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인연
흑사회.
대부분 항주의 백성은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만 있었다. 밤중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흑사회의 표적이 되어 납치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두려움. 물론, 흑사회는 아무나 납치하여 노예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지부가 항주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흑사회의 항주지부가 완전히 궤멸했다는 소문이 말이다.
반신반의.
대부분 백성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흑사회가 누구인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한 채 문파를 운영하며, 악랄하기로는 중원에서 최고라 불리는 놈들이다. 흑사회 지부를 건드리는 것은 흑사회 전체에게 싸움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직하게 복수하지 않는다.
몰래 적을 미행하고, 그들의 음식에 독을 타거나 밤중에 자객을 보내는 둥··· 추잡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 복수는 상대가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흑사회는 무서웠다. 구파일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작정한다면 흑사회를 소탕할 수도 있겠지만··· 흑도 세력 하나를 궤멸시키는 것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사흑련에게 빌미를 주는 것이기에 그들도 함부로 흑사회를 치지 못했다.
제대로 그들을 치기 위해선 흑사회의 중심인 본부부터 끝장내야 한다.
굳이 어느 하나의 지부부터 끝장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상식적으로 항주의 지부 하나만 끝장냈다는 소식은 쉬이 믿기 힘든 종류였다.
하지만 시일이 지난 후.
양씨 포목점의 직원들이 모두 실종됐다는 소문이 퍼지고, 포목점 바닥에 지하 공동과 연결된 통로가 있다는 게 밝혀진 이후···.
흑사회 항주지부가 전멸당했다는 사실이 진짜였다는 게 밝혀진다.
무성하게 소문만 떠돌았던 것이 알고 보니 진실이었던 것이다.
“대체 누가 흑사회를 전멸시킨 걸까?”
“모르지. 구파일련 중 하나가 아닐까? 아니면 육대세가···.”
“그렇게 높으신 분들이 항주의 흑사회까지 신경 쓰려나?”
“그런가···.”
주점, 주루, 기루, 객잔.
어디를 가더라도 흑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대체 어떤 협객이 이런 일을 벌인 걸까? 흑사회의 악명은 평범한 백성들도 안다. 오히려 저 높이 군림하는 구파일련보다 훨씬 피부에 와닿는 것이 흑사회였다. 여러 후보군이 거론되는 와중에 ‘동려대협’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은 우연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동려의 사파 문파인 용비문도 하루아침에 멸망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용비문?”
“그 왜 있지 않은가? 금자 한 냥만 빚져도 몸을 팔아도 갚지 못할 만큼 빚을 불려버리는 사파 문파가 말인가? 흑도나 다름없는 놈들이었지.”
흑도와 사파의 차이가 무엇인가?
사실 그 경계는 애매하다. 흑도 문파가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우면 자신들을 정통 사파의 문파라 칭하며 무림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흑도들은 보통 뒤가 구린 행동을 많이 하기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내 목을 걸고 확신하네! 이것은 동려대협의 협행이 확실해! 내 동려에서 왔다가 오지 않았는가? 동려대협은 악행을 눈으로 보면 참지 못하는 분으로··· 아마 용비문과 흑사회가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항주로 온 것이 분명하다네!”
동려를 자주 왕래하는 상인 중 하나가 자신감이 가득 찬 채로 말한다.
사실 정말로 동려대협이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백성들은 그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딱딱 들어맞지 않는가? 용비문이 멸문한 것이 거의 두 달 전이다. 거기서 항주까지 와서 흑사회를 전멸시켰다면 시간의 흐름이 딱딱 들어맞는다. 거기다 동려대협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천하의 대협객이 아니던가?
실제로 동려대협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에 관한 추측과 소문은 더 무성하게 커질 뿐이었다.
보름이 지난 후.
흑사회를 전멸시킨 협의지사는 동려대협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가문에서 전혀 나서지 않고, 무공만 수련하던 한 여인의 귀에도 들어갈 만큼 커졌다.
서문세가의 직계이자 가주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서문취아에게도 말이다.
“동려대협이라고요?”
본래 그녀는 협객의 협행을 듣는 것을 좋아했었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순수했던 그녀.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인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가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하는 협객들도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우의 본모습을 보았다.
