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설레는 기분
“나야 모르지.”
황극린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어이없어하는 게 느껴진다. 비동에서 황극린의 눈칫밥을 먹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놈은 한 군데에 정착하는 놈이 아니다. 뭐, 몇 군데 짐작은 할 수 있겠다만…….”
“성수신의가 당신이 오라면 오는 것은 확실하오?”
“당연히 온다. 내가 놈의 목숨을 구해 준 적도 있고 의술의 실력을 키우는 데 이 몸의 도움이 컸으니까 말이다.”
“그렇군.”
어차피 이것도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황극린도 당장 남창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제 막 장원을 구했을 뿐이었고, 문파의 현판을 걸지도 않았다.
“아무튼, 짐작 가는 곳이 어디오?”
“놈은 오악(五岳) 중 하나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가 머무는 땅에선 진귀한 영초가 발견될 확률이 높다던가? 영초에 환장한 놈이니… 그중에 있을 거다.”
오악 중 하나라…….
막상 찾으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인상착의나 생김새가 어찌 되오?”
“의원같이 생기진 않았지.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해야 하나? 물론, 놈도 나이가 들었을 것이니 뭐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다른 특징은 없소?”
“으음, 그놈의 특징이라…….”
잠시 생각하던 뇌불이 손뼉을 친다.
“그래, 놈은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한다.”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하는 의원이라…….
명확한 특징이 있으니 찾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개방이나 하오문에 일단 의뢰를 넣어 놓으면 될 것 같았다. 직접 뛰어 가며 오악을 뒤지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일단 어딨는지 확인되면 그를 영입하러 다녀오면 된다.
‘백온후가 의술을 공부하고 있으니 좋은 스승이 될 수도 있겠군.’
구색이 딱딱 맞춰진다.
황극린은 문파를 대규모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소수 정예가 관리하기에도 편하다. 뭐, 지금 무공을 익히는 백씨 형제나 비청하의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간 후에 규모를 키워도 늦지 않았다.
“알겠소. 개방과 하오문에 의뢰를 맡겨 놓겠소.”
“좋은 생각이다. 그래, 직접 찾는 것보다 그런 놈들의 손을 빌리는 게 낫지.”
일단 성수신의에 대한 것은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았고, 이제 문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명확한 방향성은 잡았지만, 아직 세부적인 내용은 뇌불과 의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 가는 문파이니만큼 뇌불의 의견도 필요하다.
“그리고 문도들의 수련에 대해서 말인데, 소림사의 것과 내가 비동에서 했던 수련을 결합하는 게 어떻소?”
“으음, 그놈들이 버텨 낼 수 있을까?”
“비청하는 모르겠지만 백건악은 충분히 견딜 것이오.”
정확히 말하면 백건악의 끈기는 황극린도 인정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흑살문에서도 그의 모습을 보았었고, 7살 때부터 용비문의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버틴 독종이었다.
“청하 그놈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절맥증을 앓은 탓인지 재능도 뛰어나지. 그리고 오늘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경쟁심이 있는 듯하더군.”
“그렇소?”
“그래, 비슷한 나이니까 경쟁심이 생길 만도 하지. 맞수가 있다면 성장은 더욱 빨라진다. 백온후 그 아이는 어떠냐?”
“끈기는 잘 모르겠지만, 묘연골을 타고난 아이라고 하오.”
“오, 그래? 그러고 보니 유령 그놈도 묘연골을 타고 났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유령을 아시오?”
유령은 뇌불보다 훨씬 전에 활동하던 고수의 별호였다.
흑살문의 무공이 그의 무공에서 파생됐으니 적어도 흑살문이 만들어지기 전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뇌불이 유령을 알고 있을까?
“끌끌, 이 몸이 설명해 주지. 유령이란 말이다… 말 그대로 유령이다. 음침하고 또 음침한 놈이지.”
“유령은 몇백 년 전의 인물이 아니오?”
“맞다. 하지만 그때의 유령이 자신의 무학과 내력을 후계자에게 전승하여 당대의 유령도 유령인 것이지.”
“유령의 후계자는 흑살문주가 아니오?”
황극린은 이때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것에도 그가 모르는 비사가 숨겨져 있다는 말일까?
“그놈도 유령의 무학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통이 아닌 방계일 뿐이지. 그렇지만 놈은 유령의 무학을 흑살문의 방향으로 발전시켰다는 게 다른 점이겠지.”
“그렇군.”
황극린도 몰랐던 사실이다.
애초에 유령이라는 놈은 황극린이 혈귀라는 별호를 얻은 시점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쯤에는 이미 흑살문주에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당대 흑살문주의 성격이라면 자신들이 유령의 방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그때 갑자기 뇌불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 쥔다.
