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45화 (45/316)

이리도 잘해주는 이유

“뭐야? 언제···.”

황극린의 접근 속도는 용비문도 유천상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느끼기도 전, 황극린이 묻는다. 얼핏 보이는 눈동자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번쩍이는 듯하다. 물론, 다른 점이 있었다면 푸르게 빛나는 게 아니라 붉게 빛난다고 할까?

“누굴 죽인다는 거지?”

하지만 용비문도 이태보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다. 빈민가를 전전하며 빚을 독촉하고 돈을 뜯어내는 놈들이 무슨 눈치가 있을까? 그는 황극린이 같잖을 뿐이다. 용비문의 이름을 듣고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면 외지인인 것 같은데, 용비문의 무서움을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백건악의 동생을 죽이려고 했는데··· 일단 너부터 죽여야겠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비수를 꺼냈다.

관리 하지 않아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지만, 베는 용도가 아니라 찌르는 용도였기에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실제로 사용한 경험은 별로 없었다. 비수만 보여줘도 웬만한 놈들은 겁먹고 꼬리를 내렸으니까.

하지만 황극린은 가만히 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놀란 건가? 제멋대로 착각한 이태보가 꼴에 잔혹한 미소를 짓는다.

“내가 말이야. 사람을 많이 죽여봤거든.”

“그래? 얼마나 죽였는데?”

“열 명쯤 될까? 주제도 모르고 짖는 개들은 맞아도 버릇을 못 고친다던가? 그래서 그냥 죽였다. 그리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잘근잘근 씹어먹었지.”

당연히 내장을 씹어먹은 적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도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다. 내장을 먹는다는 건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군.”

“일단 어디를 잘라 줄까? 눈알을 파줄까? 손과 발목의 힘줄을 끊어줄까?”

“나한테?”

“크크, 당연하지! 이제야 겁이 나냐? 네놈의 내장은 어떤 맛일지 궁금한걸? 흐흐흐.”

비수를 작게 휘저으며 위협한다.

황극린은 그런 비수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은 유천상이 이태보를 말리려 한다.

“태보야, 잠시···.”

하지만 황극린이 더 빨랐다.

그는 이태보의 말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마.”

“응? 지금 뭐라고?”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처럼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 깔끔하게 죽이는 것? 저런 놈들에겐 사치다. 고통없이 죽는다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않겠는가? 과거 비 노인의 금자를 뜯어간 칠성방의 한유걸. 황극린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단지, 칠성방에게 먹이로 던져주었을 뿐.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타인의 손을 빌려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무림에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검을 뽑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무림은 그런 곳이다.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검을 뽑으면 안 된다.

스걱.

무언가가 번쩍하더니 이태보가 무릎을 꿇는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껴질 새도 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대체 뭐지?

쿵.

쓰러진 이태보의 어깨를 무언가가 짓눌렀다.

마치 바위같은 손이 그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있었다.

“사지의 힘줄을 잘랐으니 이제 눈 차례다.”

“끄아아아악-!”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손과 발을 움직이려 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다. 오히려 고통만 더 커질 뿐이었다.

“아아아아악-! 아아악!”

비명을 무시한 채 황극린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인다.

당장 그를 죽일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후환을 남겨놓을 생각도 없었다.

묵철 비수가 이미 이태보의 두 눈을 찔렀다.

“끄아아아아! 처, 천상! 천상아아··· 나, 나 좀 도와···!”

이미 유천상은 도망치고 있었다.

그나마 이태보보다 감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의 앞을 가로막고 묵철 비수를 휘둘렀다.

“네놈의 눈까지는 가져가지 않으마.”

그러면서 황극린이 백건악을 바라본다.

마치 잘 보고 배우라는 듯이.

스걱.

스걱.

두 번의 소리가 들린다. 유천상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에 백건악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파들파들 떨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빈민가에선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폭력은 처음 겪는 것이다.

백건악은 이태보나 유천상과 싸우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싸우는 법은 모르니 우직하게 육체의 힘으로만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의 사내가 보여준 무위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진짜’ 무림인이었다.

“허억···. 허억···.”

백건악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황극린은 사지근맥이 잘린 유천상을 질질 끌고 백건악의 앞으로 왔다.

“백건악.”

“헙···!”

어떻게 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당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나? 자신도 저렇게 죽는 건가?

“강호는 이런 곳이다.”

“예···?”

“죽음이 일상인 곳이지. 너 또한··· 아니,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면 난 죽겠지.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도 잃을 수도 있다.”

“······!”

저 사내가 죽는다고?

황극린인 백건악이 처음 마주한 진짜 무림인이었다. 저런 괴물이 다른 누군가에게 죽을 수도 있나? 그가 휘두르는 비수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달리기는 어찌나 빠른지 먼저 달려갔던 유천상을 금세 따라잡았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네가 강해져야 할 거다.”

그때 바닥에서 오줌을 지리고 있던 유천상이 울부짖는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더 말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황극린의 냉혹한 말에 유천상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두 장정. 조금 전까지 백건악의 동생을 죽여버린다며 협박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진짜 힘 앞에서는 저들도 백건악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백건악은 그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놈들은 빈민가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빚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폭행하고, 죽이고, 강간했다. 거기다 방금 자신의 동생을 죽이겠다고도 협박했다. 저들은 응당한 대가를 치른 것일 뿐이다.

