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자가 돼라
강호백대고수.
강호에선 순위를 나열하기 좋아한다. 누가 누구보다 더 높이 있는지 판단하고, 소문과 진실을 결합하여 자기네들끼리 순위를 정한다. 그 순위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백대고수 안에 들어갔다는 건 실력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드넓은 무림에서 백 명 안에 들어갔다는 건 그만큼 많은 업적을 세웠다는 것이었으니까.
수많은 무인과 싸우면서 실력 또한 증명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대고수 모두가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무공 실력으로는 분명히 인정하더라도 강호의 명숙 대접은 받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광견살검(狂犬殺劍)처럼 말이다.
47세의 나이로 초절정의 경지에 접어든 광견살검 구자광. 그는 중원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은 받지 못하고 있다. 잔혹한 손속과 더러운 성질 때문에 매번 사고를 쳤다. 그런데도 아직 무림맹의 척살령이 내려지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출신은 정파였지만 사파인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구자광은 광견살검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었다. 한번 검을 뽑으면 피를 보아야 멈출 수 있었으며, 술을 마셔도 피가 흐른다. 그가 뭘 하든, 어디를 가든 피가 흐른다. 그렇기에 그는 광견(狂犬)이며 살검(殺劍)이었다.
그런 광견살검은 최근에 꽂힌 게 있었다.
번듯한 제자를 구하는 것. 이제 그도 나이를 먹으니만큼 홀로 살아가는 것에 지쳤다.
아니, 제자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항주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 금홍각. 그곳에서 사부와 제자가 화목하게 같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제자는 사부를 하늘같이 섬겼으며, 사부는 이따금 훈육을 핑계로 매를 든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제자는 사부를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 사부는 제자를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수 있다. 대신에 제자가 되는 놈은 광견살검을 강호백대고수로 만들어 준 무공을 배울 수 있으니 상부상조가 아니던가?
하지만 광견살검은 평범한 제자를 두고 싶진 않았다.
눈치도 빠르고, 무공에 재능이 있는 놈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광견살검의 마음에 드는 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놈들은 광견살검의 손속에 버티지 못하고 하루 만에 도망쳤으며, 또 어떤 놈들은 광견살검이라는 별호를 듣자마자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그래서 찾은 곳이 흑사회의 노예 시장.
소문으로는 거기에 재능이 출중한 놈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막상 찾아가 보니 생뚱맞게 동려대협이라는 놈에게 당해 멸문해 있었다. 동려대협의 나이가 몇인지 모르겠지만 공동에 널려 있던 시체를 보니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놈이 제자가 되면 무공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니까 더 편하지 않겠는가?
사부가 있다고?
그럼 뺏으면 되지 않은가.
그런 마음으로 동려대협을 찾아보았지만, 당연히 그를 만날 순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황극린이라는 놈을 뒤쫓았다.
단리세가의 도련님을 패 버렸다는 소문을 들어 보니 성격도 자신과 잘 맞을 것 같았다. 소심한 제자 놈은 곁에 두면 오히려 자신이 답답할 것이 분명했다. 하루라도 빨리 괜찮은 제자를 구하고 싶은 생각에 광견살검은 개방에서 정보까지 사서 황극린이 삼두마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늦게 쫓기 시작했지만, 초절정 고수에게 마차를 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마차를 발견한 건 강서성의 여강(余江)현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구자광은 제자가 될 놈이니만큼 어떤 성격인지 알아보자는 마음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마차를 따라갔다. 자신을 보면 당연히 잔뜩 움츠러들어 본성격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저 멀리 마차가 멈춘 것을 보고, 구자광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변이라도 누러 가는 건가?’
구자광은 딱 앉기 좋은 바위를 발견하고 엉덩이를 걸쳤다.
‘지금이라도 그냥 마차에 같이 타 버릴까?’
저들이 거절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지. 조금만 더 참아 보자. 한 번 뽑을 제자는 신중하게 정해야지.’
