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개파의 첫걸음
‘이놈이 돈이 있긴 한가?’
금황상가 상가주 황천옹은 황극린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흑색 무복. 중원 어디의 포목점을 가나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의 양산품이었다. 장원을 매입하는 데 저리 큰돈을 한 번에 융통할 수 있다면, 저런 의복을 입을 것인가?
진짜 부자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도, 수행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이 혼자 덜렁 나타나서 장원을 매입한다는 게 확실히 정상적인 그림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돈은 있는 것이오?”
황천옹이 예리한 질문을 던지자 맹가장의 장주 맹도렬 또한 긴가민가한 눈빛으로 황극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금자 2,500냥을 쓰는 사람치고 딱히 돈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돈은 있소.”
“요즘 워낙 세상이 흉흉하지 않소? 그것을 증명해야 맹 장주도 소협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황천옹의 말에 맹도렬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만약 그가 돈이 없으면 이제까지의 입찰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그냥 금자 600냥에 팔아 버리려던 장원이 2,500냥까지 올라 버렸다. 시세는 사실 더 비싸지만, 이딴 크기만 한 장원은 팔아 버리고 작은 장원으로 옮겨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가 거느린 여러 부인들에게 선물도 사 줘야 하고, 기루에 가서 회포도 풀어야 했으니까.
“돈이 부족하오?”
그런데 황극린은 도리어 황천옹을 바라보며 물었다.
“뭣이오……?”
“가격을 제시하다가 갑자기 돈이 있냐고 물으니 궁금해서 말이오.”
“소협의 눈에는 뒤의 황금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이오? 이봐라, 비단을 걷어라.”
비단을 걷으니 휘황찬란한 금자 더미가 위용을 드러낸다.
맹도렬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금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략 금자 2천 냥쯤 되어 보이는군.”
“…….”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까?
황천옹이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금황상가에서 운영하는 기루만 넷이며, 각 현의 지부까지 합치면 총 열 개가 넘소. 금자 2천 냥 정도는 그냥 융통할 수 있는 돈이오.”
“그렇소? 그럼 가격을 더 제시하시오.”
당연히 황천옹은 바로 가격을 제시하지 못했다.
장원의 지리적 위치가 아무리 좋아도 그는 장사꾼이다. 큰 이윤을 남겨 먹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입찰한다면 큰돈을 투자하는 것에 비하여 이윤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사내가 돈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시는군. 지금 중요한 것은 당신이 돈이 있느냐 없느…….”
그때 황극린이 두 장의 전표를 꺼낸다.
“확인해 보시오.”
그것을 받아 든 맹도렬의 두 손이 벌벌 떨린다.
“나, 낙양전장! 그것도 본점에서 발행한 전표라니!”
낙양전장은 중원 전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전장이었다. 거기다 낙양 본점이라면 웬만한 인맥으로는 발행할 수조차 없었다.
“맹 장주, 낙양전장 본점이 중한 게 아니라 얼마인지를… 헙!”
황천옹이 화들짝 놀란다.
맹도렬이 들고 있는 전표는 무려 금자 4천 냥.
황씨 가문의 금고를 털어 가져온 금자가 2천 냥에 불과할진대, 저놈은 전표로만 4천 냥을 들고 온 것이다. 경쟁이 될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저리 돈이 많은 거지? 저 사내의 정체가 뭐길래?’
용비문은 오랜 기간 동려현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돈을 쓸어 모았다. 그들이 가진 재산을 절반이나 가져왔으니 황극린이 돈이 많은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황천옹은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북경에서 온 건가?’
황천옹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황족이라면 가능하다. 저리 많은 돈을 전표로 덜렁 들고 다닐 정도의 사내라면…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사내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무조건 장원을 매입하려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사내에게 잘 보이는 것이 좋겠군.’
상인은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한다.
황실의 파벌 싸움에서 밀려났다고 하더라도, 저리 많은 돈을 들고 다닐 정도면 가문의 위세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차라리 사내에게 점수를 따고, 연을 만들어 놓는 것이 이득이다. 굳이 출혈경쟁을 하여 서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공자님, 제가 졌습니다.”
갑자기 입찰 포기를 선언하는 황천옹.
맹도렬이 허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황실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리 돈이 많다면… 배경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저희 때문에 큰 출혈을 하셨으니… 약소한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떤 도움 말이오?”
