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성수신의
황극린은 영웅건을 두른 사람을 과거에 딱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정파 무림에 나타나서 명성을 떨치고, 심지어는 용봉지회에서 우승까지 했었다. 듣기로는 무림맹의 전투단까지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파인이 아니었다.
사파 출신이었다.
그런저런 사파의 출신이 아닌 사흑련 중 하나인 만독문(萬毒門)의 출신이었다. 거기다가 만독문 문주인 독수마제(毒手魔佛)의 직계로 사파에서는 왕족과 같은 혈통이라 할 수 있었다. 훗날 미래에 사내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무림에서 큰 충격이 일었다고 들었다.
강호에선 협객이 할 법한 기행을 벌이면서 수많은 무인의 존경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사파 출신였다? 거기다 악독하기로 유명한 만독문 출신이라면 배신감은 더 클 것이다.
‘이때부터 정파 무림에 섞여 있었군.’
그가 무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6회 용봉지회부터였다.
조만간 곧 예선이 개최되는 용봉지회가 25회였으니… 적어도 3년 뒤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한다. 그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황극린의 시선이 지팡이를 든 중년인에게로 향한다.
뇌불에게 들었던 성수신의의 인상착의가 떠오른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는 뇌불의 말처럼 확실히 나이가 들었음에도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선이 뚜렷하다기보단 여인처럼 얇은 선이었지만 수염을 길러 중후함을 더했다.
거기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
또, 황극린의 코를 자극하는 약재의 냄새. 사내의 의복에는 약초와 약재 냄새가 배어 있었다.
“으응? 왜 말이 없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저 사내를 추압! 하고 파앗! 해서 죽였을 거잖아? 응?”
“…….”
황극린은 형산파의 제자인 곽시우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가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걸었고, 결국 검을 뽑긴 했지만… 형산파와 굳이 생사결까지 낼 필요는 없었다. 물론, 상황이 꼬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를 당장 죽이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독문 출신의 사내.
아니, 사내가 아니라 정확히는 남장을 하고 있는 만독문주의 둘째 딸 두야랑은 황극린이 곽시우를 죽였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두야랑은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정파에서 활발히 활동할 적만 하더라도 자신이 표범의 감각을 타고 낫다며 자랑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살수의 살기를 감지하며 미리 찾아낸 적도 있었다. 황극린의 초감각과 비교하면 얼마나 대단할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두야랑의 감각은 뛰어나다.
물론, 아직 그 감각이 완전히 성숙해진 단계는 아니었다.
“뭐야!”
두야랑이 갑자기 황극린과 거리를 벌린다.
양손에는 젓가락처럼 생긴 철제 암기가 들려 있었으며,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내 기묘한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황극린은 두야랑의 감각이 어느 수준인지 시험해 보고자 그녀를 노려보았다.
살의가 아닌 적의를 담아서 말이다. 그런데 두야랑은 귀신같이 황극린의 변화를 알아챘다.
‘신기한 능력이로군.’
황극린의 입장에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민하고 예민한 두야랑의 감각은 방해만 될 뿐이다. 감각이 왜 중요한가?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당장의 두야랑은 예민해진 고양이가 별것 아닌 것에 발작하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저것을 더 발전시킬 수도 있겠지만…….
“미치광이! 왜 또! 그것 좀 집어넣으라고! 형산파의 권역에서 살인이라도 할 셈이냐?”
“내가 먼저 살을 던진 게 아니야! 저 사내가 나한테 먼저… 응? 갑자기 또 살이 사라졌네? 뭐지?”
두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중년인이 두여랑을 데리고 객잔에서 벗어난다.
“자자, 이번 싸움은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럼 이만…….”
“어디 가!”
“그걸 해야 할 게 아니냐?”
“그거?”
“그래!”
중년인의 말에 두야랑이 싱긋 미소짓는다.
“그래, 알겠어! 너 나중에 또 보자. 재밌었어! 근데 그땐 나한테 살을 날리지는 마!”