몇 번의 실패를 겪어 보니 이젠 제대로 된 제자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사고를 많이 쳐도 척살령이 내려지지 않은 건 그래도 넘어야 할 선은 넘지 않았으니까다. 단리세가 직계의 이를 왕창 뽑았다고 하던데, 고놈 때문에 코가 꿰어 자신도 무림공적이 되어 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단리세가 놈을 쉽게 제압한 것을 보면 실력은 있다는 말이니 성정이 어떠한지만 알아보면 된다.
느긋하게 마차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쉬이잇-!
“……!”
바람을 가로지르는 파공성이 울린다.
초절정에 이른 감각이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숱한 강호 경험을 쌓아 온 광견살검이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캉!
“큭.”
정확히 미간을 노리고 온 비수.
어찌나 힘이 실려 있는지 검으로 막아 냈는데 손바닥이 아린다. 내공을 사용했다면 더 수월하게 막을 수 있었겠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팔의 힘으로만 비수를 막았다.
‘비수? 대체 어떤 놈이?’
쉬이이익-!
쉬익!
또다시 비수가 날아든다.
광견살검은 이제는 완벽히 내력을 운용하며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철과 철이 부딪치는 굉음. 광견살검이 주위를 살폈지만, 어떤 기척도 감지할 수 없었다. 초절정에 오른 그의 감각을 속일 수 있다고? 분명히 비수까지 던졌는데?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갑자기 멈춘 마차. 동시에 날아오는 비수. 설마 지금 비수를 던지고 있는 놈은…….
“황극린이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비수가 대답이라면 답을 준 것이다.
이번에 날아오는 비수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는다.
“합!”
어찌나 급했던지 구자광의 검엔 회색빛의 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비수를 막는 데 검기까지 방출해 버렸다.
“이 개새끼가! 비겁하게 비수만 던지지 말고 모습을 보여라!”
비수가 날아온 방향.
나무가 우거진 쪽을 바라보며 외친다. 그러자 나무 뒤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구자광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것을 보니 오싹함이 더해진다. 인간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경우가 없다. 호랑이와 같은 맹수 놈들이 푸른 눈동자를 넘실거리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저 눈동자는 대체 뭐지?’
의아함도 잠시.
구자광이 살의를 뿜어낸다. 먼저 자신에게 검을 겨눈 놈들을 살려 둔 경우는 없었다.
“죽고 싶은 게냐?”
“죽일 수는 있나?”
“뭐……?”
“왜 쫓아오는 거지?”
황극린은 조용히 구자광을 응시했다.
비수를 몇 번 던져 본 것으로 실력은 거의 파악했다. 최소한 초절정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순식간에 검기를 뽑아내는 것을 보면 검기를 다루는 데에도 익숙한 고수였다. 검을 다루는 것을 보면 쾌검을 익힌 것 같았다.
하나, 풍겨 오는 냄새는…….
‘청아하군.’
황극린의 초감각은 정밀함을 늘려 갔다.
제갈세가에서의 진법 통과 훈련을 거치고, 항주에서는 명상하며 초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방면을 생각했다. 또한, 백씨 형제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치며 느낀 것이 있었다.
‘내공에는 냄새가 깃든다.’
황극린이 207호라 불렸던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감각이다.
내공에 냄새가 있다? 만약 과거의 황극린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개소리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한 황극린의 감각은 내공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검기와 같이 기가 유형화되어야만 느낄 수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내공심법은 도사들의 냄새와 비슷하군. 하나, 검의 궤적은 사특하다.’
도사들의 검은 대부분 정직하다.
정직함에서 변화를 창출하며 현묘함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방금 사내가 보여 준 검로는 실전에서 체득한 것이 분명했다. 다섯 개의 비수를 던지고 황극린은 사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네놈, 설마 황극린?”
“날 아나?”
“알다마다! 단리세가의…….”
쉬이이익!
또다시 비수가 날아온다. 이제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카앙! 캉! 캉!
“날 죽일 셈이냐! 이 미친 새끼야!”
광견살검은 자신이 외친 소리가 평소에 자신이 듣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비수를 던져 대는 놈은 처음 보았다. 거기다 비수를 받아치고 있으니 놈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 개자식아! 그만 던져!”
황극린으로선 마차를 따라오는 사내가 미친놈이었다.
