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42화 (42/316)

원하는 것

제갈세가의 실질적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갈세가의 원로원주 제갈여람.

그의 앞에는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니, 외관으로는 청년이라 생각될 법한 무인이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때문에 제갈여람은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인간의 눈동자엔 대개 감정이 묻어나곤 한다. 제갈여람으로선 아쉬웠지만, 굳이 머리카락을 까달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그냥 황극린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원하는 게 있더냐?”

황극린과 제갈여람의 내기.

실패할 것을 확신한 장난이 섞인 내기였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무림의 명숙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황극린이라는 인재를 언젠간 제갈세가의 품으로 오게 하려면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여러 계산이 깔린 행동이다.

과연 황극린은 무엇을 요구할까?

막대한 금자를 요구할까? 아니면 제갈세가에 쌓인 수많은 무공서를 요구할까? 당연히 모두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제갈세가의 원로원주 자리를 내놓으라거나 가문의 비전 무공을 알려달라는 허무맹랑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갈여람은 황극린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뭐든지 들어줄 수 있습니까?”

“원주의 선에서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

보통 이런 상황에서 기가 약한 사람은 상대가 무엇을 요구할까 전전긍긍하곤 한다. 하지만 제갈여람은 태평하게 뭐든 말해보라는 듯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한다.

“제갈세가의 다른 진법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진법이라? 무슨 의도일까? 진법서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진법을 경험해보고 싶다라··· 제갈여람이 진중한 눈빛으로 황극린을 마주한다. 이미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사라졌다.

“그분의 진 안에서 무엇을 얻은 것이더냐?”

제갈여람은 그곳에서 현실을 깨우쳤다.

환상을 갈구하며, 허무맹랑한 것을 믿기보다는 자신이 이제껏 배웠던 것에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환상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에서 얻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령 제갈세가의 가주는 그곳에서 죽은 어머니를 보았으며, 유약한 성격이 더 예민하게 변했다. 그로 인해 원로원의 권한이 더욱 강해졌기에 원로원주의 입장에선 크게 나쁠 것은 없었지만, 어쩌면 황극린이라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비밀을 보았을 수도 있었다.

“원로원주님을 보았습니다.”

황극린의 말에 제갈여람이 황당하다는 듯 말한다.

왜 하필?

“나를 보았다고?”

“예, 진법 안에서 더 수련하라고 하시더군요. 진법 내에서 충만한 기운이 화산과 무당과 같은 천하의 명산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한데···.”

그랬다.

진법 내부에는 환상을 구성하는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곳이라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화산과 무당산의 정기와 비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넌 고작 반나절만에 진을 빠져나왔었다.”

“예, 거절했습니다. 환상인 것을 알았거든요.”

“허허···.”

왠지 모르게 황극린이 원로원주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제갈여람은 그에게 제갈세가에 더 머물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황극린이 요구하는 것을 듣고 그에 맞는 방안을 제시해주려 했다. 그런데 환상진에서 자신을 만나 진에 더 머물라는 제안을 거절했단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제갈세가의 진법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더냐?”

“제갈세가의 진은 중원 제일 수준이라 들었습니다. 그것을 경험해본 것만으로도 경험이 되겠지요.”

중원 제일이라는 말에 제갈여람의 안면 근육이 풀어진다.

황극린은 고작해야 열다섯의 소년일 뿐이었지만, 그에게 칭찬은 받는 것이 왠지 기쁘다. 인정을 받는다고 해야 할까?

황극린은 그분이 남기신 시험을 쉽게 통과하지 않았는가?

대화가 무르익을 때 물어보려 했었지만,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았기에 제갈여람이 묻는다.

“한 가지 궁금하게 있다.”

“예.”

“어떻게 그분의 시험을 그리도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

황극린이 진법의 천재일까?

한평생 제갈세가에 있었지만, 저런 재능은 보지 못했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제발로 제갈세가를 뛰쳐나간 그놈도 와룡께서 남기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갈세가의 피를 잇지도 않은 한 소년이 그것을 덜컥 통과했다.

