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63화 (63/316)

63화 우연과 인연

황극린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호남의 형동(衡東)현.

여기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성수신의가 발견됐다는 형산에 도착할 수 있다. 황극린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다. 오랜만에 체력을 거의 소진했다. 다리가 쿡쿡 쑤시는 기분이 참 묘했다.

‘철 발찌를 차고 달릴까도 생각했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군.’

그래도 이번의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황극린은 전생에서 무림맹 척살대에 쫓긴 경험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가? 턱밑까지 숨이 차올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죽었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 체력을 늘려야 한다. 또한, 강인한 정신력만큼 몸이 따라갈 수 있도록 한 번씩 한계까지 육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다음번에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육신이 적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일단 정보를 모으기 전에…….’

성수신의는 형산과 형동현 그리고 남악현에서 최근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형동현에서 바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휴식을 취해야겠군.’

황극린은 객잔으로 향했다.

중원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운기행공을 통해 소모한 내공을 채운 다음 다리 근육을 풀어 주어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숙박을 하시겠습니까?”

“둘 다 하겠소. 일단 식사부터 준비해 주시오.”

“방은 최하급 방부터 특실까지 있사온데…….”

“특실로 주시오.”

특실이라는 말에 점소이의 표정이 더욱 공손하게 바뀐다.

“예이! 목욕도 하실 것이지요?”

“그렇소.”

“뜨거운 물을 바로 올려놓겠습니다. 잠시만 1층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황극린이 객잔 구석에서 앉아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한쪽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황극린의 초감각은 그것을 감지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얼른 땀을 씻어 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황극린이 머리를 다시 넘기는 순간이었다.

“…거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지 않소?”

불쾌함과 못마땅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떡하니 보여 주는 사내의 얼굴이다. 태양혈이 우뚝 솟은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로 판단할 수 있다.

“……?”

황극린과 사내의 ‘눈’이 마주친다.

“……!”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이 황극린을 바라보던 사내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기 있지 말고 당장 방으로 올라가시오-!”

황극린은 참으로 오랜만에 황당한 감정을 느꼈다.

객잔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성수신의를 만나러 왔기에 딱히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체했다. 그런데 여기 있지 말고 올라가라니?

황극린이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진다.

“흡!”

사내와 동석했던 여인이 숨이 멎은 듯이 황극린을 바라본다.

지금 황극린은…….

‘아, 머리를 까고 있었군.’

황극린이 대충 머리를 내리자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이 터져 나왔고, 황극린을 노려보는 사내의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

“이이……!”

* * *

형산파의 18대 제자 곽시우는 하후세가의 장녀인 하후령과 참으로 오랜만에 해후했다.

2년 전에 개최되었던 용봉지회의 예선에서 만나 서로를 응원하고, 무공에 대해 조언도 해 주며 친목을 쌓았었다.

곽시우는 미모도 겸비하고 무공의 실력도 뛰어난 하후령을 내심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용봉지회에서 탈락하고 형산파로 돌아가야 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와 헤어졌었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

곽시우와 하후령은 2년 뒤, 형동현의 객잔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곽시우는 하후령에게 합석을 청했으며 그녀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용봉지회의 추억은 대화를 꽃피우기에 적절한 주제였다.

두 사람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곽시우는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공심법을 처음 익힐 때보다 더 긴장하며 머리를 굴려 댔다. 조금이라도 지루할 틈이 있으면, 사형제들을 웃겨 주었던 농으로 하후령의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여인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호칭을 재정립했다.

곽시우는 하후령을 령이라 부르기로 했으며, 하후령은 그를 오라버니라 칭하기로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이대로 더 흐르고 밤에 분위기 좋은 주루에서 술까지 곁들인다면…….

‘연인 사이가 되는 것도 문제는 아니지! 암!’

하지만 세상 일은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믿을 수 없이 잘생긴 사내가 촉촉해진 상태로 객잔에 들어서는 경우가 말이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잘생겼다고 생각되는 사내.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거기다 오뚝한 콧날에 선홍빛의 입술은…….

여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상반된 분위기가 조화되어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곽시우는 잠시 사내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마주 앉은 하후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곽시우가 시선을 빼앗겼다면?

당연히 하후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곽시우가 처음 보는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시우에겐 한 번도 던져 주지 않은 시선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눈빛은 이성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곽시우는 조급해졌다.

하후령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녀는 처음 보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야?’

짜증이 치솟는다.

이제까지 했던 노력은 뭐란 말인가? 자신을 보던 것과 처음 보는 사내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빨리 올라가라.’

객잔의 방으로 바로 올라간다면 다시금 하후령도 자신에게 시선을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내는 방에 올라가지 않고 구석의 자리에 앉는다. 하후령이 계속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짜증이 난다.

살의가 치솟는다.

무공을 익히며 배웠던 부동심이 깨져 버린다. 아무리 무공을 익혀도 본능을 억제할 방법은 없었다. 저 소림의 고승들도 속세의 번뇌를 끊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노력하지만, 대다수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지 않는가?

곽시우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거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지 않소?”

“……?”

사내의 눈동자가 곽시우를 향한다.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솔직히 말하면 눈앞에 있는 하후령보다 더 예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더 짜증이 난다. 예쁘게 생겼다는 말은 잘생겼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괴감마저 든다. 저놈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땀을 흘렸으면 바로 방에 올라갈 것이지. 밥맛 떨어지게!’

