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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43화 (43/316)

넌 약하다

제갈세가의 암혼진은 빛이 들지 않는 밀실에서 침입자를 막아내고 척살하는 진이다. 내부는 마치 미로와 같았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고 얻은 초감각을 시험하고, 적응하기에 좋은 진이다. 황극린은 진에 관한 설명을 듣지 않았다. 본능적인 감각을 키우기 위함이다.

황극린은 과거로 돌아온 뒤, 죽음의 위험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와룡이 만든 시험은 분명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암혼진은 다르다. 시시각각 사방에서 날아드는 암기들이 쇄도한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피해야 한다.

따각.

왼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황극린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보법을 밟았다.

암혼진은 소리 또한 함정이었다.

암기는 소리가 난 방향이 아니라 뜬금없는 정면에서 날아왔다.

쉬이익!쉬익-!

쉭!

황극린이 자리를 옮기자 여러 개의 암기가 동시에 쇄도한다. 살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공격의 향연이다. 황극린은 공간의 떨림을 감지하고 암기를 피해낸다. 암혼진은 미로와 같은 방을 통과하여 출구로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발을 옮길 때마다 암기가 날아든다. 때로는 피하기도하고, 때로는 쳐내기도 하며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나갔다. 보통 암혼진에 갇힌 이들이 쇄도하는 암기가 무서워 제자리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공간의 떨림.’

암기가 공간을 가를 때,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있다. 황극린은 눈을 감고 암기의 모양을 생각한다. 동시에 언제쯤 자신의 몸에 닿을 것인지 계산한다. 본능적인 반응이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탁! 타타탓!

간발의 차이로 암기가 황극린의 몸을 스쳐 갔다. 암혼진에 처음 들어왔을 땐, 혹시 몰라 더 크게 반응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암혼진의 출구에 도달했을 때.

황극린은 중급에 암혼진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그가 중급 암혼진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일 각이었다.

* * *

“이게 대체···.”

암혼진은 이미 오래전에 통과했다.

일류에 이른 고수들도 중급 암혼진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무인은 시각에 의존하여 적에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했으니까. 하지만 암혼진은 어둠 속에서 암기를 피해야 하기 때문에 몹시 까다롭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종일 암혼진에 갇혀있기도 한다.

하지만 황극린은 암혼진을 가볍게 통과했다.

중급도 물론이고 상급의 암혼진까지 말이다.

지치지도 않는지 황극린은 다음 기관진식으로 안내해달라고 요구했다. 오늘 제갈소희가 황극린을 수행하며 안내한 기관진식만 7개였다. 말이 7개지 이미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절반 이상 통과한 것이다.

마지막엔 오기가 생긴 제갈소희가 초절정의 고수도 통과하기 힘든 구곡미혼진(九曲迷魂陣)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보란 듯이 진을 통과했다.

황극린의 경지가 초절정에 올랐다는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된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진짜 천재?’

제갈세가는 육대세가에 속하진 않았지만, 무림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다.

그렇기에 제갈소희는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을 만나본 적이 있다. 하지만 황극린처럼 아예 경지를 추측할 수 없는 이는 없었다.

‘이런 재능이 있었다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제갈소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그에 관한 정보는 솔직히 말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양양현에 자리를 잡은 백결문(白潔門). 중소 문파에 불과했지만, 백결문 소문주의 관한 정보를 간단히 정리해도 종이에 빼곡하게 열 장은 채울 수 있다. 사람의 행적이란 쌓이고 쌓이는 것이니까.

하지만 황극린의 정보는 종이 한 장을 채우지 못한다.

이러한 재능이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다?

무언가 있다.

황극린에겐 자신이 짐작하지 못하는 은밀하고 거대한 비밀이 있다. 분명히.

“오늘은 그만하겠습니다.”

황극린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쳐서 그만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은 가벼운 훈련에 불과했다는 듯이 말이다.

“황 공자님.”

“예.”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대체 어디에서 무공을 익힌 건가요?”

황극린은 광성문에서 개최한 천하광명대회에 참가할 때 말했던 것을 그대로 답했다. 일인전승의 문파에서 무공을 사사했으며, 사부의 존함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황극린이 익힌 무공이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이며, 그의 보법은 흑살문에서 배웠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대답이 오히려 무림에선 의심을 키울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제갈소희를 이해시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황극린에 입장에서 제갈소희는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군요.”

제갈소희는 그게 말이 되냐며 따져 묻진 않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황 공자님. 고생하셨어요.”

황극린이 뚜벅뚜벅 별채로 돌아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갈소희의 눈이 반짝인다.

‘역시 황 공자님은···.’

그녀에겐 무림이란··· 아니, 제갈세가는 일종의 족쇄였다.

재능이 있음에도 신분의 한계에 만개할 수 없다.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언젠간 무림을 바꾸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아직은 작은 꿈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언젠간 그것을 실천할 때가 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과연 황 공자님의 뒤엔 누가 있을까? 설마···.’

이름 없는 도인이 과연 누굴까?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가르침이 없으면 홀로 무공을 익힐 수 없다. 저런 수준의 무인을 키울 수 있는 세력은 한정적이다. 당연히 제갈소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파가 있었다.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사흑련 중 하나.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은··· 혈마교.

물론, 사흑련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지만.

만약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평화로운 무림에 균열이 생기겠구나.’

제갈소희가 진한 미소를 머금는다.

혼란의 시기가 되면, 재능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다.

* * *

“형님! 저도 따르겠습니다!”

제갈수는 황극린을 수행하겠다며, 주군으로 모시겠다며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황극린은 당연히 거절했다. 이제부터 황극린은 무림 곳곳을 방문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하를 들인다면 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제갈수가 훗날 비철각이라 불리며 무림에서 명성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의 제갈수는 황극린에게 짐만 될 것이 뻔하다.