대체 어떻게?

아무리 혼자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게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감이라고 할까요.”

“감이라?”

“예.”

제갈여람은 황극린이 숨기는 것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걸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자신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은 있었다. 무력으로 겁박하여 원하는 바를 취할 수도 있겠지만, 제갈세가가 그 정도로 타락한 문파는 아니었다. 현 중원의 정(正)과 사(邪)의 개념이 모호해졌다고는 하나, 제갈여람은 최소한의 선은 지킨다.

그렇기에 그는 원로원의 수장이 된 것이다.

“네 말을 믿으마.”

마치 다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겠다는 듯, 제갈여람이 미소를 띤 얼굴로 말한다.

당연히 황극린은 거짓말한 게 아니었으니 제갈여람의 은근한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했다. 제갈여림이 화제를 전환한다.

“그리고 네가 아직 모르는 게 있다.”

“무엇입니까?”

“그분의 시험은 인간을 해하려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도 추측일 뿐이지만··· 후학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시험일 뿐이지. 허나, 제갈세가의 진법은 대부분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무공의 고수도 죽일 수 있는 살상력을 가진 것들도 있지.”

오히려 그게 황극린이 원하는 바였다.

인면지주의 내단으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 아직 완벽하게 적응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황극린은 제갈세가의 진법을 돌파하여 초감각에 완벽히 적응하려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

“감당하겠습니다.”

“허허허···.”

대체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황극린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으며 강단이 있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제갈여람의 마음에 쏙 들었다.

“좋다. 내 약조한 것이 있으니 허락하마. 본가의 모든 진을 경험할 수 있게 조치하겠다.”

“감사합니다.”

황극린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모른 체해도 무시할 수 있는 내기였다. 황극린 또한 무림을 많이 겪어보았다. 소위 협의를 지킨다는 정파인들이 뒤에서는 온갖 추악한 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솔직히 제갈여람이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도 상정했었는데, 이렇게 호쾌하게 허락하니 고마웠다.

“셋째인 소희가 네 곁에서 보좌할 것이다. 진법의 이론으로는 본가에서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 그러면서도 현실을 모르지 않는 아이니 도움이 될 거다.”

셋째라면 제갈소희 말인가?

그러고 보니···.

‘냉화비검(冷話費劍)을 죽이는 임무 때, 그녀의 이름을 들었었군.’

문득 기억이 났다.

그가 207호로 불렸을 때, 살행을 나서면 임무에 관련된 이들을 철저히 조사한다.

냉화비검. 강호 백대 고수 중 하나였으며 정파인이었지만, 뒤에서는 사람을 노예처럼 사고팔며 대마두나 할 법한 악행을 저질렀던 놈이다. 그를 죽일 때, 분명히 제갈소희에 관한 정보를 우연히 취득하게 됐다.

그녀는 분명히···.

‘북해빙궁과 교류하고 있었다.’

북해빙궁은 중원의 거대한 네 개의 악(惡) 중 하나였다.

사흑련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그들은 호시탐탐 중원 침공을 노리고 있었으며, 과거에 몇 번이나 침공을 감행했었다. 물론, 구파일련과 육대세가를 위시한 정파인들에게 패배하여 다시 그들이 있는 북해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재의 제갈소희는 모르겠지만 13년 뒤의 제갈소희는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뭐, 애초에 표적은 그녀가 아니었기에 더 깊숙하게 파고들진 않았었다. 더군다나 황극린이 소속된 흑살문도 사흑련 중 하나였으니 굳이 북해빙궁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황극린은 사흑련이나 흑살문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흑살문이 내린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상관없지.’

황극린이 알고 있는 미래란 바뀔 수 있다.

1년 동안 창고에 박혀있었어야 할 장보도가 갑자기 튀어나와 서문취아의 손에 들려졌다. 황극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본래 흑살문에 있었어야 할 그가 중원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조금씩 바뀌리라.

