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는 우연
흑사회(黑死會).
흑도에서도 악질이라면 첫 번째로 꼽히는 놈들이다.
분명히 그들의 규모는 거의 사파라 불릴 만한 수준이었지만, 세력이 키워 더 악랄한 짓들만 골라서 하는 곳이 흑사회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 사람을 노예로 판매하는 것은 기본적인 수입원이라 할 만큼.
흑살문으로 납치되다시피 했던 황극린.
그가 가장 많이 보았던 동료들이 흑사회에서 팔려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치 가축처럼 행동했다. 백건악은 흑사회로 팔려갔었다가 흑살문으로 왔었지만, 흑사회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지만··· 몇몇 이들은 완전히 정신이 망가져서 일상적인 판단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뭐, 적당히 훈련만 시키면 혈고독의 존재가 없더라도 완벽히 명령만 수행하는 살귀가 만들어지니 흑살문 입장에선 수고를 줄이는 방식이었으리라.
하지만 황극린은 놈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모든 악을 처단하겠다는 정의감 따위는 당연히 아니다. 과거 흑살문에게 조종되어 평생을 살았던 기억.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처단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과거로 돌아왔을 당시엔 생존이 중요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황극린에겐 흑사회의 지부 따위는 전멸시킬 힘이 있었다.
‘천목 의방에서 재료를 구해봐야겠군.’
그는 인면지주의 머리에서 뜯어낸 사람 얼굴 형태의 가죽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사람의 얼굴처럼 틀이 갖춰져 있었기에 피부색을 동일화하고, 얼굴에 맞닿는 부분을 처리하면 된다.
당연히 인피면구는 만능이 아니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라면 들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람을 잠깐 속이는 데에는 이만한 물건도 없었다. 본래라면 가죽으로 인간의 얼굴 형태를 본뜨는 것만으로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미 형태는 갖추어져 있었기에 적당한 수준의 인피면구를 만드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부의 색과 동일화하는 작업을 거치고, 안면에 딱 맞게 재봉하는 데에는 꽤 비싼 염료와 약재가 들어갔지만 황극린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보름 동안 적절한 수준의 인피면구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걸 얼굴에 쓴 채로 항주 중심가에 위치한 양씨 포목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흑사회의 항주지부였다.
* * *
어둠 속.
엄폐물 뒤에 숨어 경계 임무를 서던 흑사회의 살수들이 하나둘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거미가 사냥감을 추적하듯 황극린은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사뿐사뿐 어둠 속을 거닐었다.
슥.
묵철로 만든 비수가 정확히 목 뒤의 급소를 노려 또 한 명의 살수의 생명이 끊어진다.
처음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무 명 중 열 명이 죽어버리니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
흑사회의 살수 한 명이 눈앞의 동료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붉은 광채를 발하는 무언가와 눈을 마주친다.
“침···!”
침입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순식간에 쇄도한 비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쿵!
이제껏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사냥하던 황극린. 이제 그의 움직임에 소리가 담겼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건, 속도를 최대한 줄였다는 말이다. 작정하고 달리기 시작한 황극린은 이제 사방으로 비수를 던져댔다.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빼꼼히 고개를 쳐들던 살수들은 비수에 뇌과 꿰뚫려 즉사했다.
도망치려는 놈들은 황극린의 주먹에 머리통을 부서졌다.
겁 없이 덤비는 놈들도 있었지만, 이미 기세는 황극린에게 넘어왔다. 20명에 달하는 흑사회의 살수들이 죽는 시간은 고작해야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황극린은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사람이 죽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름 전, 천목 의방에서 만났던 단리총운이 그의 뺨을 맞고 죽지 않은 것은 그의 맷집이 좋았던 게 아니라 황극린이 손속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바깥과 단절된 공동이니 피비린내가 공동을 가득 메운다.
목줄에 묶인 이들이 잔뜩 겁에 질려 벽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그들을 풀어주는 건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서다.
아직 흑사회의 지부장이 남아 있었다. 포목점을 관리하던 노인.
그가 바로 흑사회의 지부장이었다.
* * *
‘으음.’
가끔 사람은 오감을 초월한 ‘직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보통 상품들을 고를 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오늘은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만약 거래가 성사됐으면, 지하 공동과 연결된 종이 세 번 울려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거래가 진행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사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파악했다. 피를 부르는 늑대가 어디를 말하는지 지부장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더욱 이상하다. 흑살문에서 온 이들은 보통 노예들을 오랫동안 구경하지 않는다.
