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44화 (44/316)

과거의 인연

흑살문의 훈련은 수라도(修羅道)와 같다.

살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해야 한다. 겨울철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고통을 견디며 표적을 기다려야 한다. 살갗을 태워버릴 정도로 뜨거운 햇볕에서도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살수가 그런 혹독한 환경을 견디는 수련을 하는 이유,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다. 검은 물론이고 온갖 종류의 병기를 다뤄야 한다. 그것으로 사람의 심장을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무공을 익히고,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며 다른 교육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경쟁에서 도태된다면 죽음과 마주했기에 흑살문에서의 수련은 수라도와 같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의적으로 흑살문에 발을 디딘 이들도 있었고, 황극린처럼 납치된 이들도 있었다.

매일 녹초가 되니 그들은 정신적으로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눈빛만 보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된다. 가끔 감정싸움을 할 때가 있었지만, 주먹 다툼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다치면 훈련에서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끝까지 지옥 같은 훈련을 마치고 생존하자며 다짐했다.

‘역겨운 놈들.’

거기에서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흑살문의 훈련에선 반전이 존재한다. 흑살문은 결국 임무를 부여받아 사람을 죽여야 한다. 표적이 강호에 유명한 의인이라 하더라도 임무를 받은 이상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여야 한다.

살수는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생사를 함께하며 동고동락한 동료들이라 해도 말이다.

흑살문의 최하급 살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껏 같이 훈련받은 동료와 싸워야 한다. 그것도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동료를 말이다. 교관들은 훈련 기간 내내 교육생들을 살펴보고 적당한 짝을 지어준다.

짝이 정해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죽여야 한다.

동료애를 발휘하여 서로가 공격하지 않는다?

그럼 흑살문은 두 사람 모두를 죽인다.

아무리 무재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동료를 죽이지 못하면 표적을 죽이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가차 없이 폐기한다.

황극린은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다.

299번의 번호를 부여받은 청년 백건악.

다른 200번대보다 늦게 합류했지만, 비교적 나이가 많았으며 재능과 끈기로 끝까지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텼던 동료였다. 황극린은 그를 죽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무리 흑살문에 들어오기 전 살인을 경험한 황극린이라 하더라도 동료를 죽인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짝이 된 동료를 죽이라는 말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었다.

사실 실력으로는 황극린이 압도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고 서로의 사연을 털어놓은 기억 때문에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황극린이 고뇌하며 괴로워할 때, 백건악은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

“난 널 이길 수 없어. 그리고 나보다 네 재능이 훨씬 뛰어나다. 그러니까 황극린, 네가 사는 게 맞아. 대신··· 동려현으로 가게 된다면 내 동생이 잘 있는지만 살펴 봐주라. 마지막 부탁이다.”

백건악은 평소 황극린처럼 말수가 적었다.

동료들이 힘이 다해 쓰러지면 냉정하게 버티라고 조언했었다. 약한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늦게 200번대의 훈련에 합류했지만, 오히려 황극린이 그를 보고 배운 점도 많았다.

백건악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띤 채 땅에 떨어진 황극린의 검을 쥐어 자신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그 기억은 아직 선명했다. 그가 왜 살고 싶지 않았겠나? 당연히 살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두 사람 다 죽는 것보다는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아니.

그는 버티고 버텨온 삶을 포기했던 것이다.

‘전생에선 약조를 지키지 못했었지.’

황극린은 흑살문의 정식 살수가 되어 동려현에 가보았지만, 백건악의 동생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찾지 못했다는 건, 이미 죽었다는 걸 뜻한다.

‘이번엔 약조를 지켜주마.’

황극린이 동려현에 도착했다.

* * *

“야! 백건악! 뭐해!”

백건악.

그는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아비는 도박 빚을 지고 병에 걸려 덜컥 죽었으며, 어머니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장이 된다는 건 아이를 철들게 만든다.

그는 7살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루에 두 시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체력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백건악의 체력도 요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고 간 도박 빚은 이자에 이자가 더해져 갚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동생의 병세가 악화됐다.

백건악은 최근 자는 시간을 한 시진으로 줄였다.

