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수하는 두지 않는다
본래 벌모세수란 상당히 집중을 요해야 하는 시술이었다. 조금만 긴장을 놓아버리고 실수를 하게 되면 시술자나 피시술자 모두 위험해진다. 세맥은 인간이 가진 신체 부위 중 가장 연약하고 예민한 부위였다. 조금만 상처가 생겨도 생명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시술자도 안전한 것은 아니다.
타인의 세맥에 기를 불어넣는 행위 자체가 몹시 위험하다. 기가 역류하여 자신에게 침범해올 경우 내상을 입거나 심할 경우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벌모세수는 반나절은 기본이었다.
비교적 몸집이 작고, 세맥에 불순물이 그리 쌓이지 않은 어린아이일 경우에 그렇다. 하지만 묘연골을 타고났음에도 제대로 관리받지 못한 백온후의 세맥 상태는 심각했다. 이곳저곳 세맥의 불순물이 굳어져서 기운이 순환하는 통로를 거의 막아버렸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 세맥이 필요하냐고?
당연히 필요하다.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정기(精氣)를 품고 있다. 단전에 내공이 쌓이지는 않더라도, 기가 순환하는 세맥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무림의 중에서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자연사하는 이유 중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온갖 불순물로 인한 세맥의 단절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백온후의 세맥 상태는 백초의은이 보기에 심각했다.
반나절은 최소치로 잡은 것이고, 어쩌면 하루 동안 벌모세수를 진행해야 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었건만···.
“고생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벌모세수가 끝났다.
두 시진이 지났을까? 아니, 두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속도도 대단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황극린의 내력은 백온후의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거했다. 마치 벌모세수를 위한 무공을 익힌 것처럼, 그의 기운이 지나가면 불순물들은 그대로 녹아버렸다. 거기다 더 놀라운 점은 세맥에 작은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협님, 정말 감사해요!”
이제 막 벌모세수를 끝냈을 진데, 백온후의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에 활기가 샘솟았다. 그것을 본 백건악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려댔다.
“흐윽···.”
그간 고생했던 모든 것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7살 때부터 현실의 냉혹함에 상처받으며,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강해졌던 백건악. 하지만 그 또한 어른은 아니었다. 단지, 어른인 척하는 아이에 불과했을 뿐이다. 황극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형아! 울지마! 이제 괜찮아! 나 다시는 아프지 않을게! 약조할게! 그러니까 울지마!”
형아에게 달려간 백온후가 그를 감싸 안고 위로해준다.
“······.”
눈물겨운 우애를 보여주는 형제를 보면서도 백초의은은 몹시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벌모세수를 할 때야 진맥을 멈추면 안 되었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제는 물을 수 있다.
“어떻게···.”
백초의은의 목소리에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대체 어떻게 그리도 빠르고 정확하게 벌모세수를 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황극린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제 무공이 벌모세수를 하기에 유리합니다.”
“허어···.”
그런 무공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만약 황극린이 손님이 아니라 같은 의원이었다면 그렇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오늘 일어난 일은 의원 계에서 극의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백초의은도 처음 보는 것이다. 지금도 몸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지만 믿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백초의은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맥에 쌓인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에 특화된 무공···, 대체 그것이 무얼까?
그렇게 백초의은이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을 때.
황극린은 다시 서로 얼싸안은 형제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 또한 벌모세수가 이렇게 빨리 끝날지는 예상치 하지 못했었다.
이리도 빠르게 벌모세수를 끝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의 탓도 있었지만,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여 생겨난 초감각의 영향이 지대했다.
본능적으로 펼친 초감각으로 인해 백온후의 세맥이 전혀 상하지 않게 벌모세수를 끝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꽤 쓸만하겠어.’
초감각을 말하는 건 아니다.
벌모세수를 이처럼 빠르고 쉽게 끝낼 수 있다면,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령···.
‘백건악에게도 해주면 좋겠군.’
병이 걸리지 않았더라도, 세맥에는 계속 불순물이 쌓인다.
백건악은 사실 내공심법을 익히기엔 늦은 나이긴 했다. 명문가의 자제들이 5살 때부터 내공심법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백온후 만큼은 아니더라도 세맥에 불순물이 많이 쌓여 있으리라.
“의원님, 탕약은 바로 지어주실 수 있는 겁니까?”
“예? 아, 예···. 저녁쯤 되면 완성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찾으러 오도록 하지요. 가자.”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고 서로를 얼싸안고 있던 두 형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예, 은공!”
“네, 대협님!”
황극린의 말이 곧 진리라 생각하는 듯한 눈빛.
두 사람은 황극린의 뒤를 경쟁하듯 뒤따른다.
백초의은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꺽···!”
