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50화 (50/316)

제가 하면 됩니다

백초의은.

의원답지 않게 기골이 장대하다. 펑퍼짐한 의복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 탄탄한 근육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왼쪽 뺨에 난 검흔까지 보니 평범한 의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황극린은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과거 강호 백대 고수에 오를 만큼 무위가 뛰어났지만···.’

백초의은 또한 내상을 입어 단전을 잃었다.

무인에게 내공이란 생명과도 같다. 내공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순히 경공을 펼치는 것부터 차이가 벌어진다. 절정 고수의 상징이 되는 검기(劍氣)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육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 내공의 유무는 크게 작용한다.

내공을 담고 내지른 주먹과 그러지 않은 주먹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아무리 단련된 육신이라도 말이다. 오히려 단련될수록 내공의 존재는 더 부각된다.

그는 과거 207호처럼 단전을 잃고,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 중원 곳곳을 떠돌았다고 한다. 당연히 깨진 단전을 다시 복구하는 방법은 없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거치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환골탈태를 하려면 내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황극린은 잘 알고 있었다.

내공을 잃어간다는 게 무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기분인지를 말이다.

“의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제 책임이지요. 단리세가와의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황극린이 슬쩍 피가 섞인 거품을 내뿜고 있는 단리세가의 도련님을 바라본다.

쟤가 백초의은의 말을 들을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저런 놈들은 주제도 모르고 덤벼올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왜 살려뒀냐고?

만약 여기서 저놈을 죽이면 단리세가의 권력과 싸워야 한다.

단리세가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철천지원수가 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정말 죽여야 한다면··· ‘살수’로서 그들을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예, 그러시지요.”

의방주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

“단리세가의 손님들을 청심각에 모셔라.”

“예, 방주님!”

하인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들것으로 옮긴다.

“안으로 드시지요.”

황극린과 두 형제는 백초의은의 안내에 따라 의방주의 진료실로 향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머리가 개운해지는 청아한 약초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의방주의 진료실의 한쪽 벽면엔 수십 개의 화분이 있었다. 방 안에서 약초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의방에서 그런 진상들을 모두 제어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황극린의 대답에 백초의은이 작은 미소를 머금는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유명한 의원이라고 해도 무림인들의 횡포를 막아낼 수 없다. 강호는 힘이 가진 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황극린이 대단했다.

의원은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황극린의 목소리가 체구에 비해 얇은 것을 보면,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나이에 단리세가의 직계를 쉽게 제압할 수준의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은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이야, 이리로 와보겠니?”

솔직히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였다.

백온후는 황극린과 형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백초의은에게 향했다.

“손을 내밀어 보렴.”

“네에···.”

“으음···.”

백초의은이 진중한 표정으로 맥을 짚는다.

덩달아 백건악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동려현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몸의 활력을 북돋우는 환약을 지어줬을 뿐이었다.

설마 온후의 병이 백초의은이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쩌지?

“숨을 참아 보겠니?”

“네에.”

“이제 숨을 쉬어도 된다.”

“푸하-!”

쿵쿵쿵.

백건악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친다. 황극린의 초감각은 그런 심장박동마저 느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그는 긴장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온후의 병이 치료되길 바라고 있었다.

일 각에 걸친 진맥이 끝나고.

백초의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병은···.”

꿀꺽.

백건악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없습니다.”

“···예?”

백건악이 멍한 눈을 떴다.

병이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저리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고, 매번 골골대며 기침을 하는데 말이야.

“이 아이는 묘연골(猫軟骨)을 타고났습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백건악이 황급히 묻는다.

동생의 목숨은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 묘연골이 대체 뭐길래 동생을 저리 괴롭혔단 말인가?

“묘연골은 고양이의 신체를 타고난 이들을 말합니다. 강호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체질이기에 아마 대부분 의원은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볼 수 없었을 겁니다.”

백초의은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투는 아니었다.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고 있었을 뿐이다.

“묘연골 때문에 아팠다면··· 그게 병이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묘연골은 축복이지요. 몸을 쓰는 어떤 일이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묘연골을 타고난 이들은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합니다. 더러운 환경이나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거나··· 결정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면 덩달아 몸 상태가 나빠지지요.”

“······.”

백건악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결국 자신 때문에 동생이 아팠던 건가? 빈민가에서의 생활은 온후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해맑은 미소로 형을 안심시켜주었었다.

“그럼 악화된 몸 상태를 회복할 방법은 있는 겁니까?”

백건악의 물음에 백초의은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매일 몸을 청결하게 하고, 채소와 고기를 골고루 먹으면 몸의 상태가 더 나빠지진 않을 겁니다.”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그 말뜻이 무언가? 좋아지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사실 아이의 현 상태라면 병이라 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런!”

분명히 병이 아니라고 했지 않았던가!

백건악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백건악, 더 들어보자.”

“은공, 죄송합니다···.”

힘없이 자리에 앉은 백건악.

평소 감정을 잘 절제했지만, 동생의 일이니만큼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백초의은이 말을 이어나간다.

“확실히 몸 상태를 좋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인가 보군요.”

황극린의 말에 백초의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이 아이의 몸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초절정 고수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

당연히 초절정 수준의 고수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백건악은 놀라지도 못하고, 황극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초절정 고수가 얼마나 강한 건가? 그런데 온후를 치료하는데 왜 고수의 도움이 필요한 건가?

