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 포목점
백씨 형제가 배울 심법은 한령심법(瀚靈心法)이었다.
황극린이 흑살문에 있을 시절 얻게 된 심법으로 천하제일을 다투는 절세의 심법은 아니었지만, 정순한 기운을 차곡차곡 모아 깨달음을 얻어가며 수련하는 도가 계열의 무공이었다. 이 무공은 중원에서 절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었기도 했고, 벌모세수를 끝내고 깨끗한 세맥을 가지게 된 두 형제가 익히기 적합한 무공이기도 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초반의 성장은 느릴지 모르겠으나 기세를 타기 시작하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만약 황극린이 뇌불의 무공을 얻지 못했다면 한령심법을 차선책으로 두었던 심법이니 만큼 확실히 괜찮은 무공이다.
물론, 아무리 좋은 무공심법을 배우더라도 재능이 떨어진다거나 노력이 부족하면 소용이 없는 노릇이긴 하다.
“가부좌를 틀고, 기(氣)가 흐르는 곳을 기억하라.”
“예, 주공!”
“네, 주공님!”
두 사람 다 잔뜩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다. 먼저 백건악의 등에 손을 댄다. 황극린의 기운이 백건악의 세맥에 흐르기 시작한다. 기혈과 혈도의 세부적인 위치를 모두 가르치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느리다.
두 사람은 감각이 예민하니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게 좋으리라.
“읍···!”
간질간질한 기운이 세맥을 통해 흐르자 백건악이 몸을 떤다.
“집중해라.”
“······!”
“태극원전(太極圓轉) 대방무우(大方無隅)···.”
황극린이 구결을 불러주며 기운을 움직인다.
한 시진이 지나자 백건악의 몸에 땀이 뻘뻘 흐르고 있었다.
“기억했느냐?”
“예.”
“그럼 네가 직접 기를 움직여보아라. 내가 도와줄 터이니.”
“예, 주공.”
극도로 집중력을 발휘한 백건악.
내공심법을 익히기 전, 그 위험성에 관해 황극린에게 미리 들은 상태였다. 내부에서 순환하는 기운을 까딱 잘못 다루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등에 올려진 황극린의 단단한 손길에 안심이 된다. 주공이 뒤에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공이 뒤에 있기에 더더욱 실수하면 안 된다.
나약한 수하를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주공이라 부르고 있지만, 황극린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진짜 수하가 되는 것은 한 사람분의 몫을 할 수 있을 때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다.
황극린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즈으으···.
황극린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백건악이 세맥 내의 기운을 움직인다. 호흡으로 들어온 자연의 기운이 세맥을 거치며 조금씩 한령심법의 기운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자연의 기운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하셨지···.’
집중하고 있으니 문득 황극린이 마차에서 해주었던 말이 기억난다.
결국, 내공심법이란 무한한 자연의 기운을 호흡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고기를 먹고 몸집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정확히 따지자면 조금 그 의미가 다르긴 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 중요했다.
백건악이 ‘기’에 관한 이해가 높아지자 대주천의 속도가 빨라진다.
‘역시 재능이 있군.’
초심자가 단전을 만들 때는 몇 번이고 대주천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백건악은 한 번이면 충분히 하단전을 만들 수 있으리라.
“······!”
세 시진이 지난 뒤.
백건악은 자신의 아랫배에 무언가가 똬리를 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매일 세 시진 이상 운기행공을 하며 내력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급하면 안 된다. 빨리 쌓는 것보다 정확히 기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위주로 운기행공을 해야 한다.”
“예, 주공!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은 백온후.
‘형아는 바로 만들었구나···.’
잔뜩 긴장하며 움츠러든 백온후의 어깨를 펴주는 황극린.
“자세를 바로 해라.”
“네···!”
“시작하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온후가 눈을 번쩍 떴다. 혹시나 동생이 실수할 수도 있을까 봐 걱정하며 지켜보던 백건악이 의아함을 느꼈다. 동생이 눈을 뜰 때, 눈동자에 무언가가 번쩍인 느낌이다. 기분 탓인가?
황극린은 백온후에게도 무심하게 말했다.
“백건악과 함께 운기행공을 해보도록. 오늘은 내가 지켜봐 주겠지만, 다음부터는 홀로 해야 하니 확실히 기억해야 한다.”
“예!”
“네!”
두 백씨 형제를 보며 황극린이 생각한다.
‘묘연골이라 했던가···.’
백온후는 백건악보다 반 시진이나 빠르게 단전을 만들었다.
