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46화 (46/316)

포기할 때까지

용비문주 사공두.

그는 동려현에서 왕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모두가 죽는시늉까지 한다. 아니, 용비문주가 죽이고 싶으면 죽일 수 있다. 취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취할 수 있다. 그는 동려현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력과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간단하다. 힘이 있으면 권력이 따라오고, 권력이 따라오면 돈도 따라온다. 물론,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가 판가름 난다.

용비문주는 최대한 많은 돈을 단기간에 벌고 싶었다.

인생이 얼마나 길겠는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단기간에 골수를 뽑아먹고 즐길 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살인적인 이율의 고리대금업을 하며 용비문의 자금은 해가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만약 높은 이율을 감당하지 못하고 채무자가 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 몸으로 때우면 된다. 인간의 노동력은 가치가 있다. 쓸만한 인간은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압박을 가하다 보면 채무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노예가 된다. 뭐,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한다는 놈들도 간혹 있었지만 용비문주의 입장에선 같잖은 변명에 불과했다.

결국, 나약하니까 당하는 것이지 않은가?

자연을 보라. 약한 동물들은 잡아먹히고, 강한 맹수들은 잡아먹는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용비문주는 그걸 잘 직시하고 있었다.

“문주님, 백건악 동생의 병세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용비문주는 사소한 보고를 받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꽤 주의 깊게 보고 있는 건이었다.

백건악. 사실 처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린 꼬마 놈이 버텨봤자 얼마나 버티겠는가? 처음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노예가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용비문주 사공두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 달.

일 년.

십 년.

긴 세월이 지나도록 그 질긴 놈은 꼬박꼬박 이자를 갚아나갔다. 듣기로는 하루에 한 시진도 자지 않는다지? 사공두는 그 별종이 얼마나 버티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놈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계산했다.

그 정도 끈기라면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다.

놈이 삶을 포기하고··· 노예가 된다면 놈을 사려는 곳이 얼마나 많을까? 이미 놈에 대한 정보를 고객들에게 보내놓았다. 언제든 필요한 곳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도 죽이면 안 된다. 그럼 백건악 그놈은 가치가 없어진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백건악이 지금껏 버텨온 이유.

그것은 병든 동생 때문이었다. 용비문주가 보기에 백건악이 참으로 어리석었다. 고작 그깟 혈육이 뭐라고 인생을 허비하는가? 백건악이 조금만 세상을 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현실적이었다면 아마 다른 곳에서 잘 살아갔을 것이다.

대체 혈육이 뭐라고?

어차피 병에 걸려 자신의 인생에 방해만 될 뿐인데, 버리고 도망가면 그만 아닌가?

용비문주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사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문주가 되는 날에는 사부마저 독살했다. 용비문을 온전하게 가지기 위해서 했던 당연한 행동이다. 과거의 용비문은 지금처럼 추악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가 문주가 된 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 멍청한 새끼들 덕에 내가 잘 사는 것이지만 말이지. 크크.’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그런 놈들을 쥐어 짜내며 살아가면 금자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슬슬 약에 관한 정보를 흘리면 되겠군.”

백건악이 현재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동시에 희망을 내려주면 된다. 언젠간 죽을 동생 놈을 낫게 할 수 있는 의원이 있다면? 그런데 치료비가 금자 백 냥에 달한다면? 백건악은 어떻게 행동할까?

아마 용비문주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다.

미련하게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의원을 섭외해놓겠습니다.”

“그래, 혹시 금자 백 냥이라는 소리를 듣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 감시를 붙여놓고.”

혹시 모르는 일이다.

백건악이 동생을 버리고 도망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런 철두철미한 점이 사공두를 동려현의 왕으로 만든 것이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실수하면 알지?”

“예···!”

총관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사공두의 잔혹함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아온 총관이라도, 사공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래, 나가봐라.”

총관이 나가자 사공두가 방을 밝히던 작은 야명주에 천을 올린다.

사실 야명주의 품질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등불 따위보다 야명주를 쓰는 것이 더 있어보였기에 막대한 거금을 들여 장만한 것이다. 어차피 또 어리석은 놈들을 쥐어 짜내면 금방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피곤하군.”

