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동려에서 항주까지는 대단히 멀진 않았지만, 백온후의 병이 있기에 굳이 무리해서 걸을 필요는 없었다. 용비문에게 빼앗은 막대한 재화가 있었기에 꽤 넓은 삼두마차를 구매하여 이동했다. 마부까지 고용해서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몰면 돈을 더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네 돈으로 고용했다고 치지.”
“그건···!”
“됐고, 집중해라.”
마부를 따로 고용한 이유는 하나였다.
항주로 가는 길에 백건악에게 무공의 기초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연에 떠도는 기(氣)를 느끼게 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백건악은 늦게 무공에 입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내공심법을 익혀야 한다.
다행인 점은 흑살문에서도 백건악은 빠르게 기를 느끼고 단전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재능이 있었기에 늦게 흑살문에 들어왔더라도 황극린과 같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규칙적으로 생활한 것도 백건악의 장점이다.
의외로 세맥에 불순물이 많이 쌓이지 않았다.
절대 고수 수준은 될 수 없더라도 제대로 무공을 익힌다면··· 한 명의 역할은 톡톡히 해낼 것이다.
백온후는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지켜본다.
만약 집중이 흩어지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황극린에 말에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기라는 것은 자연을 구성하는 신비로운 힘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존재조차 느껴보지도 못한 것이며··· 나조차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가 감히 기를 느낄 수 있을···.”
“가능하다.”
황극린은 그가 홀로 기를 느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거의 한 달이 걸렸다고 했지만, 황극린이 적극적으로 지도하면 그 시일을 빠르게 단축할 수 있으리라. 처음 흑살문에 들어오면 기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을 간추리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당연히 교관이 일일이 한 명씩 가르칠 순 없는 노릇이기에 그곳에서 기를 느꼈다는 것 자체가 재능이 있다는 방증이다.
“넌 재능이 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라.”
“······!”
백건악이 결연한 눈빛을 한다.
이리저리 재고 고민만 하다간 은공께 은혜를 갚을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거기다 은공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재능이 있다면 있는 것이다.
“예, 은공. 약한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황극린이 말을 이어나간다.
“화산이나 무당산과 같이 천하의 명산이라 불리는 장소엔 막대한 기가 쌓여 있다. 울창한 나무와 높게 쌓인 토양. 기는 응축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한 번 머물기 시작한 기는 다른 곳으로 잘 이동하지 않는다.”
백건악이 황극린의 모든 말을 기억하려 애쓴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기는 공간에 떠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황극린이 두꺼운 마차의 목재 바닥을 가리킨다.
“여기에도 기가 담겨 있다.”
“······.”
화산파와 무당산이라는 말에 공간에 떠도는 형태의 기를 상상했던 백건악이 당황한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무공이 있다. 소위 대종사의 자질을 가졌다고 알려진 이들은 기상천외한 무공을 많이 만들었지. 대부분 내공심법은 공간에 떠도는 기를 호흡하여 흡수하는 형태를 취하지만··· 어떤 무공은 생명의 정기(精氣)를 흡수하는 경우도 있다.”
“생명의 정기라는 말씀은···.”
“예를 들자면,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흡수하는 흡성대법(吸星大法). 여인이 사내의 양기를 탈취하는 방중술 중 소녀환희공(素女歡喜功) 그리고 여인과 평생 교접하지 않고 내력을 쌓는 동자공(童子功)이 있다.”
백건악은 무공의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황극린이 그 무공들이 뭘 뜻하는진 알아먹었다.
부끄러웠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세 무공의 공통점이 뭔지 알겠나?”
“호흡으로 내력을 모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틀렸을 수도 있지만, 최대한 고민해보고 답했다.
“정답이다.”
“오···! 죄, 죄송합니다.”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말에 환호성을 터트렸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은공께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공간에만 기가 떠돈다면 애초에 그러한 무공은 만들어지지 않았겠지. 오히려 생명이 가진 기가 더욱 정순하며 강하다.”