백건악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황극린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눈치가 빠르다. 의문의 사내가 저리 말하는 것은 자신은 죽이지 않겠다는 거다. 손속이 잔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백건악에게 황극린은 협객(俠客) 중 협객이었다.

협(俠)이란 무엇인가? 백건악은 세상이 정의하는 협의 따위는 모른다. 단지, 의문의 사내가 자신을 도와 손에 피를 묻혔다는 게 더 중요하다. 그에겐 의문의 사내가 협객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흑살문에 있을 때와 같은 눈빛으로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변함이 없는 의지 가득한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칭찬해줄 만하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용비문도 두 명을 폐인으로 만든 것은 보고 느끼라는 것이다. 강호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이다.

“그런데···.”

백건악이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용비문은··· 동려현에서 세력이 크고 강한 사파 문파입니다. 용비문의 문주는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혹여나 황극린의 심기를 건들까,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는 백건악.

황극린이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혹, 대협께서 위험하실 수도···.”

“걱정하지 마라. 후환을 남겨두진 않을 거다.”

“예···?”

“따라와라.”

황극린이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따라오라는 건가?

백건악은 의문을 느꼈지만 그를 따랐다. 혹여나 사내가 자신을 해치지도 않을까? 그런 의심은 없다.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으나 그에겐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렇게 백건악이 황극린을 따라갔으며, 그가 멈춰선 곳은 일월루였다.

‘왜 여기에 오신 거지?’

지배인 서철극이 백건악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옆에 선 청년을 흘끔 바라본다. 일행인가?

“건악아? 무슨 일···.”

“동생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

황극린의 말에 백건악이 흠칫한다.

“대협···?”

“동생을 주려고 샀던 고기가 바닥에 떨어졌지 않나?”

“그, 그건···.”

동생이 뭘 좋아하나?

그냥 음식이면 다 좋아했다. 그나마 백건악이 사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음식은 급이 낮은 비계 가득한 고기 정도였다. 그것만으로 동생은 참으로 좋아했었다. 그런데··· 동생이 다른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백건악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황극린이 지배인에게 말했다.

“주루에서 가장 자신 있는 요리로 다섯 개 주시오.”

그러면서 은자 두 냥을 건넨다.

지배인의 입장에선 완전히 남는 장사였다. 그는 재빨리 은화를 받아 챙기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백건악을 해고하며 지출한 것을 바로 이렇게 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배인의 활짝 웃으며 주방으로 달려간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백건악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눈동자엔 눈물이 터져 나올 듯 그렁그렁하다.

“대협, 왜 이리도··· 제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런데도 잘해주는 것은 자신이 불쌍해서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건악은 그의 도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꼭 묻고 싶었다. 은인은 왜 자신을 도와주는 걸까? 무슨 생각으로 이렇듯 잘해주는 걸까?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네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나 보지.”

“···예?”

황극린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건악은 그런 황극린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형아! 이거 정말 맛있다! 형아도 어서 먹어! 대협님도 같이 드세요!”

“그래, 많이 먹어라.”

이제 막 열 살이나 되었을까?

백건악의 동생 백온후가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을 머금은 채 젓가락을 놀리고 있다. 하지만 볼이 홀쭉하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것이 확실히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아련한 눈동자로 동생을 바라보던 백건악이 고개를 돌린다.

“대협,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극린이다.”

백건악이 그 이름을 무조건 기억하겠다는 듯이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갚기는.”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백건악이 화들짝 놀라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백온후도 젓가락을 멈추고 불안한 눈동자로 형들을 바라본다.

“대협님···? 형아···?”

“잠시 여기 있어라.”

백건악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분명 황 대협께서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서, 설마 용비문으로 가시려는···?”

“그래.”

백건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이미 용비문도 두 명이 폐인이 되었으니 후일을 대비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인이 위협에 빠지는 건 더더욱 싫다.

“만약 저희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왜?”

“······.”

백건악은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황극린에게 가지 말라고 사정해야 하나? 스스로 버티겠다고 더 이상의 빚을 지지 않겠다고 말하나? 지금 백건악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같이 간다고 해보았자 방해만 될 게 뻔하다.

“금방 다녀오겠다. 먹고 있어라.”

“대, 대협···!”

황극린은 마치 바람과 같이 집에서 떠나갔다.

“형아, 대협님은···? 다시 오시는 거야···?”

백온후는 백건악의 희생이 있었기에 순수하게 자라왔다.

맛난 음식을 바리바리 가지고 온 황극린이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백온후에겐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형아가 바로 대협님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떠나갔다. 도박 빚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처럼 말이다.

불안한 듯 눈빛이 흔들리는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백건악이 말한다.

“다녀온다고 하셨으니 금방 오실 거야.”

“정말···?”

“그래.”

백건악이 대뜸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동생 백온후는 심성이 고운 아이다. 열심히 먹는 척을 했지만, 야금야금 맛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안 먹으면 형이 다 먹는다?”

갑자기 다 먹는다는 말에 백온후가 몹시 당황한다.

“그, 그건···!”

“그러니까 이리 와서 같이 먹자. 먹고 있으면 황 대협께서 돌아오실 거다.”

심각했던 형의 얼굴에 미소가 맺히자 이제야 백온후가 다시 환하게 웃는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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