“형님, 뭐든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갈수는 인면지주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그가 변화하는 계기는 10년 뒤에 찾아온다. 하지만 황극린이 인면지주의 실로 짜인 의복을 입고 융중산에 오름으로써 계기가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황극린을 주군으로 모시고 강호를 주유하고 싶었다.

그의 곁이라면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께도 이미 허락을 맡아놓았다. 그런데 정작 황극린이 거절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황극린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수밖에는 말이다.

하지만 황극린의 대답은 냉정했다.

“안 된다.”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억지로 짜낸 질문.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기도 했으며,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제갈수가 울먹이며 질문했다.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꿋꿋이 참고 황극린의 대답을 기다린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황극린이 천천히 말한다.

“넌 약하다.”

약하다. 약하다. 약하다.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리에서 울려 퍼진다.

“네가 있으면 방해가 될 거다.”

황극린은 해야 할 것이 많았다.

만약 그가 평탄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자 했다면, 무공을 익히지 않고 중원을 떠나 유유자적 살아갔으면 됐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무림에서 꼭 이루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진실을 들어 충격에 빠진 제갈수가 눈을 질끈 감는다.

황극린의 말이 맞았다. 제갈수는 이제껏 현실을 회피하며 살아왔다.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장남인 제갈현에게 도움이 되리라 자위하며 말이다.

‘난 쓸모없는 놈이다. 이제껏 탱자탱자 놀며 세월을 허비해왔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형님을 모시겠어? 그래, 형님의 말씀이 옳다···.’

독처럼 퍼지는 자괴감에 제갈수가 현실을 외면하려 할 때.

황극린이 말한다.

“그러니 강해져라.”

“에···?”

제갈수가 눈을 뜬다.

황극린이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제갈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강해지면 또 모를 일이지.”

제갈수의 머릿속에 뇌전이 일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제갈수는 멍청하지 않았다.

황극린이 몸을 돌려 제갈세가를 떠나간다.

“혀, 형님···!”

당연히 제갈수는 황극린이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가듯 말한다.

“각법을 익혀봐라.”

왜 익혀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처음엔 제갈수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갈수가 보여주는 순수한 충심은 이제껏 황극린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작은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황극린은 제갈수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가 제대로 마음을 먹고 지금부터 각법을 익힌다면 과거보다 더 빨리 명성을 떨칠 수 있으리라. 물론, 제갈수의 의지에 따라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각법···.”

황극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갈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난 어릴 때부터 뭔가 손보다 발이 편했었지.”

어떻게 황극린이 그걸 알고 있을까?

의문을 가질 법도 하건만, 제갈수는 황극린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황극린이 더 대단하게 보일 뿐이다.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갈수가 두 주먹을 꽉 쥔다.

다음에 볼 땐, 다른 모습으로 주군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력해야 한다. 황극린이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경험하며 수련했던 것처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해져야 한다.

제갈수가 몸을 돌려 바로 서고로 향한다.

일단 각법에 관한 이론부터 공부해야 한다. 확실한 계획과 목표를 잡고 수련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둘째에게 확고한 목표가 생겼군.”

“네, 황 공자님이 둘째 오라버니께 영향을 끼친 것 같네요.”

장남인 제갈현과 셋째인 제갈소희였다.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긴장되지 않으신가요?”

제갈현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젓는다.

“용의 머리가 아니라 뱀의 꼬리가 되려는 놈에게 긴장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둘째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제갈현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제갈수의 외가인 단목세가였다.

그리고 황씨가문이라는 거대한 자금줄을 걱정했다. 하지만 황극린이라는 놈은 금방 제갈세가에서 떠나갔고, 제갈수는 그를 주군으로 모신다며 어린아이들이나 품을 망상을 하고 있었다. 제갈현의 입장에선 오히려 걱정을 덜었다.

오늘로써 확실해졌다.

제갈세가의 가주는 자신이 될 것이다.

“가자.”

제갈소희는 제갈현을 따르며 생각했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어떠한 목표도 없던 제갈수에게 목표가 생겼다. 제갈현은 반대로 그에게 관심을 꺼버렸다. 어떤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며 경계했던 제갈현이었지만, 제갈수가 원하는 바를 보고나니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다.

제갈소희가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었다.

제갈세가에 혼란의 씨앗이 심어졌다. 제갈세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원로원주가 황극린을 주목했으며, 제갈수는 그와의 접점 중 하나였다. 제갈현은 현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작은 계기가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제갈수가 소가주 자리에 욕심내지 않을지 어찌 장담하겠는가?

‘황 공자님, 당신 덕분이에요.’

지금은 그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간 그의 출신이 어딘지.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기다려지는 제갈소희였다.

* * *

황극린은 제갈세가를 떠나 절강성으로 향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과거의 기억이다. 대부분 그것은 흑살문과 관련되어 있다. 황씨가문의 우사에서 살며, 가문의 사람들에게 차별받았던 것도 꽤 강렬하긴 했지만 흑살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황씨가문은 황극린이 마음을 먹으면 도망칠 순 있었지만, 흑살문은 그게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혈고독은 참으로 지독하게 황극린을 괴롭혔다. 처음 심장에 자리 잡을 땐, 매일 잠들기 무서웠다. 심장에서 살을 파먹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언제든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가득 찼었다.

다만 그러한 흑살문에서도 긍정적인 기억이 있었다.

정확히는 흑살문에 관한 기억이라기보다도 그곳에서 만난 인연에 관한 기억이었다.

‘동려(桐廬)현이라 했던가.’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가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늦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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