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돈 싸움
“지, 집을 옮긴단 말이더냐?”
황씨 가문에서 일을 마치고 온 비 노인이 당황한다.
문파를 개파한다는 것은 애초에 평생 황씨 가문의 약초 검수 일을 하고 살아왔던 비 노인에게 그리 큰 감흥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 이사는 다르다. 그것은 몹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예, 비 노야.”
“나까지 갈 필요가 있겠느냐? 난 굳이 다른 집으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 청하만 데려가도 나는 괜찮단다. 그러니…….”
당연히 비 노인 또한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추억이 담겨 있긴 하지만, 비청하가 이곳에서 끙끙 앓았던 기억만 생각하면 그리 좋은 추억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인네가 같이 가면 방해나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청하의 병을 치료한 황극린에게 또 도움을 받을 정도로 비 노인은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비 노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그가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파는 무인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문파 내의 잡무를 총괄하는 총관이 있으면 그 밑에 시비나 하인과 같은 식솔들이 있습니다. 또, 무인이 다치면 치료해 주는 의원도 필요하겠지요. 의원이 있다면… 약재를 관리하고 검수하는 사람도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
“비 노야께선 황씨 가문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해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이 제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허허허…….”
황극린의 말을 듣고 있으니 비 노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나이가 드니 눈물만 많아지는 것 같았다.
“무오야, 뭘 그리 재느냐? 그냥 같이 가서 살면 되는 건데 말이야.”
“은공의 말씀이 맞아요. 할아버지도 꼭 같이 가셔야 해요.”
뇌불도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으며, 사랑스러운 손자 비청하도 비 노인을 설득한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양심을 지키려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정말 황극린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면,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게 아니라 그가 만든 문파로 가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고맙구나.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마…….”
“아닙니다. 잔뜩 부려 먹을 테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허허허, 그래… 정말 고맙구나.”
오히려 황극린이 저리 말해 주니 비 노인도 마음이 한결 놓인다.
“그럼 내일 황씨 가문에 그만둔다고 이야기를 하마.”
“예, 그럼 저는 장원을 알아보러 다녀오겠습니다.”
황극린이 집을 나서려는 때, 구자광이 늠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선다.
“나도 같이 갑시다. 그래도 같이 살 집인데 함께 살펴봐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뇌불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는데, 오늘이 날인 것 같았다.
“미친 개야, 넌 여기 남아라.”
“…지금 나보고 한 말… 입니까?”
식사 때 뇌전에 당했던 기억에 함부로 말을 놓지는 못한다. 노인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미 체감했다. 하지만 자신은 이곳에 손님의 자격으로 왔다. 수하가 될지 안 될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문파를 만드니 자신과 같은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고수가 꼭 필요할 것이었다.
“광견이라는 별호를 가진 놈은 여기에 너뿐이지 않으냐?”
“멋대로 별호를 줄이지 마십시오. 광견이 아니라 광견살검입니다.”
“그래그래, 광견. 네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구나.”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된다.
이 노인네가 대체 뭘 물으려고?
광견살검은 저도 모르게 황극린에게 시선을 던진다.
“극린아, 잠시 이놈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지?”
“그러시오.”
대번에 황극린이 허락하자 광견살검이 당황한다.
“아, 아니, 난 이 노인네랑 이야기할 것이 없는데…….”
“끌끌, 걱정하지 말아라. 설마 널 잡아먹기야 하겠느냐?”
저렇게 달래 주듯 말해 주는 게 더 무섭다. 왜인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광견살검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무림에서 위협을 많이 빠져나왔다. 하나, 뇌불의 마수에 걸려든 지금 그것에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유일한 희망인 황극린은 이미 집을 나서고 있었다.
“화, 황 대협!”
황극린은 어느샌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뇌불이 광견살검에게 손을 얹은 채로 말한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내 좋은 장소를 알고 있단다.”
* * *
“비 노인이 그만뒀다고?”
“예, 가주님. 봉급을 삼 할 더 올려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만뒀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황씨 가문이 운영하는 금황상가는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규모가 크다. 당연히 상가에 근무하는 인력이 상당히 많았지만, 비 노인이라면 황씨 가문의 가주인 황천옹도 알고 있었다.
황씨 가문의 하인으로 시작하여 약초 검수의 일까지 그는 40년 동안 황씨 가문에서 봉사해 왔었다. 그리 오래됐으니 당연히 가주가 모르는 게 이상하다.
물론, 그만뒀다고 하여 아쉬워하거나 하진 않았다.
상가를 운영할 땐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한다.
황천옹이 보고를 올린 총관에게 행동 방향을 알려 준다.