후다닥.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두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 황극린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선에 형산파의 곽시우와 하후세가의 하후령의 모습이 보인다.
곽시우는 관자놀이에 젓가락을 맞아 쉬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며, 하후령은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황극린을 마주하고 있었다.
“난 이 객잔에 묵을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와라.”
“다, 당신은 정말 누구죠?”
“황극린이다.”
“황 소협, 왜 곽 공자님을 공격하신…….”
“무인이니까.”
“네?”
이제는 살수가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하후령은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곽시우와 완전히 상황을 매듭짓지 못했지만, 지금 급한 것은 두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수신의로 추정되는 중년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그 때문이었으니까.
황극린은 객잔에서 떠나가고, 하후령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산파의 제자 곽시우를 챙기느라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대체 어쩌자고 나선 거냐?”
“응? 당신이 먼저 말했잖아, 누구도 당신의 눈앞에서는 죽으면 안 된다고.”
“아니, 딱 봐도 사생결단을 낼 상황은 아니었지 않느냐. 무림에서 크고 작은 싸움은 매번 벌어진다. 내가 모든 싸움에 끼어서 싸움을 말리라고 했느냐?”
두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닌데. 분명히 황극린이라는 사내는 곽가 놈을 죽이려 했다고.”
“그건 네 착각이고. 아무래도 약효가 너무 과했던 모양이다.”
“과하긴! 내 감각은 정확하다고.”
“그래, 그래. 알겠다. 얼른 산으로 돌아가서 하던 연구나 마저 끝내도록 하자.”
“으음, 좋아.”
두 사람이 형동현 근처의 작은 야산으로 향했다.
그곳의 중턱에는 허름한 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두 사람의 안식처였다.
“오늘은 뭘 먹는 거야? 독? 약?”
잔뜩 기대한 두야랑.
지팡이를 든 중년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무림에서 여러 인연을 만나 보았지만, 이놈처럼 별종은 처음 보았다. 물론 두야랑 덕분에 연구의 진척이 있었으니 그로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보름 전에 먹었던 게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 체질을 또 한 번 바꿔야겠어.”
“응? 나는 지금 감각에 만족하고 있단 말이야.”
“아직 정확성이 떨어진다. 네 감각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특정 기파만 읽을 수… 어이, 왜 또?”
두야랑이 상체를 낮추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끔 미친 짓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중년인은 심장이 덜컹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집 안에 쥐라도 숨어든 걸까?
“쥐는 굳이 안 잡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쥐가 아니야.”
“그럼 뭐 벌레라도 들어왔나 보군.”
“나와.”
스으윽.
“나오긴 뭘 나와. 쥐가 사람인 줄 아느냐? 나오라면 나오는 줄… 허어업!”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진다.
대체 이놈은 어디서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마치 어둠에 동화되어 있다가 빠져나온 듯이 나타났다. 그림자에라도 숨어 있었던 건가?
“다, 당신은!”
분명히 낮의 객잔에서 보았던 사내였다.
두야랑은 좋아해야 할지, 긴장해야 할지 헷갈린다는 표정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긴장을 놓치진 않았다. 황극린이 버거운 상대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무슨 실험을 하고 있지?”
황극린이 방 내부를 장식한 동물들의 내장과 벽에 걸린 약초들을 보며 물었다. 다행히 내장의 썩은 냄새는 나지 않았고, 약초의 청아함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귀하는 대체 누구십니까?”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황극린에게 묻는다.
“황극린.”
“난 두야랑이야.”
황극린이 자기소개를 하자 두야랑도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야, 야! 네 이름은 두야랑이 아니라 거연창… 에휴, 됐다.”
이제 포기한 중년인이 황극린을 바라본다.
“왜 저희를 미행한 것입니까?”
“알고 싶은 게 있어서.”
황극린은 찬찬히 방을 둘러본다.
처음에 긴장했던 두야랑의 표정이 풀어진다. 황극린에게선 적의나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두야랑도 공격하지 않는다.
