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49화 (49/316)

단리세가의 도련님

단리세가.

안휘성 무호(蕪湖)에 자리를 잡은 단리세가는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육대세가에는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꽤 알아주는 세가라 할 수 있었다. 강호 전체로 따지자면 열 손가락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안휘성에서 만큼은 세 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으로 최근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단리세가의 셋째 단리총운은 안휘성을 벗어나 절강성 항주로 향했다.

하릴없이 풍류를 즐기고자 항주로 온 것은 당연히 아니다. 거대 가문의 자식들은 막대한 책임감을 부여받아 매 순간 노력해야 한다. 항주에 온 것도 직계의 의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혼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무림인들이 혼인하는 나이는 천차만별이다. 태중혼약이라 하여 부모끼리 서로 약조하여 혼인하는 경우에는 보통 약관이 되기 전에 혼인한다. 하지만 그러한 혼약을 하지 않았다면? 20살이 넘어 30살에 가까워졌을 때 짝을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 심할 경우 불혹을 넘기고 혼인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무인은 무공의 수련을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무공의 경지가 강호에서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문에 속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다.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고, 강호에서 인정을 받으면 더 좋은 상대와 혼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녀의 사랑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당연히 중요하지만, 가문끼리 사돈을 맺는 혼인은 집안 어른들의 입김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더욱이 단리세가와 같은 거대 가문은 가주의 직계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단리총운은 집안 어른들을 만족하는 짝을 만나기 위해 항주에 왔다. 최근 그녀에 관한 소문을 듣자 하니 짧은 시간에 성격이 꽤 바뀌었다고 한다. 매번 만나던 친우들과도 거리를 뒀다고 하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뻔하다.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잘 알고 있다.

힘들 때 다가가서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면 된다. 거기다 자신은 외모 또한 출중하며, 출신 배경도 좋다. 더욱이 2년 전에 개최되었던 용봉지회에서 무려 ‘2차 예선 통과’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로 항주에 왔건만, 오랜 여정과 싸구려 음식들을 몇 번 먹었더니 피부가 많이 상했다. 천목 의방의 백초의은은 약초를 잘 다루기로 유명하다. 특히 사람의 피부에 맞는 탕약을 지어주고, 바르면 피부의 종기가 가라앉는 약을 지어주기도 한다.

당연히 몹시 비쌌지만 단리세가의 직계에게 가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른 완벽한 상태로 그녀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단리총운은 수행원 겸 호위로 같이 항주까지 온 비천대의 대주에게 조용히 묻는다.

“대주님,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도련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면 대주 자격이 없었다.

기다리기 싫으니 알아서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곳에서 단리세가의 직계가 직접 나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항주까지 오면서 온갖 잡일을 처리했던 비천대주였다. 아무리 규모가 큰 의방이라고 해도 단리세가의 이름을 말하면 알아서 길 것이 뻔하다.

“단리세가에서 나왔소이다. 백초의은께 진료를 받고 싶소.”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비천대주의 예상을 벗어났다.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 반나절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반나절?

그게 말이나 되나? 역시나 단리총운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황급히 비천대주가 관리인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값은 배로 쳐주겠소이다.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어떻게 안 되겠소?”

“불가능합니다.”

“혹, 우리가 단리세가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었소?”

“예···. 들었습니다.”

처음엔 비천대주도 그나마 예의를 차려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관리인은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단리총운의 표정도 안 좋아지고, 비천대주 또한 짜증이 치솟는다. 의원도 아니고 의방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놈들이 감투를 쓴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그때.

“손님, 가시지요.”

백건악과 백온후의 차례가 되었다.

그것을 본 비천대주가 머리를 굴렸다.

“거기 잠깐 멈추어라.”

“저 말씀입니까?”

“그래, 너희 둘! 돈을 줄 터이니 양보하거라.”