“젊은 놈들로 한번 키워 봐라.”
“예,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리고 어제 입찰했던 맹가장(孟家莊)의 장원 말입니다. 어젯밤 추가 입찰자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맹가장.
적어도 30년 전에는 남창제일가라 불리며 세력을 과시했던 가문이었다. 당시의 황씨 가문은 맹가장의 눈치를 보며 일감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었지만, 그런 규모의 가문이라도 망하지 않는 건 아니다.
몰락의 시작은 무공 수련에는 관심도 없는 맹도렬이 장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부터였다.
흥청망청 유흥에만 돈을 쏟아부으니 가문의 충신들이 떠나갔고, 수익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아끼질 않으니 30년이라는 세월에 그만 무너져내렸다.
결국 가문의 마지막 자산인 장원을 팔아야 할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남창 중심부에서 가장 노른자 땅이라고 할 만하다. 장원의 크기는 황씨 가문의 장원보다 작았지만, 관도를 앞에 두고 있고 주위로 수많은 종류의 점포가 한데 모여 있으니 위치가 참으로 좋았다.
급매로 내놓은 물건이니만큼 사 놓기만 해도 이득이다. 황씨 가문이야 여유가 있으니 적절한 구매자가 나타나면 팔면 되는 노릇이고, 정 안되면 황씨 가문이 사용하면 된다. 황씨 가문의 목표는 중원 제일의 상가를 노리는 것인 만큼 계속 규모를 키워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경쟁자?
비록 장원이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왔다고 해도 남창 일대에서 당장 그 물건을 매입할 자금력이 있는 세력은 없을 터인데? 거기다 이미 황씨 가문이 눈독 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찌감치 포기한 이들도 많았다.
“어디인가? 제검상회인가?”
“제검상회는 아닌 듯합니다. 정오에 다시 온다고 했으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됐다. 내 직접 가도록 하지.”
상가주의 권한과 총관의 권한은 다르다.
직접 가서 담판을 짓는 것이 빠르리라. 감히 어떤 놈이 금황상가의 행차에 훼방을 놓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돈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지.’
세상에서 돈과 같이 강력한 힘을 지닌 물건은 없었다.
황씨 가문은 남창에서 가장 돈이 많은 가문이다.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았기에 융통할 수 있는 금자는 일부에 불과하나… 그것만으로도 남창의 다른 중소형 상단이나 가문들을 압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금력으로 상대가 안 되니 맹가장의 장원에 다른 이들은 입찰하지 않은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맹가장에 입찰한 것을 보아하니 다른 현에서 온 뜨내기가 분명하다.
남창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금자 이천 냥을 준비해 놓아라.”
“이, 이천 냥 말씀입니까?”
장원에 적정한 시세를 매겨 보라면 금자 삼천 냥 이상은 되었다. 하지만 보통 장원을 팔려면 짧게는 한 달이고 오래 걸리면 몇 년이 걸려도 팔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황천옹이 장원 매입 비용에서 최대로 생각한 것이 2천 냥이다.
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장원도 제값을 주고 판매할 수 없었다.
맹가장의 지리적 위치나 장원 건축물들의 가치를 살피면 최소 3천 냥은 된다. 다만, 지금 당장 남창에서 바로 2천 냥 이상을 지불할 세력은 없다. 금자로만 2천 냥 이상씩 쌓아 놓는 이들이 어딨겠는가? 돈은 굴리면 굴릴수록 커지기 마련이기에 대부분 다른 곳에서 회전시키고 있었다. 금황상가나 되니 바로 2천 냥을 지불할 수 있다.
당연히 이번 싸움에서도 금황상가는 승리할 것이다.
강서성에서 규모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고는 황천옹은 이기는 싸움만 해 왔었다. 뜨내기 놈이 금자 2천 냥을 실은 수레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기대되는군.’
* * *
드르르윽.
말 두 마리가 끄는 휘황찬란한 수레.
좌우로 수십 명의 호위가 들러붙어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맨 앞에서는 금황상가의 상가주인 황천옹이 금으로 뒤덮은 부채를 휘두르며 여유롭게 나아가고 있다.
“와, 뭐야? 저 수레에 든 거 혹시 돈 아니야?”
“동전이려나?”
“야야, 저런 수레에 동전을 채웠겠냐? 당연히 은자겠지!”
“허어, 은자라고……? 수레가 저렇게 큰데?”
남창의 백성들이 죄다 몰려와 구경한다.
가끔 한번씩 황씨 가문이 어떤지 보여 줘야 백성들의 입방아에도 오른다. 막대한 자산을 가졌다는 인식은 사업을 번창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상가는 가진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물건을 유통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된다.
