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천상의 맛
“이건 어떻습니까?”
“아니야.”
“이젠 괜찮지 않습니까?”
“이 맛이 아니라니까.”
“이건…….”
“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다.”
무림공적.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대마두.
소림의 파계승.
뇌불은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황극린이 떠난 지도 이미 1년이 지나갔다. 그는 비동에서 빠져나와 비 노인과 그의 손자 비청하와 함께 작은 민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좋았다.
목 아래가 마비되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눅눅한 이끼와 벽면을 타고 흐르는 비린내 나는 물뿐이었다. 적어도 속세에선 그딴 음식 같지도 않은 것은 안 먹어도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의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황극린이 직화로 구워 준 고기. 거기에 발린 기묘한 양념!
천상의 맛이라며 뇌불이 극찬할 정도로 그것은 진미 중 진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가 그리워진다. 황극린이 비 노인에게 양념장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고 갔다는데 왜인지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고 싹수없는 놈이 해 준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속세에 나왔기에 당시의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간에 뇌불은 시큰둥했다. 며칠 전에는 남창의 유명한 반점에도 다녀왔지만, 딱히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입맛이 달라진 것일까?
왜인지 술도 끌리지 않는다.
뭐, 뇌불이 취할 정도로 마시려면 비 노인의 재산을 전부 탕진해야 가능할 것이다. 싸구려 술은 뇌불의 입에 맞지 않았으니까.
‘비청하 저놈도 가르치는 맛이 있긴 한데…….’
움찔.
뇌불의 시선에 비 노인의 손자 비청하가 작게 몸을 떤다. 몸을 회복한 것은 좋았으나 뇌불의 가르침은 참으로 혹독했다. 과거에 절맥증을 앓아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뇌불은 비청하를 마구 굴려 댔다.
그 결과 1년 만에 상당히 빠르게 성장했지만, 뇌불이 보기엔 모자라기만 했다. 황극린은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 뚝딱 혈풍뇌전신공의 5성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황극린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이긴 했지만,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떠날까?’
몸도 꽤 많이 회복됐겠다.
전성기 수준은 아니더라도 무림에서 그를 상대할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황극린에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
“청하야.”
“예, 사부님.”
“너도 이제 강호를 경험해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
비청하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뇌불은 괴팍한 사부였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림에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하나, 그렇게 되면 은공께 피해가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도 된다. 무림공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강호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건…….”
“얼른 강호에 나가서 실전 경험도 쌓고! 엉? 강호행을 나간 김에 여인도 좀 만나…….”
“전 은공께 은혜를 갚을 때까지 여인을 만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허허, 쓸데없는 것에는 참 자존심을 내세우는구나. 네가 목숨값을 갚으려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래서 더더욱 다른 곳에 한눈팔 생각은 없습니다.”
비청하는 심약하게 보이다가도 특정 부분에선 절대 굽히지 않는다.
특히 황극린에 대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걸 기세였다. 다 죽어 가는 놈을 살려 준 보람이 있긴 하다.
‘황극린 이 녀석이 인복 하나는 좋군.’
강호에서 자신을 따르는 한 사람만 만나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비청하는 지옥이라도 황극린을 따라갈 기세였다. 자신에겐 이렇게 따르는 놈이 있었던가? 그가 만났던 인연들을 생각하면 퍽 가까운 놈들은 있었지만, 비청하처럼 저런 충심을 가진 놈들은 없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네?’
황극린이 비청하의 은인인 것은 인정한다.
근데 자신은 비청하의 사부가 아니던가? 사부의 명을 받드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거늘……!
“사부가 강호로 나가자면 나갈 것이지, 어딜 토를 다느냐.”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강제로라도 끌고 강호로 나가야 한다. 황극린이야 어딜 가든 소문을 몰고 다닐 것이 뻔하다. 소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당장 떠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사부님, 그건……!”
“어허,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황극린 고놈도 네가 강호로 나서길 기대할 것…….”
그때였다.
집 앞에 세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떡하니 섰다. 그걸 본 뇌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설마? 혹시?