가면 속에 숨겨진 추악한 본능. 인간의 마음이 어디까지 악독할 수 있는지 몸소 체감했다.
황씨가문의 장남 황보휘.
그리고 그의 사촌 동생 황극린.
그녀는 평소 황극린을 칭찬했던 황보휘가 황극린을 왜 비무 대회에 참가시켰는지 알게 되었고, 가문에서도 황극린이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인간을 불신하게 되었다.
저 사람은 웃음 뒤에 어떤 악의를 감추고 있을까?
자신은 모르는 악행을 펼치고 있진 않을까?
그런 의심은 그녀에게 ‘번뇌’로 다가왔다.
매일 항주 저잣거리를 떠돌며 해맑게 인사하던 그녀는 사라졌다. 물론, 어두침침하게 가문에만 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자 무공을 선택했다.
오늘도 자신만의 연무장에서 종일 수련을 하다 나온 서문취아가 들은 첫 마디는 동려대협에 관한 것이었다.
“흑사회가 멸문이라고요?”
“어,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시녀 두 명이 밝게 서문취아에게 인사한다.
그녀는 서문세가에서 시녀들이나 하인들의 인사까지도 성실하게 받아주고, 심지어는 같이 수다까지 떨 정도로 우월감이나 격의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가장 친했던 친우의 추악함을 봤음에도 그녀의 착한 심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으응! 안녕하세요! 근데 동려대협이 누구예요?”
“아, 들으셨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시녀들이 특유의 수다 본능을 발휘하여, 용비문에서 있었던 일과 최근 항주에서 벌어진 흑사회 지부 전멸 사건을 생동감있게 전달했다.
서문취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흥분한 상태로 동려대협의 협행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와! 정말 대단해요···! 무림에 그런 대협객이 있다니! 거기다 항주에서!”
“호호, 지금 항주는 난리에요. 동려대협의 진짜 정체가 남궁세가의 대공자인지 독고세가에서 출가한 장남이 아닌가 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더라고요.”
“으음, 남궁 오라버니···.”
“참, 공녀님께선 남궁세가의 대공자님을 보신 적이 있었죠?”
하지만 서문취아는 쉬이 남궁세가의 대공자가 동려대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전형적인 정파인이었다.
무공도 몹시 뛰어나고, 천성이 정의로웠다. 하지만 그는 몰래 흑사회를 전멸시킬 위인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동려대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진 않을 것이다.
“남궁 오라버니는 아닌 거 같아요.”
“역시 그렇죠? 거봐,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시녀 중 한 명이 동려대협은 남궁세가의 대공자라 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찔린 표정으로 황급히 화제를 돌린다. 공녀님이 앞에 계신 데 동려대협이 남궁세가의 대공자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
“참, 단리세가의 셋째 도련님께서 항주에 오신 것을 알고 계세요?”
“단리세가? 셋째? 아! 단리총운 오라버니 말씀하시는 거예요?”
“기억하시네요. 호호.”
두 시녀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다.
“무슨 일인데요? 단리 오라버니가 왜요?”
서문세가의 시녀들 사이에서 단리총운은 쓰레기 중 쓰레기다.
음흉한 눈빛으로 여인들을 훑어보는 것은 기본이고, 식솔 전체에게 사랑받는 서문취아에게 대놓고 껄떡대는데 좋아하는 이가 어딨으랴? 거기다 대외적인 소문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단리세가의 셋째 공자님이 천목 의방에서 난리를 치다가 무명의 무인에게 걸려 된통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무명의 무인이요?”
단리총운은 최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게 조용히 있었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발 없는 말과 같이 순식간에 퍼지곤 한다. 단리세가의 셋째가 까불다가 맞았다는 이야기는 꽤 많이 퍼져 있었다. 물론, 동려대협의 등장으로 그 소문을 언급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시녀들이 신이 나서 서문취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사실보다는 단리총운이 어떻게 의방에서 까불다가 얼마나 추하게 얻어맞았는지가 이야기의 주요 핵심이었다. 백성들은 정파인들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주변에 깔린 흑도 문파나 사파 문파를 직접 처리하지 않는 것을 보며 불신하는 이들도 많았다. 단리총운이 흑도인이나 사파인은 아니더라도, 꽤 통쾌한 이야기였다. 단리세가의 배경을 앞세워 다른 백성을 핍박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단리총운의 이야기가 막바지로 향할 무렵.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누구라고요···?”