당연히 백건악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은공께 뒤늦게 온 이들에게 순서를 양보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거기다 백건악은 이런 협박에 쉬이 굴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용비문의 악착같은 괴롭힘에도 12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손님, 다른 손님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크으으음···!”

뒤에서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단리총운이 헛기침한다.

그때부터였다.

비천대주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관리인과 두 형제를 협박하듯 설득한 것은 말이다. 이대로 반나절을 기다려야 한다면, 도련님에게 꽤 오래 구박을 받을 것이 뻔했으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세가 내에서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비천대주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두 형제의 허름한 행색을 보면 천목 의방의 비싼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겠다는 둥, 우리가 가격을 세 배로 쳐주겠다는 둥, 관리인을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백건악과 백온후를 협박하기도 했다. 은근히 단리세가의 이름을 흘려가며 말이다.

“대주님,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뒤에선 자신은 나쁘지 않다는 듯이 비천대주를 말리는 척만 하는 단리총운까지··· 비천대주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일단은 이번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비천대주가 설득과 협박으로 두 형제를 꽁꽁 묶어두고 있을 때.

의방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경고는 한 번이다. 꺼져라.”

* * *

뭐지? 뭘 잘못 들었나?

비천대주가 의아한 얼굴로 정문을 바라본다. 단리총운도 눈을 가늘게 뜨고 의방에 나타난 사내를 바라본다. 허리춤에는 검이 메여져 있긴 했지만, 추레하고 낡은 검집을 보아하니 딱 예상이 간다.

비천대주는 금방 상황 파악을 끝냈다.

작은 재주를 배워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애송이가 분명했다. 원래 무림이 그렇다. 검을 배웠다고 하여 자신들의 협의를 펼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낭인 놈들이 어딜 가나 존재한다. 한번 현실의 쓴맛을 맛보고 나면 다시는 이런 일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상관하지 말고 가라. 이건 우리끼리의 일이니까.”

“난 저 아이들의 보호자다.”

“대, 대협님!”

“은공, 죄송합니다.”

백씨 형제가 황급히 황극린의 곁으로 향한다.

천목 의방의 관리인도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 단리세가의 말이 일정 부분 맞기도 했다. 아무리 유명한 의방이라고 하더라도 거대 가문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었다. 손님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러니 꺼져라.”

황극린은 두 사람을 무시하고, 두 사람과 함께 백초의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이제껏 나서지 않은 단리총운이 입을 뗀다.

“소협, 잠시 멈추시오.”

“경고는 한 번이라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불쌍히 여기는 말투다.

잠잠히 지켜보고 있던 단리총운이 입꼬리를 실룩였다. 이제껏 저런 놈들을 많이 보아왔다. 단리세가의 배경을 들으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끙끙댄다. 문득, 그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난 단리세가의 단리총운이다.”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단리총운은 단리세가의 직계라는 자부심이 흘러넘친다. 안휘성 무호에서 군림하는 가문의 직계라는 배경은 그를 오만하고 거만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무려 용봉지회에서도 2차 예선까지 통과했다. 대진운이 좋지 않았기에 2차 예선이었지 만약 대진운이 좋았다면 본선까지도 진출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용봉지회 본선에 진출했다는 걸 무엇을 말하느냐?

중원 후기지수 중 16위 안에 든다는 말이다.

저딴 평범하기 그지없는 놈은 자신과 대화한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 그는 황극린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며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황극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리세가? 그게 어쨌단 말인가? 황극린 또한 단리세가를 알고 있다. 그가 알고 있는 가문이라는 말은 중원에 꽤 명성이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흑살문에 비하면 단리세가는 동네에서 힘 좀 쓰는 작은 가문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경고는 한 번이라고 했을 텐데.”

그러자 단리총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이 세상물정 모르는 놈은 단리세가가 무슨 가문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저리 무게를 잡고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무림에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저런 무지한 놈들은 자신과 같은 세상의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에 불과하다. 아직 그런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모르는 모양이군. 난 27회 용봉지회에서 3차 예선까지 진출했었다.”