그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오늘도 종일 열심히 일했으니, 피곤할 법도 하다.

“크으음···.”

희미한 달빛만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방안 곳곳 자리 잡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후으으···.”

인간이 가장 취약할 때는 바로 잠이 드는 순간이다.

어둠에 녹아든 살수, 과거 아니 미래에는 혈귀(血鬼)라 불렸던 황극린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허나.

황극린은 죽일 수 있음에도 당장 사공두의 심장을 꿰뚫지 않았다.

잠시 잠든 사공두를 내려다보던 황극린이 손을 놀린다. 아혈과 마혈을 짚는다. 그래도 사공두는 절정 고수가 맞았던 걸까? 점혈을 하는 순간 눈을 번쩍 떴지만, 황극린의 손이 더 빨랐다.

“······!”

사공두가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그는 눈으로 살의를 힘껏 내비치며, 황극린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

황극린이 그를 들쳐멘다.

무공을 익혀 근육이 발달해서 그런지 꽤 무게가 나간다. 하지만 철 팔찌와 발찌를 차고, 뇌불 비동 속 돌산을 오르내렸던 황극린에겐 딱히 거슬리는 무게도 아니었다.

황극린은 용비문 장원의 가장 구석진 곳.

아무도 찾지 않을 곳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라 돌아다니는 이들도 적다.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있긴 했지만, 황극린은 요리조리 그들을 피해 작은 창고에 도착했다.

마치 황씨세가에서 황극린이 머물던 우사와 비슷한 장소였다.

“이, 이 개새···!”

아혈을 풀자 사공두가 소리치려 했지만, 황극린이 다짜고짜 주먹으로 안면을 강타했기에 말을 내뱉지 못한다. 뇌불의 비동에서 벽을 수천, 수만 번 때렸던 주먹이다. 사공두의 이가 몇 개나 부서지고 뽑혀 나갔다.

“컥···!”

“소리를 지르려 할 때마다 한 대다.”

“······!”

사공두가 눈알을 굴린다.

아직 점혈이 완전히 풀린 게 아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뿐이었다.

“대, 대체 귀하는 누구···? 컥-!”

한 대 맞으니 정신을 차리는 사공두.

존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황극린이 따귀를 날려버렸다. 이가 뽑히진 않았지만, 입 안에 피가 흥건하다. 숨을 쉬기가 벅차진다.

“왜···?”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왜 때리는가?

당연히 대답해줄 리 만무했다. 또 다시 황극린이 손을 휘두른다.

짝-!

“컥!”

이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다.

귓가에는 이명이 들리고,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황극린은 적당히 힘을 조절했기에 그래도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이 미친놈은 정상이 아니다.

사공두는 이 의문의 사내가 포식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꾹 눌러 참고, 입술을 깨문다.

“내 질문에 성실히 답할 것.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면 한 대씩이다.”

끄덕끄덕!

“사람을 사는 세력의 이름과 장소.”

“그건··· 아악!”

황극린의 돌과 같은 손바닥이 또 다시 휘둘러졌다.

사공두는 이젠 멍하게 풀린 눈으로 침을 질질 흘려댔다. 황극린은 느긋하게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다.

“이제 두 대다.”

혹여나 정신 줄을 놓은 척 연기하면 안 때리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던 사공두가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대, 대답하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는 걸 보고 결정하지.”

살 수도 있다는 희망에 사공두의 눈빛이 변했다.

희망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뭐,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름과 장소.”

“하, 항주의 양씨 포목점입니다···!”

짜악!

“커허업!”

“이름.”

“흐, 흐, 흑사회(黑死會)입니다···!”

흑사회.

황극린의 예상이 맞았다. 중원 전역에 걸쳐 있는 거대 흑도 조직 중 하나다. 인신매매를 주 사업으로 하는 아주 악질적인 놈들이다. 용비문에서 흑사회로 흘러 들어간 백군악이 다시 흑살문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흑살문과 흑사회는 긴밀한 관계였다.