강서성 제일의 부가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 이번의 목적이었다.
“어이쿠, 직접 오셨군요, 황 상가주님!”
장주가 된 지 30년 만에 맹가장을 말아먹은 장본인 맹도렬.
가문의 소중한 자산인 장원을 팔아먹는데도 온갖 진귀한 장식품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무가(武家)의 장주라는 게 무색하게 걸을 때마다 뱃살이 출렁이는 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실까요?”
“그럽시다.”
맹가장의 장원으로 들어간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지저분한 느낌이 강했지만, 조금만 관리해 줘도 금방 과거의 우아함과 품격을 되찾을 만한 가치의 장원이었다. 장원의 가격을 올리려면 일단 장원의 수리부터 하면 되리라.
‘우물을 더 넓게 파고… 주위의 조경을 더 신경 쓰면 괜찮겠구나.’
황천옹의 생각으로는 이미 맹가장은 황씨 가문의 자산이나 다름없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금황상가에 장원을 팔아 버리려고 했는데, 어젯밤에 한 청년이 와서 금자 천 냥을 제시하지 뭡니까?”
처음 금황상가가 맹도렬에게 제시한 금액은 금자 600냥.
거저먹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입찰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바로 금자를 지급해 주는 조건으로 맹가장의 장주 맹도렬은 만족하고 있었다. 다른 입찰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다.
그는 장사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비싸게 장원을 팔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군요. 그 청년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듯하군요. 그래서 말인데, 금황상가에선 얼마까지 쳐 줄 수 있는지…….”
황천옹이 부채를 탁 접는다.
그리고 근엄하게 말한다.
“금자 이백 냥을 더 드리지요.”
무려 금자 1,200냥!
당연히 수레에 담아 온 2,000냥 전부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을 가져온 이유는 부를 과시하면서도, 상대 입찰자를 압박하기 위함이 컸다. 아마 휘황찬란한 수레를 보자마자 자신감을 잃을 게 분명하다.
“음, 그렇군요.”
그런데 왜인지 맹도렬이 시큰둥하다.
무려 금자 200냥을 올려 줬으면 큰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에…….
시세보다 훨씬 쌌지만, 그래도 장사치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금자 600냥에 꿀꺽할 수 있었던 장원을 두 배나 비싸게 주고 사니 왠지 손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올려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황천옹은 뭔가를 눈치챘다.
맹도렬이 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청년이 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미 도착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1,200냥보다 더 비싼 가격을 이미 불렀으리라.
“천사백.”
“……!”
이제야 맹도렬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오오, 역시 황 상가주님의 배포가 상당하십니다.”
피식.
황천옹은 승리를 직감했다.
정체불명의 입찰자 놈은 아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시지요. 총관.”
“예, 상가주님!”
기다렸다는 듯이 두 장정이 탁상을 가져왔다.
총관이 그 위에 계약서를 올려놓는다.
“으응? 계약서를 벌써 꺼내십니까? 아직 다른 입찰자가 가격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아마 그 입찰자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떠났을 겁니다.”
황천옹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금자가 잔뜩 든 수레를 옮기는 것에서부터 승리의 쐐기를 박은 것이다.
“1,700냥.”
“……?”
황천옹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간다.
키가 훤칠한 한 청년이 평범한 무복을 입고 장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오. 오셨군요, 황 소협!”
황 소협이라고?
같은 황씨였기에 황천옹이 눈살을 찌푸린다.
‘대체 어디서 온 놈이지?’
금자 1,700냥을 바로 지출할 수 있는 곳은 당장 남창에 없었다. 제검상회는 최근 기루를 짓는다고 융통할 금자가 없을 것이며, 다른 가문에선 굳이 장원을 구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리라.
“어쩌시겠습니까, 상가주님?”
얄밉다.
중간에서 돈을 더 받으려 애를 쓰는 맹도렬. 30년 만에 맹가장을 말아먹은 망나니 놈이 기뻐하는 게 짜증이 났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황천옹을 열받게 하는 사람은 황 소협이라 불린 놈이다.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길러서는… 그놈이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1,800냥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바로 황 소협이라 불린 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격을 제시한다.
“1,900냥.”
기세에서 밀릴 수 없었다.
여기서 자금력으로 밀린다면 금황상가의 자존심이 뭉개진다.
“2,000냥입니다.”
그 이상은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황천옹이 최대로 생각했던 예산을 불렀다.
‘더는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채 의문의 청년을 바라보는 황천옹.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의 입이 열린다.
“2,500냥.”
“……!”
상대는 무심한 목소리로 무려 금자 500냥을 더 올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