“으윽, 또 머리가 아프군. 난 마지막에 분명히 유령한테 당한 게 분명하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닌가 보군.”
뇌불의 주화입마는 완전히 치유된 게 아니었다.
“크으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럼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쉬시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 나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때 뇌불이 다급하게 황극린의 팔을 부여잡는다.
“직화로 구운 돼지고기와 양념장이 있다면 머리가 아프지 않을 것 같기도…….”
“꾀병이오?”
“이, 이놈아! 내가 무슨 꾀병이냐! 정말 머리가 아프단 말이다! 근데 네 양념장과 고기를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라 그런 거다!”
정곡을 찔린 것인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뇌불이다.
“알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뭐, 고기를 굽는 것 정도야 뇌불이 아는 무림의 비사를 듣는 것치고는 싸게 먹히는 것이다.
그렇게 황극린이 방을 나서자 뇌불이 인상을 찌푸린다.
“아무리 해도 마지막 순간의 기억은 나지 않는군.”
왜 비동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게 되었는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유령과 관련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뭐 지금 당장은 중요한 게 아니다. 몸이 회복되면 기억도 완전히 돌아올 수 있으리라.
‘지금 중요한 건 고놈의 고기와 양념장이다.’
뇌불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 * *
이제는 만뇌문의 식구가 된 이들이 모두 함께 맹가장의 장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이미 황씨 가문에서 모집한 인부들이 수리하고 있었다. 황극린에겐 조금 의외인 상황이었다.
‘늑장을 부리거나 아예 수리하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황씨 가문에서 정신을 차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장원 안으로 들어가니 황극린의 묵철을 담금질하여 비수로 만들어 준 대장장이 초우가 있었다.
“먼저 와 계셨군요.”
초우는 황극린이 영입한 만뇌문의 전속 대장장이였다.
그는 무기만 만드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삶에 필요한 각종 철물도 제작했고, 과거 비동에서 수련할 때 썼던 철로 된 팔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장원이야 워낙 넓었으니 공방을 만들고 빈방을 내어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 현판을 만들려면 장원의 분위기를 먼저 살펴봐야 하니까. 같이 오신 분이 만뇌문의 장문인이신가?”
“그래, 극린이한테 이야기 들었다. 실력 좋은 장인이라고 말이다.”
뇌불과 초우의 눈이 마주친다.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은 상대의 진가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눈빛만 봐도 괜찮은 대장장이군.’
‘확실히 이제까지 본 무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던 것인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했다. 황극린은 같이 온 식구들을 데리고, 장원을 안내한다.
“원하는 전각을 고르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마. 너희만의 것으로 꾸밀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
“……!”
모두가 화들짝 놀란다.
전각 하나를 통으로 쓰라니?
“백건악과 백온후는 같이 써도 된다.”
“그, 그럼 저는 형아랑 같이 잘게요!”
“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백씨 형제가 그리 대답하자 비청하도 비 노인을 챙긴다.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전각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각자가 원하는 전각을 선택했다. 그런데도 워낙 장원이 넓어 많은 전각이 남아 있었다.
‘으음, 몇몇 전각은 허물어서 제대로 된 공방을 만들 필요가 있겠군.’
예를 들면, 영약을 연단하는 공방이나 각종 물건을 제조하는 대장간 등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성수신의를 언제 찾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극린이 뇌불의 ‘교육’을 통해 조금 바뀐 광견살검을 바라본다.
“당신은 어딜 쓸 것이오?”
“…저도 주시는 겁니까?”
“그럼 바닥에서 잘 생각이오?”
구자광이 조금 머쓱한지 뒷통수를 긁는다. 자신도 방을 내주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전 원래 좁은 곳에서 더 잘 잡니다. 대충 저기를 사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맹가장의 하인들이 사용했을 법한 작은 전각의 무리가 보인다. 그중 하나를 사용하겠다는 거다. 아직 구자광은 만뇌문에 정식으로 입문한 게 아니었으니 저기에 머물게 하면 될 것이다.
사실 황극린이 그를 데려온 것은 수하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무를 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련을 도와줄 도구라고 할 수 있을까?
“전 주인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깔끔히 청소한다.”
백온후가 살짝 몸을 떤다.
자신의 체질 때문에 청소를 하는 건가 싶었다. 묘연골은 더러운 환경에선 몸 상태가 나빠진다고 했었으니까.
“이것도 수련이라 생각하며 깔끔하게 하도록.”
“예, 주공!”
“예, 은공!”
백건악과 백청하가 경쟁적으로 튀어 나갔으며, 그 뒤를 백온후와 구자광이 따랐다.
이미 비 노인은 먼저 도착하여 인부들과 함께 장원의 수리를 관리하고 있었다.
잠시 모두 함께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극린도 행주를 들었다.