번쩍 눈을 뜬 단리세가의 셋째 단리총운.
청아한 약초 냄새가 코를 간질였지만, 그의 마음은 안정되긴커녕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거기다 몰려오는 극한의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제껏 열심히 익혀온 무공 덕분일까?
용봉지회의 2차 예선을 통과하고, 3차 예선까지 진출했던 실력.
그러한 기본적인 실력이 있었기에 그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대체··· 뭐였지···?’
혼미한 기억 속에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려 한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무자비한 폭력이 자신을 강타했던 것만 기억난다. 대체 어떻게 지척까지 다가왔으며, 멱살을 잡혔는지 알 수 없다.
황극린의 존재는 단리총운에게 천재지변(天災地變)과도 같았다.
“허억··· 허어억···.”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숨이 가빠온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천목 의방주가 단리총운의 상태를 확인하러 방에 들어왔다. 평소 근엄하던 백초의은과는 달리 지금은 왠지 멍한 얼굴이었다.
“깨어나셨군요.”
“다, 다시으!”
깜짝 놀란 단리총운.
순간 방에 들어온 자가 자신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친 그놈인 줄 착각했다.
“후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그런데 뭐가 허전한 것이 느껴진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느낌.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볼과 턱을 만진다. 그리고 단리총운은 자신에게서 무엇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무, 무야···!”
“그분께서 손속을 조절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만약 아니었다면 뼈까지 부서져 상당히 위험했을 겁니다.”
“무스!”
아니, 왼쪽 이가 다 뽑혔는데 이게 다행이라고?
공포로 잠식되었던 마음이 점차 분노로 변질된다. 자신의 안위는 끔찍하게 챙겨왔던 단리총운이다. 그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아버지도 그의 얼굴에 손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갑자기 분노로 이글거리는 단리총운의 눈빛을 보며 백초의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하기야 몇 대 맞고 정신을 차릴 놈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
구제불능.
백초의은도 강호에 있을 적에는 저런 놈들을 많이 보았었다. 저런 이들의 결말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비처대주···! 비처대주르 부러와!”
백초의은은 그에게 깨달음을 줘야 했다.
황극린에게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의방에서 일어난 일은 의방주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가히! 의워 다위가!”
“······.”
주제도 모르고 버럭버럭 소리를 치고 있다.
만약 그의 앞에 있는 것이 황극린이었다면 저리 소리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분명히 쥐죽은 듯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을 게 뻔하다. 내세울 게 출신 배경뿐인 놈들은 하나 같이 강약약강의 태도를 취하곤 했다.
“단리총운.”
맹수의 그것으로 돌변한 백초의은의 눈빛.
애초에 그는 무림인 출신이다. 의원으로 살아가며 온화한 표정으로 살아왔지만, 무림인으로 생존해왔던 본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네놈이 했던 행동을 중원의 모든 의원에게 알릴 것이다.”
“무, 무어?”
“난 인의회(人醫會)의 부회주 직을 맡고 있다. 평소엔 큰 권한은 없다. 하지만 의원들에게 피해가 생긴다면 그들에게 전언을 보낼 힘은 가지고 있지. 단리세가의 직계가 의방에 찾아와서 환자들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말이다. 전언을 받으면 의원들은 단리세가를 배척할 것이다.”
“무, 무스!”
자신이 언제 환자의 목숨을 위협했느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가 빠져 제대로 발음할 수도 없었다.
“단리세가는 분명히 중원의 명가로 이름 높지. 네놈이 아니라 장남의 활약상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네놈처럼 고작 3차 예선에 진출한 것도 아니고, 본선에 진출했었다지.”
왜 갑자기 형님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최근 남궁세가에서 서신을 받았었다. 단리세가의 장남과 남궁세가의 5공녀가 혼약을 했다지? 그 연회에 나는 남궁세가의 손님으로 참석할 것이다.”
“······.”
단리총운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의원 따위가 남궁세가의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서 말할 것이다. 네놈이 의방에 찾아와 고작 일 다경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손님을 협박하여 새치기하려 했던 것을 말이다. 그리고 손님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원에서 무인의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남궁세가···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내, 내가··· 내가 어제!”
“참고로 난 이제는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님과의 연으로 연회에 초대받은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과거 남궁세가의 식솔 중 하나를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남궁세가는 그런 작은 도움도 은혜로 갚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굳이 그것까지 밝힐 이유는 없었다.
“혼약이 깨지면 넌 어떻게 될까?”
그럴 가능성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장남과 단리총운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의원들이 단리세가를 배척하는 것을 알게 되면 또 어떻게 될까?”
“······.”
단리총운의 얼굴이 하얗게 물든다.
정말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단리세가의 후광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유는 그의 뒤에 든든한 단리세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하얗게 질리는 단리총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백초의은이 말한다.
