면 그것이 갓난아이라도 죽여 왔다. 높은 등급의 점수를 받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살행을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특급 살수가 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표적을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특급의 살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는 살수였다.

‘이번 표적만 없애면 확실히 특급 살수가 될 수 있어.’

현재 특급 살수는 두 명.

무공의 실력을 보면 87호는 아직 특급 살수에 부족하지만…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조만간 특급 살수의 인원을 채울 것이다. 거기다 이번 임무는 다른 문파에게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사실 흑살문주가 내준 과제와 비슷했다.

물론 의뢰인 불명으로 임무가 하달되긴 했지만, 87호는 이제까지 임무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임무를 가는데 흑살문의 보물인 천기피독신주를 내어 준 것도 그렇고, 흑살문의 살수들이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완벽해야 한다.

그렇기에 87호는 소자명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표적이 있는 세력에 잠입해 있었다.

“새해가 밝은 만큼 손님이 많을 거니까 각오하도록 해라!”

“예, 총관님!”

점소이의 복장을 한 이들이 중년 사내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다.

사천성의 성도(成都)에 위치한 헌원객잔.

중원에서도 요리가 맛있기로 유명한 객잔이었다. 87호의 목표는 이곳의 객잔주였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단순히 객잔주를 죽이는 임무였다면 87호가 지난 1년 동안 이곳에서 점소이로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여기서 한 번도 놈을 보지 못했다.’

객잔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무영천왕(無影天王).

흑도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무영천왕은 흑사회와 함께 흑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하오문의 문주였으니까.

흑도 출신들은 무공이 약하다는 편견을 깨고 그는 초절정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거기다 어찌나 조심성이 많은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신으로만 임무를 전달한다.

그냥 그가 있는 침소에 몰래 잠입해서 죽이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헌원객잔의 지하에는 흑살문 본성과 비슷한 수준의 기관진식이 도배가 되어 있었다. 흑살문주이자 사대마제 중 하나인 암혼마제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번 임무는 무공을 익힌 것을 들키지 않고 하오문에 녹아들어 하오문주를 마주해야 하는 임무였다. 당연히 1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임무였다. 그리고 몹시 어려운 임무였다.

무공을 익힌 것을 들키지 않는 것.

살수에겐 기본적인 덕목 중 하나라 말하지만 사실 무림에서 그것을 숨기기란 쉽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무공을 익히면 분위기나 기세가 달라진다. 이번 임무는 얼마나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87호가 아닌 소자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흑살문의 살수는 점소이의 일을 충실히 하며 언젠가 다가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열심히 객잔을 청소하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총관이 소자명에게 다가온다.

“어이, 소자명이.”

움찔.

총관의 목소리에 소자명이 잔뜩 긴장한다. 총관은 엄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앞에만 서면 대부분의 점소이들이 긴장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예, 예엡?”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젖은 천으로 탁상을 쉴 새 없이 닦고 있다.

“네가 들어온 지도 1년이 됐군.”

“하하, 벌써 그렇게 됐군요…….”

“오늘 객잔 문을 닫고 집에 가지 말고 기다려라. 할 말이 있다.”

“……?”

심장이 터져 버릴 듯 뛴다.

하나, 87호는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드디어 기회가 오는 것인가? 과연 총관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객잔주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인가?

헌원객잔의 상층부는 평범한 객잔과 같다.

상층부에서 일하는 점소이들은 이곳이 아마 하오문의 본거지라는 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예,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한 소자명.

총관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리곤 떠나갔다.

‘오늘인가.’

하오문의 영입 방식은 간단하다.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괜찮다 싶으면 제안을 한다. 하오문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이곳은 하오문의 본거지인 헌원객잔이다. 여기서 하오문에 입문하게 되면 하오문주와 만날 가능성도 매우 커진다.

이제 오늘 하루만 넘기면 된다.

그렇게 되면…….

“손님 오셨다.”

“예이!”

연기가 아닌 진짜 미소를 머금으며 소자명이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그리고 입구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사내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좋군.’

발걸음이 가볍다.

87호는 오늘 예상대로 총관에서 하오문 영입 제안을 받았다.

아쉽게도 하오문주가 직접 나타나진 않았지만, 하오문의 문도가 되면 언젠간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착실하게 준비하여 기회를 잡아채야 한다. 살수에게 기회란 찰나다. 그것을 잡는 것이 바로 능력이었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고 있던 87호.

그가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군.’

피부에 와닿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87호는 최상급 살수로 온갖 상황에서 임무를 수행해 왔다. 숱한 감시의 시선은 익숙하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감시하던 시선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사라진 시선은 흑살문 살수들의 시선이었다. 은밀하고 기분 나쁜 시선이었지만, 천기피독신주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응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히려 시선이 없어졌다는 게 더욱 기분이 나쁘다.

‘무언가 잘못됐다.’

판단은 신속했으며 행동은 빨랐다.

시선이 없어졌다고 느낀 순간 87호는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경공을 펼친다. 일단 묘한 분위기를 휘감는 장소에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쉬이이이!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암기. 바닥에 꽂힌 그것을 살펴보던 87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흔히 볼 수 있는 암기였지만, 흑살문의 출신인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를 노린 것은…….

“왜지?”

암기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왜 흑살문에서 날 노리는 거지?”

그리고 한 사내가 나타난다.

그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툭… 툭…….

손끝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왜인지 눈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인 것 같았다.

“감이 좋군.”

“임무는 이제 궤도에 진입했다.”

“알고 있다. 2년 뒤엔 하오문주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

“2년… 이라고?”

이상하게 처음 보는 사내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사내를 처음 보는 것이 맞나?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오늘 객잔에 처음으로 왔던 손님이다.’

대체 뭘까?

아무리 살행의 경험이 많은 87호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살수가 살수를 노리는 상황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흑살문에서 그를 처리하려 했다면 혈고독만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흑살문의 살수가 아니다. 하오문이 내 정체를 눈치챘는가?’

살수는 순간적인 판단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87호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바늘을 던진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바늘 수십 개가 빠른 속도로 쇄도한다. 그 끝에는 한 방울로 소를 죽여 버리는 치명적인 맹독이 발려 있었다.

그리고 순간…….

사내의 몸이 흐릿해졌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이형환위(移形換位)!’

최상승의 경신법으로 움직임에 잔상이 남는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설마 특급 수준의 살수란 말인가?’

87호는 무공 실력이 아직 흑살문의 특급 살수인 암귀(暗鬼)나 색귀(色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 이 난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설마 이것은 흑살문주가 내린 또 다른 시험일지도 모른다. 특급 살수가 되려면 이러한 난관도 통과해야 하는 건가? 정면 대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 건가?

‘아니, 정면 대결은 하지 않는다.’

살수가 정면 대결을 하는 것만큼 미련한 선택은 없었다.

그는 도주를 선택한다.

타다다닷!

가지고 있는 내력을 전부 소모할 각오를 하고 적과 거리를 벌린다. 거리를 벌리면 지형지물 속에 은신하여 숨을 수도 있으리라.

일각을 달려가자 상대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87호는 미리 마련해 둔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는 그림자라는 이름처럼 그는 은신에 능한 살수였다. 호흡마저 멈추고 어둠이 되었다. 주변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당장 죽이지 않으마.”

“……!”

뭐지? 대체 언제 따라왔다는 말인가?

분명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경공술을 펼치는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87호는 어쩌면 흑살문주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 살수가 아닌가 생각했다. 정면 대결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손이 튀어나와 87호의 멱살을 잡아챘다.

“확인해 볼 것이 있거든.”

황극린의 손이 뇌전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향하는 곳은…….

87호의 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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