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환상진이군.’
황극린은 이와 비슷한 진법을 보았다. 나무가 울창한 서산의 가운데 황량한 사막과 외로워보이는 듯한 돌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황극린은 진법을 세상을 비트는 힘이라 생각했다. 허구의 존재를 실재의 존재로 현현시키는 것은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정답일까?
음양의 조화는 무공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다. 양의 기운이 있다면, 반대급부의 음의 기운도 존재한다. 얼핏 비어 보이는 공간에는 무언가가 가득 차 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솔직히 그러한 개념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어찌 모두 알 수 있으리? 세상은 그 자체로 경이로우며 신비롭고 찬란하면서도 혼란스러우며 괴이하며 암담하다. 황극린은 인면지주의 내단으로 발달된 감각으로 진법의 요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혼란스러운 규칙. 역설적이었지만 황극린은 본능적으로 발을 옮긴다.
한 걸음.
주의를 기울이며 한 발짝을 내디뎠다.
또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자 확신이 강해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극린은 공간(空間)에 다가간다.
거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 그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그는 공간에서 사라졌다.
* * *
원로원주 제갈여람은 당연히 자신이 내기에서 이길 것을 확신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입구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제갈세가에서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가주와 원로원주였다. 두 사람도 진법을 모두 이해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제갈세가가 낳은 역대급의 천재가 남겨놓은 ‘지도’를 보고 통했을 뿐.
그래도 진법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게 신기했다.
인면지주를 잡아 왔다는 건, 딱히 대단한 업적은 아니다. 제갈세가의 원로쯤 되면 온갖 무림의 비사를 알고 있었으니까. 간간이 무림인 중 한 명에게 일어나는 행운에 불과했다.
그래서 내기를 했다.
황극린이라는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셋째 아이처럼 붓과 종이로 진법을 분석할까?
아니면 가문을 뛰쳐나간 그 망나니 놈처럼 직접 몸으로 부딪칠까?
그분이 남긴 진법은 그러한 방식으론 풀 수 없었다. 원로원주인 제갈여람 또한 아주 오랜 기간 진법을 분석했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즐겁게 둘째가 만난 인연 황극린을 지켜보는 와중.
제갈여람이 감탄성을 흘려냈다.
“호오.”
첫 번째 길이 맞았다.
입구로 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방향과 힘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 확실히 저 ‘소년’은 진법에 재능이 있었다.
두 번째 발걸음.
처음보다 더 빠르고 확신에 차 있었다.
‘급해지면 안 되는 것을.’
제갈여람도 그분이 남겨놓은 진법에 들어갈 땐,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지도에 남겨진 방식대로 정확히 밟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진법에 진입하려면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저것을 만든 이유가 후학들의 마음 수련을 위해서라 했던가?
우연인지 뭔지 황극린은 두 번째 길도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총 216걸음을 걸어야 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말이다.
‘거기다 발만 쓰는 것도 아니지.’
세 번째 길에서는 허리를 숙여 오른팔로 땅을 짚어야 한다.
진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길을 찾기란 힘들다. 당연히 세 번째 길엔 닿지 못할 것···.
“······?”
여유롭게 황극린을 지켜보던 제갈여람이 눈이 가늘어진다.
세 번째 길도 정확하게 통과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할 수가 있지? 자신도 처음 진법의 존재를 알고 길을 나섰을 때, 열 번째 길까지는 홀로 독파했다.
하지만 무려 다섯 시진이나 걸렸다.
한 걸음을 내디디고, 길을 분석하며 나아가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무언가?
황극린은 눈 깜빡할 사이에 세 번째 길로 들어섰다.
제갈여람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제갈여람이 보지 못했다. 갑자기 황극린의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아니, 저건 걷는 게 아니라···.
“미, 미친!”
“······?”
제갈수는 당연히 그분이 남긴 진법을 모른다.
평소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으시며, 심지어 어머니인 단목화마저 어려워하는 제갈여람이 욕설을 내뱉고 있다. 몹시 당황한 얼굴로 말이다. 재빨리 황극린이 선 공터를 바라본다. 그는 전혀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 다경이 채 지나기도 전.
“뭐, 뭐지? 혀, 형님이 사라졌어?”
“······.”
“원주님, 갑자기 형님이?”
원로원주가 멍한 얼굴로 황극린이 사라진 공터를 바라볼 뿐이다.
‘진짜 진의 입구를 통과하신 건가.’
당연히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제갈수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원로원주의 황망한 표정을 보면서 말이다.
‘역시 우리 형님!’
제갈세가의 사람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하나는 수많은 인재를 수하로 삼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만의 집단을 이루는 것. 대부분의 식솔이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몇몇은 진정한 주군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현재의 제갈수처럼 말이다.
‘형님은 무림에 한 획을 그으실 분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미 그는 주군을 찾았다.
* * *
“대단하군.”
광활하게 펼쳐진 초목.
주변의 광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저 멀리 거대한 산이 보이고, 강렬한 물줄기가 주위로 흐르는 것 같았다. 생명이 태동하고 있다. 들숨에서 느껴지는 초록빛의 향. 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하지만 이내 황극린은 무언가가 결여됐다는 걸 깨달았다.