곽시우는 그에게 화가 난 이유를 사내의 ‘땀’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해지는 것이다. 동석했던 여인이 시선을 줬다고 분노하는 것은 형산파의 제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 있지 말고 올라가시오-!”

이 이상 지체했다간 하후령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러자 사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깨닫고는 위로 올린 머리를 훅훅 털어 눈을 가린다.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을 내리니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까? 조금 전에 느껴졌던 위협적인 잘생김은 완전히 사라졌다.

왠지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곽시우가 그리 생각하고 안도하려 할 때였다.

“하…….”

“……!”

하후령이 아쉬움이 가득 섞인 한숨을 내쉰다.

겨우 부여잡고 있던 곽시우의 인내심이 뚝 끊어진다. 여인의 앞에서 사내는 우둔해지기도 한다던가? 치명적인 수준의 외모를 가진 사내의 존재는 하후령의 환심을 사려 종일 애를 썼던 곽시우에게 처단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내 말 안 들리시오?”

“들린다.”

“어머…….”

이쯤 되면 일부러 하후령이 자신을 놀리려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흘끔 바라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황극린에게 반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당장 꺼지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험한 꼴을 당할 것이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후령도 멍하니 황극린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곽 공자님, 그만…….”

“하 소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저 버릇없는 놈을 단단히 교육하겠습니다.”

“그런…….”

두 사람은 분명 조금 전에 호칭을 재정립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친근하게 부를 수는 없었다.

하후령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히 사내의 얼굴은 난생처음 마주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고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하지만 세상은 얼굴만 뜯어먹고 사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실수했어.’

돌이켜 보니 곽시우가 화가 날 법도 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자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게 반응했을 것이다.

‘여기선 곽 공자님의 자존심을 세워 줘야 해.’

하후세가의 장녀쯤 되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만약 처음 보는 사내의 편을 든다면, 곽시우와의 연은 영영 끊어지게 된다. 그와 연인 사이가 되지 않더라도 척을 지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

“저기, 소협? 죄송하지만 올라가 주시겠어요? 땀 냄새 때문에 대화에 집중이 안 되네요.”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은 애절한 표정이다.

그녀의 말에 곽시우가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조금 더 앞으로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안 들리느냐? 하후 소저께서 네놈의 냄새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어서 꺼져라!”

과거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방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살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한다면 살수로서 실격이다. 하지만 지금 황극린은 살수가 아니다.

그는 사람답게 살고자 했다.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거기다 황극린은 만뇌문의 장로가 되었다.

과거처럼 자신을 욕하는 걸 무시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만뇌문의 장로가 아무한테나 푸대접을 받으면 문도들은 어떤 취급을 당하겠는가?

그렇기에 황극린은 행동하기로 했다.

대화로 유추해 볼 때, 여인은 하후세가의 여식이다.

그리고 앞의 사내는 높은 확률로…….

‘명문가 출신.’

계산을 끝낸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예의가 없군.”

“뭐라고?”

“무림에선 사소한 시비로도 생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걸 배우지 못했나?”

“뭐라고? 네까짓 게 뭔데 날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당신, 그만두세요! 곽 공자님은 형산파의 제자라고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에요.”

하후령의 말에 곽시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내 출신을 들으니 이제 조금 겁이 나나?”

“…….”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위협하듯 검의 손잡이를 쥔 곽시우.

황극린이 가만히 서서 말한다.

“황극린이다.”

“뭐라고?”

퍼억!

순식간에 휘둘러진 황극린의 주먹이 곽시우의 복부를 강타한다.

“커허억……!”

힘을 조절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곽시우는 이 기습에, 주먹 한 방에 기절할 뻔했다. 어찌나 움직임이 빠른지 곽시우는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때까지 먹은 것을 객잔 바닥에 모두 토해 내고 있었다.

“곽 공자님!”

하후령이 황급히 달려온다.

“이, 이게 무슨……!”

“꾸에엑… 비, 비겁한 놈… 기습을 하다니!”

곽시우는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바로 검을 뽑았다.

“네놈… 죽여 주마!”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곽시우.

상대가 검을 뽑았다. 죽이진 않을 테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황극린이 신형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타악!

무언가가 곽시우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객잔 이 층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황극린은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나무젓가락.’

그리고 영웅건을 두른 사내가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뛰어내렸다. 착지하는 자세가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했다.

“무슨 짓……!”

하후령이 또 소리치려 하자 영웅건을 두른 사내가 말한다.

“무슨 짓이냐니? 내가 살려 준 건데?”

“뭐라고요?”

“저 사내가 내뿜는 살(殺)을 느끼지 못했어?”

“…….”

황극린은 곽시우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단지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어디서 본 적이…….’

황극린이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이녀… 놈아! 뭐 하는 거야!”

지팡이를 든 백의 사내가 계단을 통해 일 층에 도착했다.

얼굴에 황당함이 섞여 있었다.

“당신 앞에선 누구도 죽으면 안 된다며?”

“그래도 그렇지 형동현에서 형산파의 제자에게 젓가락을 던지면 어떻게 하느냐! 차라리 이 청년을 막았어야지!”

“저 사람은 이 몸도 쉬이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미치광이 네가 버겁다고?”

“어, 느껴져. 강력하고 무서운 살이 말이야. 그렇지?”

칭찬을 바라는 듯이 영웅건 사내가 황극린을 돌아보며 묻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순수한 웃음 뒤에 감추어진…….

독기(毒氣).

‘이자가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저 중년인은…….’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

왠지 모르게 뇌불이 말했던 성수신의와 인상착의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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