“다 쓰러져 가는 민가로군. 대체 여기는 왜 왔…….”
험악하게 생긴 중년 사내가 마부석에서 툴툴대며 내린다.
“뭐, 뭐야! 이 미친 노인네가! 깜짝 놀랐잖아!”
순식간에 달려 나온 뇌불과 마부석에서 내린 사내가 눈이 마주친다.
‘미친 노인네?’
순간 과거의 성격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아 낸다. 지금 중요한 건 더럽게 생긴 사내놈이 아니다. 마차 안에 누가 있느냐. 그것이 뇌불에게 가장 중요했다.
꿀꺽.
뇌불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떠나긴 어딜 떠난단 말이오?”
“극린아!”
저도 모르게 황극린을 안으려 했던 뇌불. 그런데 황극린이 뇌불의 포옹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낸다. 뇌불이 볼썽사납게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놈 보게……?’
방금 황극린이 보여 준 움직임.
굳이 비유하자면 고양이의 반사 신경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뇌불 또한 작정하고 달려든 것은 아니었지만, 혈풍뇌전신공 5성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자신의 포옹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황극린은 너무도 쉽게 뇌불의 포옹을 피해 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설마 내가 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건가?’
그런 의문도 잠시.
황극린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으니 뇌불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몸은 회복했지만 왜인지 황극린 이놈의 시선만 마주하면 작아지는 기분이다. 왜일까? 왜 그런 걸까?
“오늘 저녁은 없소.”
“……!”
뇌불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비동에서의 끔찍했던 기억! 그는 수련하는 황극린에게 자꾸 말을 걸어 가며 외로움을 달래려 했었다. 하지만 저녁은 없다는 말에 초라했던 과거가 떠오르며, 목 아래가 다시 마비되는 것 같았다.
피식.
그런 뇌불을 보며 황극린이 입꼬리를 올린다.
“뭐, 딱히 변한 건 없군. 오랜만이오.”
그런 황극린의 미소에 뇌불의 경직된 몸이 스르르 풀린다.
‘그래, 구원받았었구나.’
왜 그리도 황극린의 고기와 양념이 그리웠던가?
그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극린이라는 소년의 재능과 노력을 보며 주화입마를 치료한 기억. 그것은 뇌불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껏 무림에서 뇌불이 누군가를 신뢰하고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있으랴? 황극린이 고기를 사러 나간 사흘 동안 뇌불은 지옥을 경험했었다.
그 기억은 비동을 나와서도 계속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난… 이놈이 보고 싶었던 게로구나.’
황극린이 만든 양념장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비 노인이 만든 음식에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는 그 양념장에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맛있게 느껴졌던 것이 분명했다.
* * *
“미미(美味)! 천상의 맛이다! 바로 이 맛이야!”
사실 추억 때문에 황극린제 양념이 맛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가 직접 구워 준 고기와 버무린 양념은 확실히 무언가가 달랐다. 뇌불은 눈물을 주르륵 흘려 대며 황극린제 양념장을 바른 고기를 씹고 있다.
긴가민가하며 지켜보던 광견살검 구자광도 맛을 보더니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놀린다.
“이 맛은 뭐지? 무언가 친숙한 맛인데……? 왜 손을 멈출 수가 없는 거지?”
구자광과 뇌불이 경쟁하듯 고기를 흡입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젓가락이 같은 육포를 집었다.
구자광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뇌불을 노려본다.
“영감님,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이만 젓가락을 내려놓…….”
콰지지지직-!
“끄어어억-!”
뇌불은 진심으로 뇌전의 기운을 끌어 올려 젓가락을 무기로 삼아 방출했다. 직선으로 뻗은 뇌전의 기운이 구자광을 감전시키고 있다. 그는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켰고 입에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차올랐다.
밥상머리에서 누가 공격하리라 예상했겠는가?
물론,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쉬이 막아 낼 뇌불의 뇌전이 아니긴 했지만…….
“이 버릇없는 꼬맹이 놈은 누구냐?”
“광견살검 구자광이오.”