“뭘 알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당신, 성수신의인가?”
“…….”
중년인은 놀라지 않았다.
단지…….
“아직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군요. 혹시 반로환동 한 고수십니까?”
“오오, 반로환동? 우리 아빠도 반로환동을 못 해서 주름이 자글자글 한데.”
“넌 좀 닥치고 있어.”
“싫어.”
“후우우우…….”
성수신의.
뇌불에게 들었을 때, 그는 인간의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원 곳곳에는 내력을 품고 있는 영초가 널려 있다. 그것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겨난 신비(神祕)이자 경이(驚異)였다.
그리고 성수신의는 영초의 존재를 들며, 사람 또한 신비한 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새로운 체질로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추위가 살갗을 찢어 놓을 것 같은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빙공을 잘 다루는 것처럼 체질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후천적인 노력으로 따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하게도.
성수신의는 실패했다. 그의 주장에 홀딱 넘어간 무림인들이 그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지만, 부작용이 극심했다. 심지어 단전을 잃은 사람까지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성수신의는 분명히 의술로는 중원 전체로만 따져도 세 손가락에 꼽힐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그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중원 곳곳에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성수신의가 두야랑이 형동현에서 사고 치기 전에 급히 빠져나온 것은 과거의 인연들과 마주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형산파에도 몇몇 인연이 있는 무인들이 있었다. 20년도 전에 연을 맺었으니 지금은 거의 장로급이 되었으리라.
“반로환동은 아니오.”
“반로환동‘은’ 아니라고요?”
황극린은 굳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이걸 믿을 사람이 어딨겠는가? 황극린도 당최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에이, 아쉽다. 반로환동의 고수면 비결을 배우려고 했는데.”
“그게 비결로 되겠냐!”
중간중간 헛소리를 내뱉는 두야랑을 노려보며 성수신의가 묻는다.
“그럼 우리를 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
“아마 제가 체질을 바꿔 준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렇소.”
성수신의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실패했습니다. 체질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5년 전에 확실히 깨달았지요.”
“뭐야? 난 바꿀 수 있다며?”
“너는… 특별하니까.”
성수신의가 말을 이어 나간다.
“아무튼, 뭘 기대하고 날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귀하께 뭘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전 이제 아무에게나 체질 변화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몸이 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문득, 황극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지나간다.
설마 아니겠지?
순간 뇌불이 주화입마에 걸려 비동에 갇혀 있었던 게 성수신의의 탓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성수신의를 만뇌문에 들이자고 하진 않았으리라.
“아무튼, 제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체질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절 찾아오신 것이라면 단념하시는 게 좋습니다.”
“난 할 수 있다며?”
자꾸만 중간에 끼어드는 두야랑.
그녀를 바라보며 성수신의가 한숨을 내쉰다.
“이 아이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겁니다. 체질을 바꾸는 것은… 하늘이 내려 준 운명을 거스르는 일. 그런 존재들만이 체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황극린은 성수신의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특히 운명을 거스른다는 말이 와닿았다. 황극린은 한 번 운명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영약과 내단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저는 귀하에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습니다.”
성수신의는 황극린의 예상과는 달랐다.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여 자신을 만나면 실험을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이들은 타인의 생명은 무시하고 자신의 목적만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허나, 성수신의는 황극린에게 체질을 바꾸고 싶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면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황극린의 마음에 들었다.
‘나쁘지 않군.’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아마 당신이 찾던 사람일 것이오.”
“예?”
“응?”
두야랑과 성수신의가 의아하다는 듯이 황극린을 바라본다.
“독이로군.”
두야랑이 가지고 놀던 암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끝에는 상당한 수준의 독이 발려 있었는데,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뭘 하려는 겁니까!”
“그거 아픈데.”
쑤욱.
독이 발린 암기로 황극린이 자신의 손가락을 찔렀다.
그리고…….
“얼른 해독을… 응? 왜 반응이 나타나지 않지? 아프지 않습니까?”
“오오?”
황극린은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