서문취아의 표정이 볼만했다.
동려대협을 이야기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다.
“네? 황극린이라고···.”
“정말 황극린? 황극린이요?”
“네···.”
“지, 지금 어딨어요? 그 아이는 어디···.”
아이라는 말에 두 시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이라고? 분명히 단리총운에게 세상의 쓴맛을 알려준 사내는 20대 중반이라 했다.
“아마 착각하신···.”
“저, 가봐야겠어요!”
서문취아가 단번에 달려나간다.
“어, 어디로 가세요! 공녀님!”
급하게 달려가는 와중에도 서문취아가 대답한다.
“천목 의방이요!”
* * *
“도련님! 도련님!”
이제 막 잠이 들려고 하던 차에 자신을 부르자 단목총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웨!”
비천대주가 성난 단리총운의 목소리를 듣고 찔끔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최근 비천대주는 단리총운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비천대주라며 단리총운은 남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황극린이라는 놈에게 당한 울분을 풀고 싶었으니까.
비천대주는 억울하긴 했지만, 단리세가에서 살아가려면 그의 비위를 철저히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좋은 소식을 들려주러 왔다.
“서문세가의 공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라!”
우당탕!
단리총운이 빳빳하게 다림질을 해놓은 백의를 차려입고 금방 방에서 나온다. 사실 그는 서문취아를 찾아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이가 반절이나 빠져버린 상태에서 그녀를 찾아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기에 최근까지 천목 의방에서 요양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찾아왔다?
이거 혹시···?
“갑시다.”
분노는 어디 갔는지 단리총운이 밝은 미소를 띤 채로 비천대주에게 말한다.
‘됐다!’
만약 여기서 서문세가의 공녀와 단리총운이 이어진다면, 비천대주에게로 향하는 도련님의 악의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직감한 비천대주가 황급히 단리총운을 모셨다.
“취아야!”
두 사람은 어릴 적에는 꽤 많이 보았었다.
절강성의 서문세가와 안휘성의 단리세가. 두 가문 다 육대세가엔 들지 못했지만, 중원에서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는 명가 중 명가였다. 지리적 위치도 가까웠으니 직계들끼리 교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 서문취아는 단리총운에게도 순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단리 오라버니시군요?”
“으응?”
왠지 차가운 말투. 서문취아는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다. 다친 곳은 어떻냐며 먼저 다가와서 위로해줄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취아야?”
문득 떠오른 가정.
설마 서문취아는 자신을 보러온 것이···.
“취아야?”
그때 천목 의방주 백초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주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요즘은 통 모습을 보이지 않더구나.”
과거엔 천목 의방에 자주 들른 서문취였다. 하지만 그녀가 강서성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가문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었다.
“죄송해요. 무공 수련에 집중하느라 방주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었네요.”
“껄껄, 괜찮다. 무인이 수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오늘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더냐? 설마···.”
백초의은이 옆에 선 단리총운과 비천대주를 바라본다.
이미 치료는 끝냈지만, 아직도 천목 의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취아가 두 사람을 만나러 온 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서문취아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건 단리총운도 마찬가지였다.
“황극린··· 그 아이··· 아니,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요?”
만나고 싶어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왜 힘을 숨겼는지.
자신의 특이한 옷이 사라진 것과 그가 떠난 것이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니, 사실 그것은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
그냥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아이?”
“······!”
“도, 도련님!?”
백초의은이 ‘아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고.
단리총운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다.
“황 소협께선 이미 항주를 떠나셨다네.”
“······!”
서문취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조금만 더 빨리 오지 그랬느냐?”
* * *
그리고 이 시각, 항주를 떠난 황극린.
천목 의방주에게 구매한 의술 서적을 마차 가득 채우고 강서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이었다.
‘뇌불, 그 영감은 몸을 회복했으려나?’
모르는 일이다.
쉽게 회복될 것은 아니긴 하나··· 어쩌면 뇌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황극린이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본다.
누군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마차를 따라오고 있다. 황극린의 초감각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항시 발동되고 있었다.
“얼굴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