“광견살검? 별 웃기는 별호도 다 있군.”
“우, 웃기지 않…….”
감전된 와중에도 말을 내뱉은 구자광을 보며 뇌불이 피식 웃는다.
“그래도 강단은 제법 있군. 수하냐?”
“아직은 아니오. 나보고 내 사부가 되겠다고 쫓아온 놈인데, 나한테 패배하여 일단 비무 상대로 데리고 다니는 중이오.”
순간 뇌불의 젓가락질이 멈춘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잔뜩 솟아나 있었고, 눈동자엔 살의가 일렁거린다.
그의 사나운 기운에 백씨 형제와 비청하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세 사람이 쉽게 넘기기엔 몹시도 무거운 기운이다.
“감히 내 제자를 뺏으려 했다고……?”
“그만하고 드시오.”
“큼큼, 알겠다.”
황극린의 말에 따라 뇌불이 다시 젓가락을 놀린다.
물론, 광견살검이라는 버릇없는 놈을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황극린이 보고 있지 않을 때, 확실하게 버릇을 고쳐 주어야 했다.
‘이 몸이 직접 네놈을 개과천선시켜 주도록 하마!’
순간 뇌불의 사나운 시선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 구자광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뇌불이 이제는 백씨 형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저 두 아이는 또 누구냐?”
“제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뭣이? 네가 제자를 받았단 말이냐?”
황극린제 양념이 발린 직화 구이를 즐기던 비청하도 젓가락을 멈춘다.
그의 시선이 백건악을 향했고, 백건악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에 이미 직감했다. 서로가 같은 사람을 모신다는 것을 말이다. 황극린을 향한 눈빛만 봐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더 은공께 도움이 될 것이다!’
‘주군을 모시는 건 나다!’
파지지짓-!
두 사람 사이에서 강렬한 시선이 교차되었고, 백온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을 뿐이다. 형들이 왜 저리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걸까?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무공을 알려 줬을 리는 없을 테고.”
“한령심법이오.”
“…대체 네놈은 정체가 뭐냐?”
한령심법은 이제는 멸문한 천산파(天山派)의 무공이었다. 뇌불 정도나 되니 한령심법이 천산파의 무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요즘 무인들은 한령심법이 어디의 무공인지도 모를 것이다. 대체 이놈이 한령심법을 어떻게 알고 가르친단 말인가?
‘무림에서 기연이라도 얻은 건가? 아니, 한령심법 따위를 극린이 놈에게 기연이라 할 수는 없겠지……. 저 두 형제 놈이 계 탔군.’
뇌불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백씨 형제가 흠칫한다.
주군 황극린에겐 왜인지 힘을 못 쓰고 있지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조금 전만 해도 강호백대고수라는 광견살검을 일격에 제압했지 않은가? 물론, 광견살검이 먹을 것에 정신을 팔려 있었다고 한들, 괴팍한 노인의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소.”
“…….”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흠칫한다.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설마 이놈이 또다시 보모 노릇을 하게 할 셈인가? 제법 기세가 갖춰진 두 형제였지만 황극린의 곁에 있기란 부족하고, 또 부족한 놈들이다. 황극린이 무림에서 뭘 하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린 두 형제가 감당하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제안은 뇌불의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문파 하나 만들 생각 없소?”
“뭐라고?”
“거창한 문파를 만들 생각은 없소. 다만, 무림에서 돌아갈 보금자리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말이오.”
보금자리라고?
“당신이 장문인직을 맡으면 되오.”
“내가 장문인을 하라고? 나는…….”
콰지지직-!
“끄아아악! 왜, 왜 또……! 꾸엑!”
뇌불의 뇌전에 당한 광견살검이 멱 따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는다.
백씨 형제는 황극린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낄 수 있다. 비청하와 같은 부류로 황극린을 지옥 끝까지 따를 아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광견살검은 다르다.
아직 놈의 눈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다. 만약 자신이 뇌불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무림맹에 정보를 팔아넘기기만 해도 막대한 포상금을 챙길 수 있으리라. 아무리 뇌불이 몸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고 한들, 정파 무림 전체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일단 놈을 기절시켜 버렸다.