용봉지회.

이것도 모르진 않을 테지? 용봉지회는 무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비무 대회다. 각 성마다 개최되는 1차 예선도 만 명 중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뚫기가 어렵다. 그런데 3차 예선이라면 자신이 어느 수준에 오른 무인인지 알 수 있으리라.

단리총운의 말에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할 실력이니 알만하군.”

“뭐···?”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할 실력이라고?

“네놈, 설마 용봉지회를 모르는 건가? 설명해주지. 용봉지회는 현급에서 뛰어난 고수들이 성도로 모여 자웅을 겨루는 것을 시작으로···.”

“그만. 시끄럽다.”

“이놈이···!”

“네놈은 단리세가 출신이라는 것과 용봉지회 2차 예선을 통과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꽤 큰 모양이로군.”

“정녕 네놈이 매를 버는구나!”

단리총운이 살의가 담긴 눈빛으로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 황극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날 죽이려고?”

죽인다는 말에 단리총운이 고개를 젓는다.

“단리세가를 모욕한 죄는 크지만··· 죽이진 않으마.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 주도록 하지. 허나, 오늘 네놈은 무림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게 될 것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져주도록 하지.”

크으, 멋지다.

자고로 단리세가의 직계라면 이 정도 배포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단리총운이 황극린을 교육해줄 요량으로 느긋하게 다가온다. 얼른 주제도 모르는 저놈을 교육해주고 백초의은의 진료를 받는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러 가서···.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어···?”

어느 순간 황극린이 단리총운이 쓰러지지 못하게 멱살을 잡고 있었다.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입안엔 진득한 피 맛이 잔뜩 났고, 왜인지 왼쪽 볼이 허전하다.

‘이, 이가 빠졌···.’

찰싹! 또 다시 눈앞이 번쩍였다.

찰싹! 왼쪽의 이가 완전히 다 빠져버린 듯하다. 까딱 잘못하다간 피와 함께 이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죽이진 않으마.”

짜아악!또 다시 눈앞에 별똥별이 지나간다. 생각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놈이 접근해서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치는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짜아아악!

황극린이 손을 네 번 휘둘렀을 때, 뒤에서 멍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비천대주가 나선다.

“이, 이노오옴! 대체 무슨 짓이냐! 감히 도련님을!”

비천대주의 늠름한 목소리에 정신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희망이 생긴다.

‘어, 얼른 도와줘···!’

정신이 흐릿해져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어찌 사람 손이 이렇게나 맵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할 수준이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단리총운이었지만···.

짝! 짝! 짝! 짝!

“크억! 이놈! 놓아라! 감히! 내가 누군지···!”

“이, 이노옴···.”

“제발···!”

“그, 그만!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늠름한 비천대주의 목소리가 절규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단리총운은 흐릿한 눈으로 추하게 바닥에 대(大)자로 누운 비천대주를 바라본다.

어느샌가 황극린이 다시 그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기절하지 않은 건 장하군.”

장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 단리총운은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혼미했다. 그건 그렇고 이놈의 따귀가 왜 이리 아픈 거야···.

“네놈 대체···.”

짝!

마지막 한 방.

황극린이 대충 후려친 따귀에 결국 단리총운도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또한 비천대주처럼 추하게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방의 관리인이나 손님들이 입을 떡 벌리고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극린이오.”

“예?”

“놈들이 혹여나 의방에 해코지를 하려고 한다면 내 이름을 말하시오.”

“괘, 괜···.”

황극린의 무위에 놀란 관리인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피거품을 물고 쓰러진 단리세가의 두 사내가 보인다. 오히려 불쌍하게 보일 지경이다. 정말 괜찮은 걸까?

“죄송합니다.”

그때, 누군가 관리인 대신 사과했다.

중앙 전각의 계단 위에 선 거구의 노인.

“바, 방주님!”

천목 의방의 방주인 백초의은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