백건악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황극린의 설명을 듣다 보면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말고 물어보아라.”
“은공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왜 그러한 내공심법이 발전하지 않은 겁니까?”
타당한 의문이었다.
역시 백건악은 머리 회전이 빠르다. 무공을 익히는 데 몸만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건 반은 맞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머리를 쓰며 공부해야 하는 게 무공이기도 하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정순하기 때문이지.”
“예?”
“보아라.”
콰지지짓-!
순간 황극린의 손가락 마디 사이에 푸른 뇌광이 번쩍였다. 한눈에 보아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등골에 땀이 주륵 흐른다.
“기의 성질은 다양하다. 뇌전의 기운을 띤 것도 있으며 사물을 얼려버리는 빙(氷)의 기운과 반대로 태워버리는 화(火)의 기운도 존재한다. 그러한 힘이 네 몸에 담고 있으면 어떨 것 같으냐?”
“대단히···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맞다. 자신과 맞지 않은 기운을 품게 된다면 고통뿐 아니라 죽음에도 이를 수 있다.”
“······!”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정순한 기운은 일반적으로 독으로 작용한다.”
“아···.”
백건악은 짧은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공간에 떠도는 기운은 기본적으로 성질이 없는 것이군요···!”
황극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해가 빠르니 가르치는 맛이 있다.
“그래, 맞다. 그렇기에 흡성대법과 소녀환희공은 제약이 많다. 우후죽순으로 타인의 정기를 흡수하면 결국 독이 되어 돌아오지. 그래서 그 두 무공을 대성한 이들은 무림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백건악은 황극린에 말에 또 다른 것을 깨달았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존재하긴 한다는 말이었다.
황극린은 미래에 두 무공을 대성하여 무림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를 알고 있었다.
언젠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무튼, 기라는 것은 정형화된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이며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또 어느 한 곳에 정체되어 있기도 하지.”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백건악은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기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군요.”
“맞다. 그러니 기를 느끼는 건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무엇이지?”
“매 순간 기를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 항주까지 가면서 네가 할 일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느끼지 못하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예, 은공! 열심히 하겠습니다.”
백건악이 가부좌를 튼 상태로 눈을 감는다.
공간에 떠도는 기를 느끼기 위해 시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좋은 시도다.
이러한 개념은 황극린이 혈풍뇌전신공을 익히며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과거에도 무공을 익혔었지만 이런 생각까진 닿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처음부터 무공을 익히며 원론적인 부분을 생각해보니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당연히 직접 경험하여 체득한 것과 말로 들어 알게 된 것은 다를 테지만, 분명히 백건악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가르침을 내려준 후.
황극린이 의외의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어린아이도 무언가를 깨달은 건가.’
백건악의 동생 백온후도 눈을 감고 명상하고 있었다.
‘좋은 일이지.’
하나보단 둘이 낫다.
형제의 우애가 깊으니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황극린 또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기 시작했다.
영약을 취하는 것은 분명히 빠르게 성장하는 방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극의에 도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 * *
항주(杭州).
절강성의 성도로 전당강이 흐르며 남으로는 운하가 존재한다. 거기에 항주의 서쪽으로는 서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는데, 물이 맑고 볼거리가 다양하여 수많은 백성이 항주에 관광을 온다.
동려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활력이 거리에 샘솟고 있다.
항주 중심가에선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없었기에 세 사람을 걸어서 길을 거닐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병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소년 백온후가 감탄을 터트린다. 백건악도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은공께서 옆에서 보고 계시는 데 어린애처럼 굴 순 없었으니···.
“형아! 형아! 저것 좀 봐!”
“와···.”
백건악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린다.
무려 5층 높이의 건물.
단순히 높이만 높은 게 아니라 규모 자체가 웅장하다. 자그마한 인간을 압도하는 크기에 백건악과 백온후가 입을 떡 벌린다. 동려현에선 볼 수 없는 규모의 누각이었다.
