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62화 (62/316)

62화 남창의 자존심

강서성의 성도 남창.

중심거리에 자리를 잡았던 맹가장의 장원은 유구한 역사를 뒤로하고 현판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곳에 웅장한 필체로 양각된 만뇌문의 현판이 새로이 걸렸다.

남창의 백성들은 만뇌문이 들어오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새로운 문파가 생기는 건 무림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거기다 맹가장은 딱히 무림 문파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었다. 흑도 놈들이 뒷골목을 지배하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데에도 딱히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맹가장의 장주 맹도렬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만뇌문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만뇌문이 개파하고 난 뒤부터… 남창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 하면.

“뭐 하는 거야! 그쪽 길로 가면 칠성방이……!”

오랜만에 고향 남창에 돌아온 누기표가 기겁하며 친우인 소진열을 말렸다.

칠성방이 터를 잡은 북쪽 거리는 상당히 위험했다. 소매치기는 기본이고 까딱 잘못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칼침을 맞는 경우가 있었다. 흑도들이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들은 이유가 없더라도 백성을 핍박했다.

하지만 소진열은 누기표의 말에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칠성방? 언제 적 칠성방을 말하는 거냐?”

“너 미쳤어? 칠성방도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깜짝 놀란 누기표가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 친우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소진열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소식 못 들었구나?”

“뭔 소식?”

“칠성방 망했어.”

“뭐……?”

망했다고?

무슨 소린가? 칠성방은 남쪽 뒷골목을 지배했던 독존파 놈들을 제치고 남창의 뒷골목까지 집어삼켰다고 했다. 그런 놈들이 망했다고? 그들의 뒤에는 흑랑파라는 거대 사파 문파까지 존재했다.

“그럼 다른 흑도 문파가 들어온 거냐?”

“뭐? 흑도?”

소진열이 픽픽 웃는다.

그런 친우의 모시가 마치 비웃음으로 느껴져서 기분이 나빠진 누기표다.

“야, 너 흑도 무서운 걸 모르냐? 한번 잘못 걸리면 인생 하직할 수도…….”

“따라와 봐라.”

“뭐? 어디 가는데?”

누기표가 소진열을 따라간다.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뭐야?”

몇몇 얼굴을 알던 이들이 있었다. 칠성방원들 중 몇몇은 백성들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침을 찍찍 뱉어 대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악질들이다.

그런 놈들이 왜…….

“자자, 줄을 서십시오-! 아직 음식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청결! 청결!”

“남창의 거리는 저희 칠성방이 청소하겠습니다!”

“…뭐야?”

누기표는 저 황당한 상황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칠성방원들이 왜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청소하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 준단 말인가?

“만뇌문이다.”

“뭐라고?”

“만뇌문이 남창에 개파하자마자 남창의 흑도 놈들이 모두 정리됐다. 이제 뒷골목에 들어가도 소매치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이게 무슨 일인가?

“저기 음식을 나눠 주는 건 뭐고?”

“만뇌문의 개파식은 남창의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으로 대체한다고 하더군. 강호의 명숙을 초대하는 것보다 그게 더 의미가 있다나? 난 사실 정파니 사파니 구분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만뇌문을 보면 왜 정파가 정파인지 알겠더라.”

“와… 정말 이게 무슨 일이지……?”

남창에는 수많은 중소문파가 있었다.

하나, 그들은 흑도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어우러져 살아갔을 뿐이었다. 흑도인들이 백성들을 괴롭혀도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만뇌문은 다르다. 그들은 개파를 하기도 전에 칠성방을 싹 정리해 버렸다.

이제까지 남창에 자리를 잡은 문파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놀란 친우의 얼굴을 보며 소진열이 흐뭇해한다. 만뇌문의 존재로 남창 백성들의 자존감 또한 올라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뇌문은 중원의 명문거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거기다 만뇌문에는 강호백대고수 중 하나인 광견살검 구자광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창의 자존심이 곧 만뇌문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백성들은 마음속 한구석에 만뇌문에 대한 존경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개파식에 백성들에게 저리 음식을 베푸는 문파가 남창에 어디 있었는가?