과거의 황극린은 흑사회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이젠 다르지.’

중원 무림에 악(惡)이라 칭할 이들은 너무도 많았다.

여기 눈앞에 있는 용비문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악을 처단할 생각은 아니다. 단지 황극린은 흑살문과 관련된 것을 부수고 싶을 뿐이었다. 백건악과 만나니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채무각서를 보관하는 장소.”

“그, 그건···.”

짜악!

간결한 손놀림. 시간이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린 사공두가 입을 열었다.

“제, 제 방 탁상 밑에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다. 그, 그곳에 채무각서를···.”

“네 직속 간부들의 이름을 불러라.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

이 미친놈의 목소리를 짐작하건대, 한다면 하는 놈이다.

무인에게 손가락은 생명과도 같다. 제 목숨은 끔찍이 아끼는 놈이니 심복들의 이름을 망설이지 않고 나열한다.

“백건악이 이제까지 갚은 게 얼마나 되지?”

황극린이 알기로 백건악의 빚은 원금 금자 한 냥에 불과하다.

백건악의 성실함으로 보건대, 금방 갚았어야 할 돈이다. 그런데 이자를 얼마나 불렸으면 12년 동안이나 괴롭혔을까?

사공두는 대답을 늦추면 맞을까 두려워 바로 머릿속에 있는 숫자를 입 밖으로 낸다.

용비문의 문주로 살아가려면 채무자들의 빚이 얼마인지는 항시 외워야 한다.

“총 금자가 45냥 정도···.”

“갚아야 할 건?”

“금자 97냥입니다!”

“그렇군.”

12년.

백건악은 하루에 두 시진도 채 자지 않고 매일 중노동을 했다. 거기다 쓰는 돈은 없고, 버는 족족 그들에게 빼앗겼다. 원금이 고작 금자 한 냥이다. 용비문이 얼마나 악독하게 이자를 붙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거기다 남은 액수가 갚은 액수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백건악은 결국 자신을 포기했겠지.

갚아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기에, 동생의 병세는 더 심해지기에··· 그리고 용비문은 동생의 병까지 이용하여 백건악을 궁지로 몰고 있었다. 황극린의 전생만큼이나 기구하다. 황극린은 그래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었으니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백건악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황극린의 머릿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던 백건악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이제 살려주시는 겁니까···?”

황극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면서 살기를 희망하는가?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동자가 황극린을 자극한다.

“살고 싶나?”

“예···! 살려만 주신다면··· 본문에 쌓인 금은보화를··· 끄아아아아악!”

비수가 사공두의 새끼손가락 마디를 잘라버렸다. 거기다 황극린이 일으킨 뇌전으로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까지 뇌리에 전해진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었지만, 이미 점혈을 당했기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의 내력 수준으로는 스스로 점혈을 풀 수 없다.

“끄아아악! 그, 그만! 아아아악!”

황극린은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잘라나갔다.

동시에 뇌전을 일으키며 고통을 극대화시킨다. 혈풍뇌전신공은 고문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어떤가?”

“왜··· 대체 왜··· 다 대답했지, 끄윽, 않습니···.”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끄아아아악-! 뭐, 뭐든 말하겠습니다! 그, 그마아아안!”

“아니지.”

사내는 대체 무슨 말을 원하는 걸까?

사공두의 약삭빠른 머리가 회전할 새도 없이 손가락의 마디가 계속 잘려나간다.

사공두에게 고통을 전해주던 황극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어떤가?”

“허어억··· 허어억··· 그만···.”

“아직 살고 싶나?”

“······!”

사공두의 동공이 확장된다.

그가 황극린의 말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건 사공두가 채무자들에게 늘 하던 짓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고, 결국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든다. 체념한 그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게 된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약자들을 보며 사공두는 비웃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약하게 태어난 게 그들의 죄였으니까.

당연히 사공두는 자신이 비웃었던 채무자의 입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극한의 공포와 실낱같은 희망.

그것이 주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실감하지 못했었다.

과연 사공두는 언제쯤 목숨을 포기하게 될까?

황극린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고통을 줄 방법은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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