“단리총운의 복수를 하러 왔나?”
“내가 왜!”
아니라고?
이제 제대로 ‘살기’를 담아 비수를 던지려 했던 황극린의 손이 잠깐 멈춘다. 당연히 그의 말을 믿은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널 따라온 거다! 육대세가 놈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를 왕창 뽑아 버린 행동력! 실력! 그것을 보고 따라온 것이다! 네놈,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
단리총운은 이가 뽑힌 이유가 있었다.
뭐,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이 저놈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제자라고?”
“그래, 이 광견살검께서 친히 너를 선택했다. 제자가 되면 나의 무공을 가르쳐… 이 새끼가 또 던져? 대화할 생각이 없냐!”
구자광은 광견살검이라는 별호에 은근히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광견살검이라는 별호를 모르는지 바로 비수를 던져 댔다.
‘멍청하군.’
황극린이 보기에 광견살검은 제자라는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비수를 받아 보면 실력이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때 황극린 머릿속에 불현듯 한 기억이 떠오른다.
‘멍청하면서… 광견살검이라. 분명히 들어 본 적이…….’
황극린이 입을 열었다.
“구자광? 곤륜파의 무맥을 이은 건가?”
“그걸 어떻게! 이노오옴! 네놈은 누구냐!”
황극린이 207호로 활동하던 시절, 명견살검(名犬殺劍)이라는 별호를 들어 본 적이 있다.
과거엔 분명히 마두 뺨치는 성정으로 강호에 악명을 떨쳤지만, 어느 순간부터 젊은 놈의 말에 따라 말 잘 듣는 개처럼 행동한다고 하여 그를 조롱하는 별호라 할 수 있다. 당사자는 그 별호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뭐, 별호라는 건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황극린은 저울질을 하며 생각했다.
이놈을 어떻게 해야 이득일까?
잘 구슬리면 말 잘 듣는 명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황극린이 그의 별호를 들었을 때는 그나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
‘일단 패 볼까?’
미친개를 다스리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매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초절정의 고수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로군.’
초절정.
사실 강호에서 경지의 구분이란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절정의 고수와 초절정의 고수의 차이는 검기를 더 잘 다루느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검기를 더 잘 다룬다고 하여 더 강한가?
아니다. 애초에 무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살수 출신인 황극린에게 큰 의미는 없다.
살수의 기술을 배운 이들은 검을 제대로 찌르는 법만 알아도 절정에 이른 고수도 죽일 수 있다. 상대가 방심할 때까지 기다리고 심장에 검을 박아 넣으면 절정의 고수는 죽는다. 고수라 불리는 이들도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경지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건 아니다.
초절정이라 불리고, 강호백대고수의 반열에 들어간다는 건 기본적인 실력은 갖추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살수의 대결이 아니라 정면 대결이라면… 이제까지 싸워 본 적 중 가장 강하다. 애초에 강한 적과 마주한 적이 없었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살수의 방식으로 끝장을 냈기에 제대로 싸워 본 적은 없었다.
“괜찮군.”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 어이, 네놈! 내 말을 들은 거냐! 이 새끼가!”
파지지짓! 순식간에 황극린이 거리를 좁힌다. 동시에 검지 하나를 펼치고는 그의 미간을 노리고 있다.
“……!”
역시 초절정에 이른 고수인가.
놈은 황극린의 기습적인 공격을 피해 냈다. 손가락은 그의 미간에 닿지 못했다.
하지만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으윽……!”
미간을 스친 순간, 황극린의 손가락에서 방출된 뇌전이 광견살검의 피부에 닿았다.
‘토, 토할 것 같다……!’
머리가 어지럽다.
먹었던 것이 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것 같았다. 뇌전은 상대의 피부를 녹이고 감전시키는 것만이 무기가 아니다. 약간의 뇌전이라도 머리에 침범하게 되면 큰 효과를 낳는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지만, 광견살검은 곤륜의 절기 중 하나인 태청기공(太淸氣功)의 기운으로 뇌전을 겨우 몰아냈다.
“이 새끼가!”
구자광이 회색빛의 검기가 넘실거리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것을 본 황극린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