“벌모세수(筏毛洗隨)입니까?”

황극린의 말에 백초의은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대답한다.

“예, 맞습니다. 아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세맥에 쌓인 불순물들이 지속적으로 몸의 기운이 원활히 돌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청결한 생활과 규칙적인 식사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몸 상태가 좋아지려면 벌모세수를 받아야 합니다.”

백초의은의 말에 백건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묻는다.

“초절정 고수라는 건 얼마나 대단한 수준입니까?”

“능히 강호 백대 고수의 반열에 들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백대 고수?

무림인의 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그런 무림에서 백 명 안에 들어간다고?

백건악이 두 주먹을 꽉 쥔다.

대체 어디서 그런 고수를 찾는단 말인···.

“그럼 됐군. 벌모세수만 하면 되는 겁니까?”

무심하게 말하는 황극린.

백건악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은공께서는···.

백초의은이 설명을 덧붙인다.

“백대 고수 중에서도 벌모세수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더 확실합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세맥에 상처가 생겨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인연이 있는 고수를 초청···.”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황극린은 백온후의 맥을 이미 짚어보았다.

무언가 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절맥증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기에 확실히 치료하려는 마음으로 항주의 천목 의방까지 찾아온 것이다.

벌모세수?

확실히 초절정 수준의 고수가 필요하다. 타인의 세맥에 달라붙은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내력을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는 고수가 말이다. 내력의 양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제가 하면 됩니다.”

“예···?”

백초의은이 화들짝 놀란다.

이 사내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단 말인가? 당연히 쉬이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단목세가의 무인들을 제압했다고 해도···.

“벌모세수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기를 북돋아 주는 탕약을 매일 먹어주면 회복이 빠를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공심법을 익히는 게 좋겠지요. 세맥에 불순물이 더 이상 쌓이지 않게끔 말입니다.”

“그렇군요. 조용한 방을 하나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심각한 얼굴을 한 백초의은.

황극린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존중한다. 그는 분명히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벌모세수는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만약 그것이 쉬운 시술이었다면, 무공을 익히는 모두가 내공심법을 익히기 전에 받는 기본적인 시술로 전락했으리라.

그게 어려운 이유는 극도로 세밀한 내력 조절이 가능한 수준의 고수가 인간의 세맥을 모두 꿰고 있으며 기본적인 의술도 갖추어야 한다. 우연히 만난 초절정 고수에게 벌모세수를 해달라고 하면 죽기 십상이었다.

“손님을 절대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경험이 없으시다면 제 입장에선 말리고 싶습니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황극린은 의원이 어떤 마음에서 저런 조언을 하는지 알고 있다.

당연히 기분이 상하거나 하진 않는다.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이 있으시다고요···?”

“예.”

“······.”

백초의은은 쉽사리 그 말을 신뢰하지 못했다.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순간, 백온후라는 아이는 죽을 수도 있다. 그만큼 벌모세수는 위험하다. 아무리 그 효과가 크다고 하더라도 명문가의 모든 자제가 시술을 받는 게 아닐 정도로 부담이 컸다.

“그렇다면 혹여나 시술이 잘못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제가 옆에서 손님을 보좌해도 되겠습니까?”

의원으로서 마지막 양심이었다.

자신의 의방에서 잘못된 벌모세수로 인한 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옆에 있다면,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예, 그러시지요. 그럼 여기서 하면 되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초의은이 밖으로 나가 오늘 진료는 마친다고 말하고, 커다란 침통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꿀꺽, 열린 침통에서 보이는 커다란 침들을 보고 백온후가 침을 삼킨다. 급작스레 펼쳐지는 상황에 긴장한 빛이 역력하다.

“백온후.”

“네에···, 대협님···.”

“긴장하지 마라. 한 시진이면 끝날 것이다.”

대협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백온후가 긴장을 풀고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다.

“네!”

백초의은이 고개를 돌려 백건악을 바라본다.

그는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듯 구석에 서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형제의 신뢰가 정말 두텁구나···.’

하지만 백초의은은 황극린이 거짓말했다는 걸 안다.

벌모세수는 꼬박 반나절이 넘게 걸리는 시술이다. 금방 끝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물론,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백초의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황극린이 백온후의 맥을 짚은 채로 진지하게 말한다.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처음엔 간질간질할 것이며, 아플 수도 있다. 허나, 소리를 낸다면 벌모세수가 실패할 수도 있다.”

“네, 절대··· 절대 소리를 내지 않을게요···!”

백초의은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뒤, 백온후의 오른쪽 맥을 짚는다.

벌모세수가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걸 흘끔 본 황극린이 말한다.

“시작하겠습니다.”

“예.”

백초의은은 세 번 정도 벌모세수를 보좌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의원 중에서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경험이 많은 수준이었다. 애초에 벌모세수를 받는 이들이 중원에 흔치 않았으며, 육대세가와 같은 명문가들은 가문의 전속 의원이 아니면 들이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상당히 많은 심력을 소비할 것임을 말이다. 꼬박 반나절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집중하자. 한 아이의 생명이 달린 일이다.’

백초의은이 백온후의 맥을 짚은 채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찌지직···!

혈풍뇌전신공으로 만들어진 뇌전의 기운이 백온후의 세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각이 지났을 무렵.

‘이게 무슨 일이지···?’

백초의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어, 어떻게 이리도 빠르고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세맥에 들러붙어 있던 불순물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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