“그러니 그분을 건드릴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왜··· 왜··· 그러게 까지···.”
백초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이리 강하게 말해주는 게 단리총운에게 좋은 일이었다. 벌모세수를 하기 좋은 무공을 익혔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세밀한 기의 제어력이 없다면 벌모세수를 할 수 없다. 일단 기본적인 실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백초의은도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모두 당신을 위해서 말해준 것이오. 절대 그와 싸우려 하지 마시오.”
지금 나이에도 과거 강호 백대 고수 중 하나였던 백초의은을 경악하게 만들 수준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 과연 단리세가라는 이름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거기다 그러한 무공을 익혔으니 황극린의 뒤에 어떤 배경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백초의은이 무심하게 단리총운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단리총운은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벌릴 뿐이었다.
* * *
“느, 느꼈어요! 대협님!”
묘연골의 힘이던가.
백온후가 자신의 형보다 더 빨리 기의 존재를 감지했다. 묘연골로 인해 다시금 세맥에 불순물이 쌓이지 않도록 하려면 그는 내공심법을 익혀야 한다.
“오, 그게 정말이야? 온후야! 정말 대단하다!”
“헤헤헤···!”
당연히 백건악이 백온후를 질투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있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깨질 우애였다면, 이미 백건악은 동생을 버리고 도망쳤으리라. 용비문의 과도한 채무도 백건악의 동생 사랑을 갈라놓지 못했다. 동생이 자신보다 앞서나가는 건 오히려 좋아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백건악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했다.”
“저도 얼른 기를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은공.”
“그래.”
백건악은 이제 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은공의 은혜를 받기만 하고, 의기소침한 모습만 보여주면 은공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는가? 언젠간 그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다짐을 지키려면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 무공을 대해서는 아니 된다.
몇 시진 뒤.
백건악의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황극린에게 받은 벌모세수 덕분일까?
백건악 또한 환희에 가까운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느꼈느냐?”
“예, 은공!”
형제가 동시에 기를 느꼈다.
황극린은 자신의 예상보다 두 사람의 재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사람 앞에 서서 조용히 묻는다. 백온후의 병도 완전히 나았으니 이제는 확실히 정해야 할 때가 왔다.
“너희들은 무인이 되고 싶나?”
“예!”
“아뇨!”
“온후야?”
해맑은 백온후의 대답.
이제 몸 상태가 다시 나빠지지 않으려면 무공을 익혀야 했다. 그런데 왜 아니라고 하는가? 백건악이 당황하여 백온후를 설득하려 할 때.
“전 의원이 되고 싶어요! 만약 대협님이나 형아가 다치면 제가 모두 치료해주고 싶어요!”
“······!”
평소 눈물이 많지 않았던 백건악이지만, 요즘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이 언제 이렇게 커버렸는지···.
“어··· 근데 무공도 익혀야 하나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백온후.
황극린이 작게 미소를 머금는다.
“무공을 익히고 싶으냐?”
“네! 무공도 익힐래요! 대협님이랑 형아를 제가 지켜주고 싶어요!”
“그럼 무림의가 되어라.”
“무림의요?”
“그래. 무림의는 무공과 의술을 동시에 익힌다.”
내공심법을 익힌 무인들은 단전에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기에 평범한 의원들이 치료하기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명문가에서는 전속 무림의를 키우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
“무림의가 되면, 네 형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대협님에게도 도움이 될까요···?”
“그래.”
“와! 저 무림의 할래요! 열심히 할게요!”
당연히 쉬운 것은 아니다.
무공도 익히고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재능이 있더라도 뚝딱 무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뭐, 그래도 의술을 익히면 분명히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황극린은 백온후가 의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너는?”
황극린의 물음에 백건악이 결연한 눈빛을 했다.
“전 은공을 주공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열심히 무공을 익혀 은공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수하라···.
사실 백건악을 도와준 이유는 수하로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는 상황이 달라졌다. 황극린은 홀로 행동하는 살수가 아니었으며, 백건악도 흑살문에서 볼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나약한 수하는 두지 않는다.”
백건악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역시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불과했던 걸까? 아직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는데, 은공을 모신다고 했던 것은 주제넘었던 걸까? 자괴감이 차오르고 있을 때, 황극린이 말을 잇는다.
“그러니 열심히 수련해라.”
“어···.”
“내일 내공심법을 알려주겠다. 오늘은 푹 쉬도록.”
황극린이 평소처럼 무심하게 떠나간다.
“목숨을 바쳐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공!”
백건악이 떠나가는 황극린의 등을 보며 큰절을 올린다.
백온후도 형아를 따라 냅다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주공!”
백씨 형제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황극린이 받아들인 첫 수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