아침 일찍부터 대장간에 나가 철괴를 옮기고 그 일이 끝나면 바로 용태 반점으로 와서 주방 일을 한다. 주방일을 한다고 해서 숙수처럼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주방의 잡일이다. 주방일은 대장간에서 노동하는 것보다 더 힘을 때가 많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이다.

거기다 밤에는 주루에 나가 점소이 일까지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일을 해가며 살아온 백건악도 한계에 부딪히는 건 당연하다. 그나마 점소이 일은 그나마 몸이 편했으니 다행이었지만··· 중노동을 마치고 하는 일이라 피로가 중첩되어 터지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요리가 담긴 접시를 옮기던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바닥엔 그가 흘린 요리가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반점의 손님들은 실수한 점소이가 실수한 것에 혀를 찰 뿐이다. 은근슬쩍 지배인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현실은 냉혹하다. 백건악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 그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아까운 음식을 실수로 쏟아버린 점소이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백건악은 손님들에게 먼저 인사한 후, 재빨리 쏟아진 음식과 깨진 그릇을 치운다.

그러자 지배인 서철극이 천천히 다가온다. 평소 성격이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왜인지 표정이 온화하다.

싸한 공기가 흐른다.

백건악은 이런 상황을 참으로 많이 겪었다.

“그거 치우고 지배인실로 와라.”

“예.”

아니나 다를까 그릇을 치우고 가니 탁상에는 은자 다섯 냥이 올려져 있었다.

본래 그의 한 달 봉급은 은자 석 냥이다. 두 냥이 더 올려져 있다는 것은······.

“미안하다.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

“예,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고 은화를 챙긴다.

백건악에게 이런 일은 익숙하다. 참으로 많은 이유로 일터에서 해고당했다. 이번에 해고되는 건 자신이 실수했기 때문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항의해봤자 손해 보는 것은 백건악이다. 거기다 은자를 두 냥이나 더 주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

백건악이 밤에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지배인실을 나가려 할 때.

지배인 서철극이 그를 불러세운다.

“이유도 묻지 않냐?”

“제 실수가 잦아서지 않습니까?”

“아니다.”

서철극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네가 평소에 성실히 일하는 걸 누가 모르겠느냐? 일머리도 좋고, 체력도 좋지. 접시를 깨트리는 실수? 그런 이유로 널 내보내는 게 아니다.”

“용비문(龍飛門)이군요.”

“···알고 있구나.”

용비문은 동려현의 패권을 쥔 사파 문파였다.

여기저기 연이 닿은 문파도 많았으며, 용비문의 문주는 무려 절정 수준의 무위에 올라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동려현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사업은 고리대금업이었다.

아주 악질적이고 독한 놈들이다.

백건악의 아비가 진 빚은 금자 한 냥이다.

분명 평범한 백성들에겐 큰돈이었지만, 백건악이 12년 동안 번 돈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아예 갚을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한 시진만 자고 종일 일해도 하루 이자를 내기도 빠듯했다.

동려현에서 도망친다?

그것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러다 잡히면 동생까지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백성들에게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은 절대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백건악은 이를 악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포기하면 안 된다.

“용비문에서 대체 너한테 뭘 원하는 거냐? 왜 너를 내보내라고···.”

“제 몸을 원하더군요.”

“···뭐?”

“어디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모양입니다. 제 체력이 쓸만하다면서요.”

“그, 그런···.”

그 말을 들은 지배인이 오히려 당황한다.

솔직히 그가 백건악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은자 두 냥을 더 챙겨주는 것뿐이었다. 백건악도 그걸 알고 있다. 단지, 너무 힘들어서 말이라도 해본 것이다. 기대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도와주겠는가? 세상에 믿을 놈들은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만 믿어야 한다.

“가보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 그래···. 모, 몸조심해라!”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는 지배인을 뒤로하고 백건악이 주루를 떠나간다.

오늘은 은자 두 냥을 더 받았으니 쉬는 것이 좋으리라. 백건악도 죽도록 일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닌 걸 안다. 체력을 비축하고 다시 새로운 일을 찾자. 은자도 생겼으니 동생 약도 지어주고, 좋아하는 고기 수육도 사서 가면 참 좋아하겠지?