거기다 그런 누각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 멀리 비슷한 높이의 누각이 또 보인다.
‘항주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렇게 감탄하다가 황극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백건악이 황급히 동생의 손을 잡는다.
“크음. 온후야, 은공께서 기다리시잖니. 그만 구경하고 가자.”
“으응···.”
백온후가 실망한 얼굴로 대답한다.
아직 어린다 보니 신기한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을 본 황극린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치료를 받은 후에 마음껏 구경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대협님!”
형에게 교육받은 대로 감사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황극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걸음을 이어나갔다.
‘후우, 나도 온후처럼 어린애처럼 굴면 안 되는데··· 앞으로 더 주의하자.’
찰싹.
자신의 볼을 때리고 백온후의 손을 잡고 이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천목 의방. 절강성 제일의 의원이라 불리는 백초의은(百草醫隱)이 운영하는 곳이다. 별호가 있을 정도로 워낙 유명하여 강서성과 안휘성에서도 환자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진료비가 꽤 비싼 편이긴 해도, 황극린에겐 전혀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다.
도착하니 다행스럽게도 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관리인에게 향하여 접수부터 한다.
“처음 방문하신 겁니까?”
“예.”
“저희는 의원님을 선택하여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상주하는 의원님들은 총 11명이 계십니다. 혹시 원하시는 의원님계십니까?”
모두가 백초의은에게 진료받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큰 의방이다 보니 다른 의원의 수준도 상당히 높다. 하지만 굳이 천목 의방까지 와서 다른 의원에게 갈 필요가 있으랴?
“백초의은께 진료받기를 희망합니다.”
황극린의 말에 뒤에서 백건악이 죄인이 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부담되지 않는다고 해도, 백건악에겐 큰돈이다. 은공께 계속 은혜만 입는 것 같아 죄송하기만 했다.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온 황극린.
항주에 와서 들떴던 표정은 어디 가고 울상이 된 두 형제들이 보인다.
“백건악.”
“예엡···!”
황극린의 부름에 백건악이 벌떡 일어선다.
“울상짓지 말고 남은 시간 동안 명상이나 하고 있어라. 한 시진은 걸릴 것 같다더군.”
“예, 은공. 알겠습니다!”
애써 밝게 대답한 백건악이 눈을 감고 명상한다.
아직 그는 기를 느끼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보통 기를 느끼려면 개인적인 공간에서 조용히 집중해야 하는데, 세 명이나 같이 있는 흔들리는 마차 내부에서는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황극린은 항주에 머무는 동안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줄 생각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항주는 관광지이다 보니 일정 기간 장원을 통째로 빌려주고 돈을 받는 업자도 존재한다. 뭐, 백건악이 수련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황극린 자신을 위해서 빌리는 것이기도 했다.
“예, 은공.”
“대협님, 잘 다녀오세요!”
이젠 황극린이 떠나도 두 형제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 * *
천목 의방 근처에 괜찮은 매물이 있어 금방 장원을 빌릴 수 있었다.
연무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격이 꽤 나갔지만, 용비문을 처리하고 막대한 돈을 쥐게 된 황극린에게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계약을 마친 뒤, 황극린은 바로 천목 의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왜인지 안이 소란스럽다. 의방 안으로 도착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린다. 초감각의 힘은 청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놈들 때문에 우리 도련님께서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딱 봐도 돈도 없게 생겼구만··· 저 허름한 옷을 좀 보시오.”
“손님, 천목의방의 방칙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기다리긴 뭘 기다리란 말이오? 어이, 거기 너희들이 말해보아라. 양보하겠느냐? 어?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느냐. 대답을 하라고! 대답을!”
위협적인 목소리로 중년 사내가 다그친다.
뒤이어 백온후가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아···.”
백건악이 입을 떼기 전.
의방의 문이 열리고 황극린이 들어온다. 그는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로 험악한 인상의 중년 사내와 그 옆에 도련님에게 말한다.
“경고는 한 번이다.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