인면지주를 취한 황극린 수준은 아니더라도 백온후의 감각은 상당히 뛰어났다.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꽤 높은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겠어.’
뭐, 백건악의 재능도 역시 나쁜 편은 아니다.
감각은 떨어질지 모르겠으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근골을 단련하여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백온후가 기초 체력 훈련을 할 때, 그는 내공심법만 열심히 익히면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엔 누가 더 뛰어날지 궁금하군.’
결과를 예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리라.
* * *
항주 중심가에 있는 포목점.
바깥에서 볼 때는 지극히 평범하게 보인다. 인상 좋은 중년인이 성실히 내부를 청소하고 있었으며, 간간이 손님이 방문하여 옷감을 구경한다. 장사가 엄청 잘 된다고 할 순 없었으나 항주 중심가에서 꽤 오랫동안 자리를 잡았기에 꽤 단골도 있는 양씨 포목점.
그 포목점에 서늘한 인상을 가진 30대 초반의 사내가 방문한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옷감을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잠시 노인을 바라보던 사내가 작게 고개를 젓는다.
“흑색 비단옷을 주문제작 하고 싶소.”
“흑색이라··· 몇 벌이나 주문하시려고 하십니까?”
“마음에 든다면, 여유가 되는 대로 전부.”
“허허허, 오랜만에 배포가 큰 손님이 오셨구려. 춘일아! 귀한 손님이 오셨다!”
“예이!”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안에서 튀어나온다.
“자, 이리로 오시지요!”
사내는 춘일이라 불린 사내를 따라 포목점 안으로 들어간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그런지 내부가 무척이나 복잡하다. 옷감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기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 밟으셔도 괜찮습니다.”
춘일이 말했지만 사내는 신묘한 발놀림으로 옷감을 거의 밟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가 조심스레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춘일은 대번에 사내가 무림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뭐, 무림인이 포목점에 방문하는 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양씨 포목점에 방문했다는 건 확실한 목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포목점 내부 끝에 도달한 춘일이 몸을 돌린다.
인심이 좋아 보이던 미소는 어느샌가 사라진 상태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피를 부르는 늑대.”
“······!”
피를 부르는 늑대라는 말에 춘일이 흠칫 몸을 떨었다.
손님 중에서도 가장 극진히 모셔야 하는 이들이다.
“인사드립니다. 항주지부의 부지부장입니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는 됐고. 물건을 보고 싶은데.”
“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춘일이 바닥에 마구 널브러진 옷감을 양쪽으로 치운다.
그러자 한기가 묻어나는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문의 끝에 작은 구멍에 열쇠를 놓고 돌리니 부드럽게 문이 열린다. 문의 두께를 보아하니 힘으로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춘일의 안내에 따라 사내가 뒤를 따른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진다. 동시에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이곳을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귀한 손님이시다.”
춘일의 말에 시선이 모조리 사라진다.
“자, 이리로.”
계단을 타고 지하의 바닥에 도달했다.
사내가 주위를 살핀다. 곳곳에 설치된 등불이 공동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등불 아래엔···.
“······.”
철로 만든 목줄을 매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한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군데군데 대변을 바닥에 지린 이들도 있었지만, 서로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목줄에 묵인 사람을 구경하던 사내가 작게 말한다.
“상태가 좋진 않군.”
“하하, 죄송합니다. 최근 용비문이 동려협객인가 하는 놈한테 당해서 망해버렸지 않습니까? 아, 대인께서는 용비문을 모르시려나? 아무튼, 그놈들이 꽤 질 좋은 노예를 공급해줬었는데 망해버려서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고급품들이 있습니다. 구경하시겠습니까?”
“고급품들을 보고 싶군.”
“예. 이리로 오시지요.”
공동의 중앙에는 작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니 의외로 잘 정돈된 감옥이 나왔다. 마구잡이로 목줄에 묶여 있지도 않았고, 그나마 넓은 철창 안에서 작은 자유를 만끽하는 노예들이 있다. 그들의 눈빛은 확실히 살아있었지만, 그렇다고 반항심이 섞여 있진 않았다.
몸 곳곳에 새겨진 흉터들로 왜 이들이 온순한지 예상할 수 있다.
“혹, 수컷을 찾으시는 것이지요?”
“둘 다.”
“오, 그렇군요.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성깔은 제법 있는 놈들이었지만, 본회의 지속적인 관리로 충심을 깨우친 놈들입니다. 제가 ‘짖어’라고 하면···.”
왈왈왈!