터를 잡은 곳에 왕과 같이 군림하는 문파는 있지만, 왕의 의무를 다하는 문파는 드물다.

만뇌문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세간의 평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만뇌문이 있으니 이제 남창은 더 발전할 거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칠성방 뒤에는 흑랑파가 있는데? 당장은 개과천선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흑랑파는 강서성과 호북성을 잇는 구강(九江)현의 패자로 군림하는 사파 문파였다.

“소문을 들어 보니 이미 흑랑파는 만뇌문의 구 대협에게 당했다더군.”

“구 대협?”

“강호백대고수 중 하나인 구자광 대협 말이야. 그분도 만뇌문의 문도라고 하더라.”

“강호백대고수가 고작 문도라고……?”

“그래. 이제 만뇌문이 어떤 문파인지 알겠냐? 드디어 남창에도 명문거파가 들어서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허어…….”

명문거파의 중요성.

화산파가 있는 회음현은 중원 전체로 따져도 치안이 최고로 좋았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흑도 놈들이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지 못한다. 명문거파의 존재만으로 그들은 두려움에 떤다.

강서성은 대부분 사파 문파가 패권을 쥐고 있다.

만뇌문의 존재는 흑도인들과 사파 문파에게 당하고 살아왔던 백성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난 만뇌문에 들어갈 생각이다.”

친우의 말에 누기표가 당황한다.

무공은 하나도 모르는 놈이 어떻게 무림 문파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무공도 모르는 놈이 무슨 문파에 들어가?”

“잡일을 할 하인과 숙수를 모집한다더라. 요리는 안 되지만… 내가 그래도 일머리는 좋지 않냐? 분명 만뇌문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겠지.”

만뇌문에 들어가겠다는 소진열의 표정에는 자긍심과 결연함이 엿보였다.

“너 안 본 사이에 많이 바뀌었구나.”

“바뀐 건 내가 아니라 상황이지.”

능력이 있음에도 기회가 없었기에 뜻과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이들이 남창에는 수없이 많았다. 소진열은 단기간에 남창의 분위기를 바꿔 버린 만뇌문에서 희망을 보았다.

“가자. 오늘은 내가 낸다!”

“짠돌이 놈이 웬일이냐.”

“하하, 기분이 좋아서 말이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흑도 놈들이 개과천선하여 봉사하고 있다.

물론, 진심으로 뉘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무림에서의 문파의 힘이었다.

강한 무력의 무인 한 명의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수많은 백성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강한 무인이 모인 문파의 방향성은 현이나 성의 전체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만뇌문의 현판이 걸린 지 석 달 만에.

그들은 남창 제일의 문파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호에서의 만뇌문의 첫발자국에 불과했다.

* * *

“황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황극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에서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인사가 들려온다. 부담스럽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고생하시오.”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뇌문의 장원은 상당히 넓다.

거기다 비 노인의 장기를 살려 약재방도 열었으니 꽤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벽보를 붙여 숙수나 식솔들을 20명가량 모집하는 데 이천 명이 몰렸었다. 그것만으로 남창에서 만뇌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다.

문파를 개파한 초반에는 몹시 바빴지만, 석 달이 지나자 황극린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로워졌다.

비동에서 수련할 때와 비슷하다고 할까?

정오까지 개인 연무장에서 내공심법을 수련하고, 낮에는 뇌불과 광견살검과 비무를 한다. 광견살검과 싸울 때는 황극린은 스스로 제약을 걸었기에 도움이 되었다. 거기다 광견살검의 무위 또한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백씨 형제와 비청하의 무공을 잠깐 봐주었다.

기초를 익힐 때는 자주 봐줘야 했지만, 이젠 그들도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는 단계가 되었기에 조금만 봐주면 된다.

일상이 단조로워졌다는 건 만뇌문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제 슬슬 떠날 때가 됐군.’