땡- 땡-
지하와 소통할 수 있는 종 작은 틈으로 진동을 전달하여 여기서 종을 치면 안에서도 들을 수 있다.
‘뭐지?’
그런데 호출 종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지하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지부장 지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하로 통하는 철문으로 향한다.
“······.”
철문을 내려다보던 지부장.
잠시의 고민을 마치고 철문을 연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철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매일 기름칠을 했기에 철이 마찰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
비수가 지부장의 심장을 관통했다.
객관적인 실력으로도 황극린은 흑사회 항주지부장을 능히 압도한다. 하지만 황극린은 방심은 하지 않았고, 기회가 있을 때 바로 지부장을 죽여버렸다. 그에게 얻을 정보? 그딴 것은 없었다. 흑사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황극린은 망설이지 않고 지부장을 죽였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들고 지하 공동으로 되돌아갔다.
* * *
덜덜덜.
모두가 겁을 먹은 채로 황극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 아무리 흑사회에서 고문받아 정신적으로 개조됐다고 하더라도 본능을 지울 순 없다. 황극린 또한 흑살문에서 살수화 과정을 거쳤지만,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황극린은 그들을 지나쳐 부지부장 춘일에게로 향핬다.
손과 발이 포박된 상태로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그의 옆에는 심장이 꿰뚫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지부장이 죽은 채로 누워 있었다.
“갇혀 있는 게 좋다고 했었지.”
“사, 살려주십시오!”
어떤 대답을 하는진 중요하지 않았다.
황극린은 그를 어떻게 처벌할지 이미 정했다.
“대인···!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가 사육하던 노예들처럼, 철창 안에 갇힌 부지부장 춘일.
“넌 여기서 평생 놀고먹으면 된다.”
“······!”
황극린이 철창 안에 지하 공동에 널려 있던 인간의 소변과 배변을 모아 그에게 던져주었다.
“네가 부럽군.”
“개, 개자식아아아! 내, 내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렇게 살고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나?”
“······!”
황극린이 아니더라도 춘일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인과응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흑도에서 살아가다보면 더 악랄한 놈에게 당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황극린의 존재로 춘일은 예정보다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 뿐이다.
“반성하지 마라. 어차피 네가 갈 곳은 지옥일 테니.”
“누, 누구냐! 네놈은 대체 누구···!”
“날 동려대협이라 부르더군.”
동려대협이라는 말에 몇몇 노예들이 깜짝 놀란다.
그들 중 일부는 용비문에서 노예각서를 작성하고, 이곳에 팔려온 이들도 있었다. 지하 공동 안에 갇혀 있었지만 흑사회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용비문이 멸문했다는 것도 들었다.
저 사람이 바로 동려대협···.
황극린은 조금 전까지 노예였던 이들에게 몸을 돌렸다.
“당신들은 이제 노예가 아니오.”
“······!”
“알고 있을 것이오. 자유라는 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말이오. 난 당신들을 책임지지 않소.”
구해주려면 끝까지 구해줘야 하지 않나?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한 이들도 있었다. 인간이란 간사한 동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등품’이라 불리며 철창에 갇혀 있던 이들 중, 부지부장의 살점을 씹어먹겠다고 선포했다던 사내 교특범이 앞으로 나선다.
“저희를 노예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내겐 노예가 필요하지 않소.”
조금 매몰찬 말이었지만, 황극린은 굳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저들의 일생을 평생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흑사회의 금고를 털어 노잣돈 정도는 챙겨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황극린은 정의를 위해 흑사회를 부수러 온 것이 아니다.
그가 행동한 이유는 복수 때문이었다.
저들은 백씨 형제와는 달랐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절도있게 포권 지례로 예를 표한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예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뭐, 황극린에게 그의 출신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들, 은인한테 인사도 하지 않을 겁니까?”
황극린은 행동을 보고 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부지부장이 그를 완전히 굴복시켰다고 했었지만, 그는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이곳을 탈출하려 했을 것이다.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굴복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철창 안에 갇힌 춘일이 발광한다.
“개 같은 노예 새끼들아! 얼른 나를! 나를 꺼내란 말이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다 교육방에 쳐넣어 줄까!”
이제껏 노예처럼 살아온 이들이 공포에 눈을 내리깐다. 춘일은 오히려 자신감이 붙었는지 미친놈처럼 더 괴성을 질러댄다.
교특범이 황극린에게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묻는다.
“제가 조용히 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교특범이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당연히 정면으로 싸우면 교특범이 춘일에게 패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부지부장은 손과 발이 굵은 밧줄로 포박되어 있었다.