사람이 개 흉내를 내며 짖기 시작한다.
부끄러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본능에 새겨진 움직임. 수없이 반복된 훈련으로 춘일이라는 사내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꽤 괜찮은 놈들 아닙니까?”
“그렇군.”
사내는 철창에 다가가서 찬찬히 이들을 살펴본다.
“그놈이 정말 길들이기 어려웠지요. 제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먹겠다고 대드는 꼴이 참 우스웠는데··· 지금은 충실한 종이 되어 있습니다.”
“······.”
사내가 고개를 돌려 춘일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전혀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섬뜩한 느낌이다. 아무리 흑사회 항주지부 부지부장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저놈들은 영 껄끄럽단 말이지···. 살수라 그런지 표정이 정말 살벌하군.’
흑사회가 흑도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악질이라면, 피를 부르는 늑대들이라는 암호를 가진 이들은 중원 전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악질들이었다. 고객으로 충실히 모시고 있으나 솔직히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허리를 숙여 가며 귀빈 대접을 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손님이 왕이지 않은가?
“귀한 손님이시니 한 명당 금자 오십 냥에 드리겠습니다. 다른 곳과 거래할 때는··· 금자 백 냥 정도는 받는 것 아시지요? 하하.”
“네가 직접 이들을 길들였나?”
“예, 당연하지요. 고급품들을 길들이는 건 부지부장의 책임이니까요. 솔직히 그게 제 취향에 맞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하하.”
“네 말을 잘 듣겠군.”
사내의 말에 춘일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이런 부분을 걱정하는 손님들도 분명히 있다.
“아닙니다. 제가 대인을 따르라고 명하면, 대인을 주인으로 모실 겁니다. 그렇게 훈련받았으니까요. 본능에 새겨진 것이죠.”
“그래?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전부 구매하지.”
“······!”
전부 구매한다는 말에 춘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를 부르는 늑대들은 사더라도 괜찮은 한두 명을 사가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전부라고? 고급품의 숫자만 해도··· 14명에 달한다. 금액을 모두 합치면 무려 금자로 1400냥···!
‘크크크, 지부 중 역대 최고 실적을 갱신할 수도 있겠는데? 회주님께서 거한 포상을 내려주실 수도 있겠어!’
꿀꺽, 침을 삼킨 춘일.
사내가 전표를 휙 던진다.
“남은 돈은 네가 가지도록.”
“이, 이게 무슨···!”
무려 금자 2천 냥의 전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이걸 하나로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던가? 역시 ‘흑살문’은 노는 물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명령해라 날 따르라고.”
“옙!”
신이 난 춘일이 바로 입을 연다.
“이 개새끼들아, 이제 저분이 네놈들 주인이다. 그러니 말 잘 들어라.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교육방’으로 보내질 줄 알아라.”
“왈!”
개처럼 대답하는 사람들.
사내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 이제 저놈들은 대인께서 하신 말만 들을 겁니다.”
“그래?”
“예, 한 번 해보시지요.”
“대답해라.”
“왈!”
“개처럼 말고 사람처럼.”
그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예’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헤헤···. 이제 저놈들은 대인의 것입니다.”
“하나만 물어보지.”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넌 저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나?”
왜 이런 질문을 하나?
그런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무려 금자 2천 냥을 지불한 손님에게 다 퍼주고 싶은 마음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게 궁금할 수도 있지 않은가?
“불쌍한 개새끼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희가 거둬주지 않았다면 가난에 허덕여 죽였을 테니까··· 복 받은 개새끼들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흐흐흐.”
자랑스럽게 말하는 춘일.
“그렇군.”
“예,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가끔 아무 고민도 없이 안에서 놀고먹는 저놈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크크크!”
나름의 농이었지만, 사내는 전혀 웃지 않았다.
“참 재밌군.”
입꼬리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면서 재밌다니?
역시 사내가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찰나.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지.”
“예?”
묘하게 낮아진 목소리.
오랫동안 흑도에서 생존해온 춘일의 본능을 자극하는 섬뜩함. 그는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내의 얼굴이 어색하다고 느꼈었지만, 본래 저런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흑살문 출신들은 하나같이 다 비슷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무언가 다른 부분이···!
“이, 인피!”
춘일은 말을 다 내뱉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가 그를 잡아주었기에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팔렸다는 사실에도 철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춘일이 바닥에 쓰러지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내는 그들을 바라보며 검지를 들어 입술을 가렸다.
“쉿.”
황극린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이제 쓰레기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