동생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이미 손에는 수육이 들려 있었고, 다 무너져가는 집 앞이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다. 숨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집 안에는 백건악의 유일한 약점인 동생이 있었다. 용비문의 문도들은 백건악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다. 12년 동안 보아왔지 않은가?

“여어, 우리 건악이! 이제 오냐?”

두 장정이 건들대며 걸어온다.

그리고 백건악의 손에 들려진 것을 발견한다.

“씨발 새끼가, 갚으라는 돈은 안 갚고 고기를 처먹으려고?”

“팔자 참 좋다, 그지?”

용비문도가 백건악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선 손에 쥔 것을 뺏어가려 한다. 평소의 백건악이었다면 순순히 내어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그냥 힘을 뺐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반항심이 차오른다. 동생의 병이 악화되고, 체력으로도 힘에 부치다 보니 감정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용비문도 두 명은 그걸 기회로 삼았다.

백건악을 팰 기회로 말이다.

“와, 이 새끼 봐라? 우리한테 고기 주는 게 아깝다 이거냐?”

“그리고 너 일월루에서 다섯 냥 받았지? 오늘치 이자는 다 내고 고기를 산 거냐? 얼씨구? 이건 또 뭐야? 무슨 약이냐?”

“약은··· 동생에게 필요합니다.”

백건악이 손에 힘을 뺐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굳이 저들에게 대항하는 건 좋지 않다.

힘이 없으면 당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찌 반항할 수 있겠나?

쫘아악!

고기와 환약이 담긴 종이가 찢어진다.

백건악이 황급히 쏟아지는 내용물을 받으려 했지만, 장정의 발길질에 방해를 받아 밀려났다.

“개새끼들이···.”

“뭐? 태보야, 이 새끼가 지금 뭐랬냐?”

“개새끼라는데? 우리 아버지 욕한 거 맞지?”

두 장정이 우드득 뼈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백건악은 눈을 내리깔고 체념했다. 동생의 약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만 참았으면 됐다. 흙이야 털어내면 됐는데, 오늘 왜 이럴까? 12년 동안 참아왔는데··· 왜 순간을 참지 못했을까. 동생의 약까지 바닥에 떨어트릴진 몰랐기 때문일까?

‘그냥 맞자.’

두 사람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맞으면 된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급소만 피하면 내일 일터에서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아니, 힘들긴 하겠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그렇게 자학하며 몸을 웅크린다.

장정들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발을 올린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백건악이 반항하지 않더라도 저들은 자주 폭력을 행사했다. 어쩌면 오늘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백건악에게 풀려는지도 몰랐다.

백건악이 몸을 웅크린다.

맞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단지, 멍이 든 모습을 동생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

‘제기랄···.’

울분을 삼키며 폭력을 기다린다.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솔직히 중노동으로 단련된 백건악의 근력이라면 저 무늬만 무림인인 놈들을 이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용비문도의 정예들은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진짜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그들의 검이 동생에게 향하게 할 수는 없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온다.

차갑고 낮은 목소리. 아직은 조금 앳된 느낌이 나기도 한다.

“거기 개새끼들.”

“······?”

두 장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설마 우리한테 한 말인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지금 우리보고 그랬소?”

“맞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용비문도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오호라, 협객 나으리가 납셨구만!”

“킥킥, 그러니까. 줘 터지려고 작정했나?”

백건악이 의문의 사내를 바라본다.

두 장정에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대체 왜···.’

이제껏 백건악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없다.

그가 용비문에 빚을 졌다는 걸 안 이들은 거리를 두기 바빴다. 그건 당연했다. 현실이었다.

“용비문의 사람들이니 나서지 마십시오!”

“넌 닥치고 있어라. 네 동생까지 죽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사태를 막아보고자 백건악이 나섰건만,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됐다.

용비문도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의 눈빛에 살의가 번뜩이고 있다.

그 순간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비문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왜 대체 도망치지 않는가?

“죽여?”

처음엔 체격에 비해 앳된 목소리라 생각됐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목소리가 달라졌다. 왠지 모르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백건악은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굴 죽인다는 거지?”

눈 깜빡할 사이, 의문의 사내가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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