황극린이 비동을 떠날 때와 같았다.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도 분명히 황극린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경지까지 오르려면 강호로 나서야 한다. 가장 확실한 성장 방법은 역시 영약을 취하는 것이다.

문제는 역시 영약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돈이야 최근 약재방을 열어 옥보단을 판매하기 시작했기에 크게 모자라지 않았지만, 귀한 영약은 막대한 금자가 있다고 한들 쉬이 구할 수 없었다. 세상에 돈이 많은 문파는 많았으며, 그들 또한 영약을 원한다.

용비문을 처리하고 얻은 돈과 옥보단의 판매 수익으로는 적당한 영약 한두 개를 사고 끝이다. 그렇기에 직접 움직여야 한다.

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영약을 구할 수 있었다.

가장 쉬운 것은 길은 역시나…….

‘용봉지회겠지.’

용봉지회는 정파의 최대 규모 비무 대회다.

구파일련에서 돌아가며 3년을 주기로 개최하는데 보통 우승하면 엄청난 수준의 영약이나 보물을 상품으로 얻을 수 있다. 물론, 우승을 노리는 무인들은 그런 상품보다 용봉지회의 우승자라는 명예를 원하는 것이지만 황극린은 그런 명예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실속만 챙기면 된다.

용봉지회의 상품이니만큼 개최한 문파의 최고 영약을 정당하게 얻을 기회였다.

‘이제 평범한 수준의 영약으로는 몸의 변화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황극린은 수련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강서성 일대에서 영초나 영약을 구매하여 몸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아쉬운 점은 몸이 영약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미미했다는 점이다. 세맥이 더 튼튼해진다고 하지만… 현재의 내공 수준으로는 딱히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세맥이 아무리 튼튼해도 운용할 내공이 부족하면 큰 효용이 없었다.

황극린은 확실히 깨달았다. 일단 찾아야 하는 것은 명확한 특징이 있는 영약이다.

가령 극한의 양기(陽氣)를 품은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 그것을 취하면 황극린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음기(陰氣)를 품은 천년설삼 따위를 취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변화가 몸에 나타날 것이다.

“황 장로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황극린이 머무는 전각의 전속 하인인 소진열이 말을 전했다.

최근에 고용된 하인으로 어릴 때부터 많은 일을 해 와서 일머리가 좋았다.

“손님?”

“예, 개방도 한 명과 화월루에서 한 여인이 동시에 찾아왔습니다.”

개방도와 남창의 기루인 화월루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황극린은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객청으로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소진열이 떠나간다.

* * *

개방과 하오문이 동시에 정보를 가져왔다.

황극린이 두 문파에 의뢰한 것은 성수신의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성수신의로 추정되는 이가 중원의 오악 중 하나인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있다고 했다.

‘성수신의라…….’

뇌불에게 듣자 하니 그는 영약으로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원에서 신의라 불리고 있었지만,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못한 이유는 그러한 성수신의의 성향 때문이었다고 했다. 의원 중에서도 괴짜라고 했던가?

‘그렇기에 뇌불과도 어울렸겠지.’

뇌불은 황극린의 그 생각에 반발할 테지만…….

아무튼, 아직 성수신의의 영입을 확실하게 결정한 것은 아니다. 만약 문파의 방향성과 어긋난다면 과감하게 영입을 포기할 것이다. 좋은 의원이 있다면 문파에 분명히 도움이 될 테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 만뇌문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면 영입하지 않는 게 좋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직접 마주하여 영입을 결정할 생각이다.

물론, 아직 형산에서 발견된 사내가 10할 확실하게 성수신의가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단지 개방과 하오문이 똑같이 형산에서 그 사내를 발견했다고 하여 가 보려는 것이었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거나 그렇게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문주인 뇌불에게 보고만 하고 움직이면 된다.

‘오랜만에 제대로 경공 수련을 할 수 있겠군.’

말이나 마차 따위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

만약 성수신의가 형산에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니라면 여유롭게 여행을 다녀온 것에 불과할 터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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