“맹가장은 관리가 되지 않아 수리할 곳이 많습니다. 금황상가에서 장원의 수리비를 모두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황극린 딱히 고민하지도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황극린의 성격에 맞지 않다. 도움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맹 장주, 황 공자님께 장원을 판매하실 생각이시지요?”
“그,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중개상으로 변모한 황천옹에 당황했지만, 뭐 2,500냥이면 맹도렬도 만족할 금액이었다.
“이번 일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금황상가에서 계약을 모두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맹가장의 수리에 대한 건도 문서로 남겨 두겠습니다.”
“철두철미하시군.”
황극린의 말에 황천옹이 대인배의 미소를 짓는다.
“상인은 말로만 약조하지 않습니다. 금황상가는 신뢰와 신용의 상가니까요.”
이미 황극린을 어디 유력 가문의 후계자쯤으로 생각한 황천옹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좋소.”
당연히 황극린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계약서가 완성된다.
맹도렬과 황천옹의 도장이 계약서에 찍혔다. 장원을 2,500냥에 넘기겠다는 내용과 장원의 모든 수리비를 금황상가에서 부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성함을 적으시면 됩니다. 도장이 없으시다면 지장을 찍으셔도 무방합니다.”
황천옹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황극린이 계약서를 작성했다.
진본과 따로 보관할 사본까지 모두 작성을 마쳤을 때, 황천옹이 계약서를 확실히 검토하기 위해 살펴본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찾았다.
‘황극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
이 사내도 이름이 황극린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자라난 의심의 싹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어디 가문에서 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같이 남창에서 더불어 살아갈 터이니 안면을 트고 지내면…….”
“굳이 그럴 생각은 없소.”
“……?”
“우리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소?”
“……!”
순간 황천옹의 뇌리에 뇌전이 쳤다.
잠시만. 이건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 거지꼴을 하던 황극린이 이렇게 돈이 많을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황천옹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황극린의 모습은 이런 건장한 청년이 아니었다. 지금은 오히려 황씨 가문의 장남보다 키가 더 크지 않은가?
“설마… 극린…….”
“수리는 약조한 대로 진행해 주시길 바라오. 그럼 맹 장주, 내일까지 장원을 비워 주십시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얘들아, 짐 빼라!”
장원이 시끌벅적해진다.
그 와중에도 황천옹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약서와 황극린을 바라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죽여도 시원찮을 놈에게 계약서까지 작성하며 도움을 약조했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혀를 뽑고, 사지를 분질러 버리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
하지만 참아 냈다.
황천옹은 상인이지 무인이 아니다. 저놈이 장남의 귀를 잘라 버렸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황극린의 무공 실력은 일류 그 이상이다.
“하하, 우리 극린이가… 많이 컸구나.”
황천옹이 떠나가는 황극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감히 황씨 가문과 척을 지고도 이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곤 생각하지 말아라.’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저놈을 어떻게 해야 나락으로 보내 버릴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적절한 방법이 떠올랐다.
‘칠성방이 흑랑파를 등에 업고, 남창의 뒷골목을 완전히 주름잡았다지.’
흑도 놈들은 돈만 던져 주면 사람 죽이는 걸 예사로 안다.
장원에서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황극린이 돈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남창에 소문이 퍼지고 있을 테니까.
‘좋은 방법이로군.’
* * *
“대, 대인! 오, 오셨습니까!”
장원에 다녀온 황극린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광견살검이다. 얼굴은 전혀 상하지 않았건만, 왜인지 거동이 불편해 보인다.
“노인네에게 맞은 것이오?”
흠칫!
구자광이 뒤를 돌아본다.
뇌불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노야께선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무(武)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제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절대, 절대 맞은 게 아닙니다.”
“…….”
대체 어떤 식으로 교육을 했길래 하루 만에 광견살검이 이리도 바뀐 것일까?
이러다가 악심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황극린의 걱정을 예상이라도 한 듯 뇌불이 전음을 보낸다.
-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이 강호 밥만 수십 년을 먹었다. 저런 어중간한 놈들을 회유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지. 저놈은 이제 만뇌문(萬雷門)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만뇌문.
황극린과 뇌불이 함께 만들어 갈 문파의 이름이다.