“무림공적인데?”
“……!”
백씨 형제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들 또한 황극린의 밑에서 무공을 배우며, 강호란 어떤 곳인지 알음알음 배워 가고 있었다. 무림공적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당금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구파일련과 육대세가가 모두 적이라는 말이었다.
꿀꺽…….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 않소?”
“뭐라?”
“이번에 무림에서 당신에 대한 것을 알아보았소. 정파 무림은 당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더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뇌불의 자존심이 상한다.
과거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려 버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뇌불이 활동하지 않은 기간이 무려 20년이 넘는다. 대부분 그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며, 나이가 들어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그가 대놓고 뇌불이라 밝히지 않는다면 정체가 탄로 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도 혹시 모르지 않느냐? 내 정체를 알고… ‘그놈’들이 온다면…….”
“뭐가 걱정이오?”
“……?”
“무림이란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곳이오. 당신이 예전의 무위를 완전히 회복하고 ‘우리’ 문파가 세력을 키운다면 아마 쉬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오.”
“우리 문파라고……?”
뇌불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황극린과 함께 문파를 만든다면 이놈이 영영 떠나 버리는 것도 방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비청하를 데리고 무림에 나가려고 한 것은 이놈이 대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문파를 만들면 황극린은 얼마나 시간이 흐르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가 직접 만든 요리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뇌불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한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비동에서는 ‘그냥’이라는 이유로 넘어갔지만, 문파까지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있으리라.
“네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대체 무엇이냐?”
모두가 황극린의 입을 주목한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비청하나 백씨 형제는 따를 것이다. 이미 그에게 받은 은혜는 목숨이다. 갚으려면 똑같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
황극린은 작게 웃으며 말한다.
“사람처럼 살고 싶소.”
사람처럼……?
뇌불은 황극린의 말을 당장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황극린을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 삶이 어떠했는지 알아야 한다.
아버지가 살라고 했기에 숱한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황씨 가문에서 버텼다.
흑살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황극린은 버티고 또 버텨 생존해 왔을 뿐이다. 과거의 삶에서 그의 ‘선택’과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 마련해 놓은 길을 목숨을 걸고 나아갔을 뿐.
황극린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살수처럼 감정을 모두 제거한 채로 명령만 받아 원한도 없는 사람을 죽이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을 죽이려면 원한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사람이 아니던가?
이번 삶에선 감정이 따르는 대로 살아가고 싶었다.
비동에서 뇌불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은 이유. 주먹밥을 가져다준 비 노인의 손자의 절맥증을 치료해 준 이유. 용비문의 채무에 시달리던 백씨 형제를 도와준 이유.
효율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기저엔 황극린의 인간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하라면… 말살해야 할 놈들이 있긴 있소.”
“말살?”
과연 누굴까?
황극린에게 원한을 산 미친놈들이 말이다.
“먼저 흑사회.”
“흑사회라고?”
뇌불 또한 흑사회를 알고 있었다.
바퀴벌레처럼 질긴 생존력을 가진 놈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뇌불이 활동할 때보다 세가 더 커졌으리라. 하지만 황극린의 목표가 고작해야 흑사회일…….
“그리고 흑살문.”
“……!”
흑살문은 전성기의 뇌불이라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 집단이었다.
애초에 살수들은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 치졸하게 암습만 해 오니 상대하기가 영 까다롭다. 그것뿐 아니라 흑살문은 무림에서 세력을 양분하는 사흑련에 속해 있는 초거대 문파였다.
그렇기에…….
“끌끌끌, 흥미롭구나……. 참으로 재밌어!”
그래, 황극린이라면 고작 흑사회 따위가 목표일 리가 없었다.
흑살문 정도는 되어야 진짜 목표라 할 만하다. 뇌불은 황극린의 배포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 막 무공을 배운 세 꼬마 놈들과 도모할 꿈은 아니긴 했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뇌불은 확실히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좋다! 이 뇌불께서 친히 문파를 맡아 주도록 하마!”
황극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