그렇기에 지금 당장 제갈소희나 북해빙궁에 관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미래를 생각할 게 아니라 성장을 생각해야 할 때다.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건 일신의 무력이다. 제갈세가에서 진을 경험하는 건 초감각에 완전히 적응할 기회였다.

황극린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제갈여람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들어보니 두 사람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황극린이라는 인재를 확실히 제갈세가의 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가족이 되는 것이다. 제갈소희라면 황극린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긍적적인 대답.

제갈여람은 일단 그것으로 만족했다.

* * *

제갈소희는 원로원주에게 은밀한 임무를 받았다.

곁에 있으며 황극린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라는 게 그녀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그녀는 가주의 자식 중에서 재능으로는 단연 최고였다. 학문이면 학문, 무공이면 무공 진법까지도 폭넓은 재능을 자랑했다.

‘짜증 나는 임무.’

그렇기에 제갈소희는 불만이 있었다.

고작 이런 일을 맡으려고 매 순간 노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장남만이 권력을 쥘 수 있는 현재의 제갈세가에서 가주가 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은 없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안내 따위가 아니라.

황극린.

그와 마주쳤던 순간은 분명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눈동자와 몹시도 아름다운 얼굴은 그녀로서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고작 그딴 걸로 사랑에 빠질 정도로 낭만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원주께서 왜 날 황 공자에게 붙였는진 알겠지만···.’

아마 황극린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있었지만,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려 하는 것일 테다. 당연히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진법을 소개해주고, 그의 수련을 도울 뿐이다. 얼른 그 시간이 지났으면 한다.

“형님! 저도 소희와 같이 형님을 보좌하겠습니다!”

“방해되니 가라.”

“옙! 형님!”

저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가라고 했다고 쪼르르 달려나가는 제갈수.

그런 오라버니를 보며 제갈소희가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첫째나 둘째나 오라버니들에게서 배울 것은 전혀 없었다. 물론, 대놓고 그들을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녀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제갈소희가 굳은 얼굴을 풀고, 차분한 미소를 지은 채 황극린에게 다가갔다.

“황 공자님을 뵈어요. 오늘부터 본가에 설치된 진법들을 안내하게 될 제갈소희라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황극린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한다.

“바로 가시죠.”

“오늘 둘러볼 진에 대략적인 설명을 해드리겠어요. 오늘 둘러볼 진은···.”

“아뇨.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제갈소희는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대답했다.

“오늘 소개해드릴 진은 몹시 위험하답니다. 기관과 연계되어 언제든 황 공자님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기관진식(機關陣式)이라 한다.

진법의 묘리와 물리적인 힘을 합친 제갈세가의 병기 중 하나였다. 제갈소희는 손님이 다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오히려 그걸 원하고 있었다. 초감각을 완벽히 활용할 기회를 말이다.

“좋군요.”

“네?”

뭐가 좋다는 건가?

시시각각 사방에서 날아오는 살의가 깃들지 않은 예리한 칼날. 그것은 고수의 방심을 유도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감행할 때도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다치거나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살상력을 가진 기관진식이었다.

“황 공자님께서 잘못되신다면 제 책임이 될 수도 있는 문제랍니다.”

그녀도 황극린이 재능을 보여 원로원주가 감탄한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은 진법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갈 소저께 폐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네, 황 공자님의 의견을 존중하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어코 말리면 역효과만 날 뿐이다.

첫 번째 기관진식에서 당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 뻔했으니 일단 먼저 안내하기로 했다.

“오늘 안내해드릴 진은 암혼진(暗魂陣)이에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날아드는 암기.

그 방에서 버티고, 출구를 찾는 진이었다. 침입한 이들을 가두기 위한 진이기도 하고, 학살하기 위한 진이기도 했다.

암혼진은 시작일 뿐이다.

황극린은 제갈세가의 ‘모든’ 진을 보기로 했으니, 초장에 확실히 진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초급이 아닌 중급으로 시작할 것이다.

제갈소희가 나름대로 꾀를 낸 것이다.

사내들의 무모함은 가끔 큰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으니까.

‘중급의 수준을 겪는다면,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