왜인지 설레는 기분이었다.
* * *
“자, 가자아아!”
칠성방의 방도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들은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이리 떼였다. 어디선가 돈 나올 구석이 생기면 마구 몰려가서 한탕 해 먹는다. 새로이 맹가장에 자리를 잡은 황극린이라는 놈은 졸부라고 했다. 흑도의 무서움을 알려 주면 돈을 토해 내리라.
무공을 익혔다곤 하지만 칠성방의 뒤에는 흑랑파가 있었다. 흑랑파의 도움으로 남창의 남쪽 거리까지 점령하게 된 칠성방의 세력은 빠르게 성장한 상태였다. 무공이 아무리 강하면 뭐 하나? 쪽수로 밀어붙이면 그만인데 말이다.
황극린이라는 놈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상납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수십 명의 흑도인이 우르르 몰려가 장원의 앞에 도착했다.
‘크크,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 했겠다?’
칠성방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금황상가에서 지원을 약조했기 때문이다. 황극린에게 빼앗은 돈은 모두 칠성방이 꿀꺽할 수 있다. 안 그래도 과거 묵철을 뺏겨 타격이 컸던 칠성방주는 제대로 건수를 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원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때.
머리에 하얀 천을 둘러매고 장원의 입구에서 쉬고 있는 한 중년인과 시선을 마주한다. 그 사내의 시선이 워낙 강렬하여 칠성방주 또한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떨거지들은?”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는다.
칠성방주는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앞으로 나선다. 뒤에는 수십 명의 칠성방도들이 있다. 한 놈에게 겁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만뇌문의 문도인가?”
“그런데?”
“우리는 남창의 칠성방이다. 만뇌문의 문주를 만나러 왔다.”
“칠성방?”
남창에 살면서 칠성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다 조만간 흑랑파의 적 대협이 도착한다. 그분께서 칠성방을 뒤에서 팍팍 밀어주고 있었다.
“흑도 떨거지들은 어딜 가나 말썽이구만.”
사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옷의 먼지를 턴다.
그러고는 전혀 망설임 없이 칠성방주에게 다가왔다.
퍼억!
“커억!”
칠성방주가 바닥에 쓰러지자 방도들이 성난 기세로 구자광을 에워싼다. 이렇게 쪽수로 밀어붙이면 한 사람은 금방 제압할 수 있다.
“이 새끼가 감히…….”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별 거지 같은 놈들이…….”
구자광이 실력을 행사하려 하려는 순간이었다.
“비켜라.”
적사갈의 목소리가 들린다.
흑랑파는 강서성과 호북성 사이를 주름잡는 사파 문파 중 하나다. 그리고 적사갈은 흑랑파의 장로급 인사였다. 칠성방의 방도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길을 터 주었다.
“왜 장원에 들어가지 않고 우르르 몰려… 서…….”
“응?”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적사갈의 움직임이 굳는다.
마지 저승사자라도 본 듯한 얼굴.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든다.
“다, 다, 당신은…….”
“날 아나 보네?”
광견살검이 슬쩍 적사갈의 가슴팍을 바라본다. 흑랑파의 상징인 검은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아, 네놈들 흑랑파 놈들이구나.”
이게 무슨 상황이지?
“좌군풍 놈은 잘 있지? 안 그래도 조만간 만나러 가려 했었는데.”
“……!”
좌군풍은 흑랑파의 장문인의 이름이었다.
칠성방도들이 술렁댄다. 좌군풍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그럼 대체 저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아무튼, 잘됐군. 야, 흑랑!”
“예, 옙! 광견살검 대협!”
광견살검이라는 말에 칠성방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뜨인다.
그는 무림에서도 유명한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그에게 당한 사파의 문파가 한둘이 아니다. 성격이 얼마나 거지 같은지 무림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될 무인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었다.
구자광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한다.
“왜 왔는진 나중에 물으마.”
“그, 그, 그게…….”
“일단 들어와라. 너희가 할 일이 있다.”
끼이이익.
장원 내부에선 수리 작업과 청소가 한창이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광견! 어딜 놀다가 기어들어 오느냐!”
그때 저 멀리서 노호성이 들리고, 천하에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광견살검이 잔뜩 긴장한 채로 대답한다.
“죄, 죄송합니닷! 청소를 도울 인부들을 데려왔습니다!”
“오호, 그래? 잘했다.”
칭찬을 들은 광견살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대체 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지? 왜 광견살검이 이리도 꽉 잡혀 있는 걸까?
“야, 들었지? 제대로 청소해라.”
황극린의 돈을 털러 왔던 칠성방도들은 졸지에 청소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흑랑파 놈.”
“예……?”
“너는 청소 끝나고 따로 좀 보자.”
흑랑파의 적사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