“모두 잘 보십시오. 이놈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퍽! 퍽!
“크억! 이 새끼가 감히! 죽고 싶으! 어억!”
퍽! 퍽! 퍽! 퍽! 퍽!
철창 안에서 노예로 살아왔기에 그리 힘이 실린 주먹질은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팔을 휘둘렀다. 이가 부서지고 코뼈가 부러졌는지 피가 한웅큼 쏟아지고 있다. 결국 춘일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제, 제발··· 그만···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이제야 교특범의 주먹이 멈춘다.
그는 주먹질을 멈추고 노예로 갇혀 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깜짝 놀란 눈으로 교특범과 춘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
교특범에 말에 노예였던 자들이 몸을 작게 떨었다.
이제까지 그들의 얼굴엔 공포와 두려움만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춘일이 살려달라고 말을 할 때까지 교특범이 주먹을 휘두르자 다른 감정도 떠올랐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기쁨까지 말이다.
‘우두머리가 될 자질을 가졌군.’
교특범은 한 번의 행동으로 노예로 살아왔던 이들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뭐, 아직 완벽히 극복하지는 못했겠지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제 이름은 교특범입니다.”
교특범···.
황극린의 머릿속엔 그런 이름은 없었다. 뭐, 이런 자질을 지녔다고 무림에서 무조건 명성을 떨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과거엔 흑사회의 노예로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흑살문에 팔려오진 않았다.
“은인,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구해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면 황극린은 교특범에게 실망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그런 억지스러운 요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가 감옥에 갇혔던 이들을 이끌어도 되겠습니까? 적어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말입니다.”
“저들을 이용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그리고 포목점의 돈은 모두 사용해도 좋소.”
흑사회의 지부에선 노예를 판매한 돈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다.
노예를 판매하면 바로 본부로 돈을 보낸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 하더라도 무림에 적이 워낙 많았으니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이들이 가진 돈은 포목점을 운영할 자금뿐이리라. 황극린은 굳이 그것까진 취하지 않았다.
그는 흑사회 지부 하나를 전멸시켰으면 만족했다.
“언젠간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시오.”
황극린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이 인연이 얼마나 이어질진 모르겠으나 미래는 속단할 수 없었다.
“포목점 주위로 잠복한 흑사회의 살수들은 내가 모두 처단했소. 허나, 혹시 모르니 얼른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시오.”
“예, 은인. 감사합니다.”
황극린이 떠나간다.
“가, 감사합니다!”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은인!”
절망과 공포에 물들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감정을 담아 황극린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 * *
얼마 뒤.
스걱!
두꺼운 철창이 손짓 한 번에 갈라졌다.
“사, 살려줘···.”
피부가 노랗게 변질된 사내가 힘없이 말한다. 움직일 힘도 없는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게 전부였다. 그는 흑사회의 항주지부 부지부장이었던 춘일이었다.
“넌 누구냐?”
“흐, 흑사회··· 하, 항주지부··· 부지부장···.”
“누구한테 당한 거지?”
죽립을 눌러 쓴 사내가 묻는다.
공동에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의 상처를 보았다. 한 번에 한 명씩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람을 죽였다.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훈련받은 놈의 소행이다.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놈에게 흑사회의 항주지부가 전멸당한 것이다.
“도, 동려대협···.”
동려대협이라.
사내가 들어본 적은 없었다. 허나, 이제부턴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깔끔하게 사람을 죽이는 놈이 ‘대협’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사, 살려···.”
“쯧, 괜찮은 노예가 있는지 보러 왔더니 썩은 채 죽어가는 놈만 남았군.”
“어디서 오셨··· 제가 고급품을···.”
본능적으로 장사하듯 말하는 춘일이다.
그런 춘일을 보며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정확히 춘일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기공의 활용이 극의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흐음, 내 제자가 될 놈은 중원 어디에 있으려나?”
사내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공동에 죽어 있는 살수들을 보며 다시금 감탄한다.
“이런 놈을 제자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말이지. 아, 이 정도 실력이면 이미 사부가 있으려나? 사부가 있으면 뺏어버리면 그만이긴 하지만···.”
뭐, 됐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온 흑사회였으니 딱히 실망감도 없었다.
단지···.
‘동려대협이라··· 언젠간 보고 싶긴 하군.’
대협이라 불리는 놈이 이런 귀신같은 솜씨를 가졌다.
강호의 인연이란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언젠간 마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