만(萬)이라는 글자에는 ‘무한’이라는 뜻도 있었다. 무한한 벼락을 강호에 내리겠다는 거창한 의미로 지은 문파 이름. 처음 뇌불은 문파를 만드는 데 시큰둥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지금은 가장 열성적으로 문파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가서 쉬시오. 나랑도 비무를 해야 하니.”
“예, 대인!”
구자광이 재빨리 황극린에게 멀어졌다.
천하백대고수였던 광견살검이 하루아침에 왠지 초라해졌다. 아마 그를 알던 무인들이라면 저토록 예의 바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어떻게 교육한 거지?’
황극린으로서도 뻣뻣했던 광견살검이 하루아침에 변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나중에 뇌불에게 비결을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원은 매입했느냐?”
“그렇소.”
“돈이 부족하면 말하거라. 안 그래도 기억이 조금씩 돌아와서 강호에 숨겨 뒀던 보물들이 어딨는지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괜찮은 약쟁이 놈도 알고 있다. 자고로 무림 문파라면 연단(練丹)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이미 죽었을 수도 있으려나?”
뇌불은 황극린이 놀랄 정도로 문파의 개파에 적극적이다.
그건 그렇고 연단이라…….
“연단은 확실히 필요하겠군.”
황극린은 자신의 체질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고 싶었다.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을 복용하여 그 성질을 흡수하는 체질. 한계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육신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단전의 내력도 늘리는 방법도 알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그리고 중원제일이라 불리는 숙수도 데려와서 매일 24첩 밥상을 먹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고로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잘 먹는 거지. 소림에서 풀떼기만 먹고 수련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뇌불이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지는 이를 간다.
“그리고 말이다. 한령심법과 청하가 익힌 일원심법(一元心法). 그리고 혈풍뇌전신공을 섞으면 썩 괜찮은 무공이 만들어질 것 같구나. 당연히 혈풍뇌전신공보단 부족하지만… 만뇌문의 문도들이라면 구파일련에 밀리지 않을 무공을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 응?”
“…좋은 생각이오.”
뇌불은 신이 나서 황극린이 장원을 매입하러 다녀오는 동안 생각해 놓았던, 만뇌문의 발전 방향을 떠들어 댔다. 물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황극린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많았다.
소림사 출신이었으며, 강호의 경험이 황극린보다 다채로웠으니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듯했다.
“하하하하! 우리가 구파일련 중 하나를 먹으면 소림사를 밀어내자꾸나! 고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아니지! 아니야! 구파일련이 무엇이냐? 극린이 네놈과 이 몸이 있는데 구파일련? 그냥 천하제일문이 되어야지!”
잔뜩 흥분한 뇌불을 황극린이 진정시킨다.
“일단 그건 천천히 고민해 보고, 당신에게 물을 것이 있소.”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흥분한 눈동자를 빛낸다.
“뭔데? 다 물어보아라! 다 알려 주마!”
“당신은 인면지주가 융중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놈의 배에서 실을 뽑아내 의복을 만들었지 않느냐?”
“혹시 다른 영물의 위치도 알고 있소?”
뇌불이 말한 연단도 중요했지만, 당장 써먹을 순 없다.
영물의 내단을 최대한 빨리 얻어서 몸의 변화를 체감하고 싶다.
“으음, 알고 있긴 한데…….”
“거기가 어디오?”
“여기선 꽤 멀지……. 그놈은 북해에 있다. 솔직히 아직 살아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북해라…….
확실히 멀다. 지금 당장 북해까지 갈 수는 없었다. 뭐, 영물이 있을 수도 있는 위치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하자.
“그런데 영물이 필요하더냐? 키우려고?”
“내단을 취하려고 말이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뇌불이 누군가의 이름을 꺼낸다.
“영물의 위치라면 성수신의(聖手神醫) 고놈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성수신의?”
황극린은 이름만 들어 본 별호였다.
당연히 그가 207호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성수신의라는 인물이 활동하진 않았다.
“내가 말했지 않으냐, 약쟁이 놈이라고. 뭔 약으로 사람의 체질을 바꿀 수 있다느니 헛소리를 했던 놈인데, 나도 그놈의 약을 몇 번 먹고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래도 의술은 성수신의라는 거창한 별호만큼이나 뛰어나니 만뇌문의 전속 의원으로선 괜찮은 놈이지.”
영물의 위치를 알고 있으면서 연단에 적극적인 의원이라…….
“그래서 성수신의는 어디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