‘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울창한 숲에 벌레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발에 느껴지는 촉촉한 흙바닥과 나무의 질감마저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이곳에 동물이나 곤충 따위는 없었다. 모두 식물뿐이었다.
‘혼(魂).’
식물들과 동물들의 차이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애초에 뇌불의 비동에선 생명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울창한 숲속에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보자.’
황극린은 문득 궁금증을 느꼈다.
작은 공간에 숨겨진 거대한 환상.
이곳의 끝은 어디일까? 얼마나 멀리까지 뻗어있을까?
황극린이 우거진 숲속을 헤치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이곳은 끝이 없다.’
실제로 끝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감각이 피부에 와닿는다. 이곳은 확실히 정상적인 공간은 아니다. 분명히 그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어느샌가 지나쳐왔던 곳을 또 지나치고 있었다.
끝이 아니면서도 끝이다.
모순적이었지만 황극린은 그대로 이해했다.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런 공간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미 원로원주는 이곳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혼을 가진 동물들이 살고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수많은 나무 중에서 과일을 맺은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구나.’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황극린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고 얻은 짐승의 ‘직감’ 이곳은 생존하려고 만든 공간 따위가 아니었다.
여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이 공간이 마음에 드느냐?”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인자한 웃음을 지은 원로원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군요.”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숲이 펼쳐졌으니 당연히 신기하겠지.”
그는 뒷짐을 진 채로 황극린에게 다가온다.
그리고선 묻는다.
“와룡께선 이러한 환상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황극린은 어느 정도 눈치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원로는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긴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믿어서는 아니 된다. 제갈세가는 무력으로는 다른 무가에 비해서 뒤떨어진다. 그런 그들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계략을 꾸미는 데 능하다.
다른 감정을 인자한 웃음으로 감춘 것부터 알 수 있었다.
원로원주 제갈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이곳은 무당산과 화산과 같은 천하제일이라 칭송받는 명산의 기개와 정기를 품고 있는 장소다.”
“······.”
“이곳에서 수련하고 싶지 않으냐?”
은근한 물음이었다. 마치 황극린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있다는 듯이 말이다.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
황극린의 대답에 제갈여람이 고개를 갸웃한다.
“넌 힘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더냐?”
“원합니다.”
“그럼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 이곳은 수련하기엔 최적의 장소가 아니더냐?”
“환상일 뿐이니까요.”
“환상일 뿐이다?”
“예.”
순간 황극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묵철 비수가 제갈여람의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쿠, 쿨럭··· 대체 이게 무슨··· 짓!”
“···진짜 현실 같긴 하군. 하지만 내가 모르는 제갈세가의 무공까지 환상으로 만들어낼 순 없는 모양이야.”
황극린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공간이 무너져내렸다.
“······.”
공터의 중앙.
이미 달이 높게 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으며, 공터의 앞에는 제갈수가 양반다리를 한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진법의 기운이 희미해져 있었다.
황극린은 직감적으로 다시 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까딱하면 속아 넘어갈 뻔했어.’
황극린은 내공이 몹시 부족하다.
이미 육신은 1갑자의 내공을 다루어도 부족한데, 그가 품은 내력은 고작해야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환상으로 만들어진 숲속의 정기는 충만했다. 숨만 쉬어도 내력이 늘어날 것만 같았다. 제갈여람의 제안은 달콤했다.
또한, 그의 눈빛에서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인재를 발견한 군사의 시선.
그런 제갈여람의 의도를 이용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느껴진 거대한 기운은 매혹적이었다. 환상은 그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며 유혹했다.
‘조금 허무하긴 하군.’
환상 속에서 보았던 광활한 숲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느꼈던 감정은 ‘욕심’이었다. 이런 장소라면 무엇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막상 얻은 것은 없었다. 너무 허무하게 진에서 빠져나왔다.
‘아니면 빨리 현실로 돌아온 것이 다행일 수도 있나?’
고개를 들어 밝은 달빛을 마주한다.
체감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밤이 되었다. 만약 그곳에서 수련했다면··· 원하는 만큼 내력을 얻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됐을까?
이것이 진을 만든 사람의 시험이라면,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진을 빠져나왔다는 게 통과라는 말일까?
그럼 여기서 황극린이 얻었던 것은 무엇일까?
여러 의문을 동시에 떠올리며 황극린이 제갈수 앞에 선다.
“제갈수.”
“음냐··· 조금 더 잘래애애애···.”
황극린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악!”
정신이 번쩍 든다.
뇌불의 비동에서 돌벽을 찌르던 괴물 같은 손가락이다. 제갈수는 극심한 고통에 잠에서 깼다.
“안에서 자라.”
황극린이 무심하게 말하고 떠난다.
제갈수가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엔 복합적인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원주께선 최소한 칠주야 이상은 진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반나절.
황극린이 와룡(臥龍) 제갈량(諸葛亮) 시험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 * *
황극린이 진에서 빠져나왔다는 보고를 들은 원로원주 제갈여람이 눈을 감는다.
‘내가 진에서 빠져나오는 데 걸렸던 시간은 보름이었다.’
그는 숲을 뒤져가며 선조의 뜻을 모두 파악하려 했다. 숲을 탐색하던 중 나무의 줄기엔 돌로 새겨놓은 듯한 글귀를 발견했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갈여람은 자신이 와룡께서 남긴 깨달음을 찾았다는 생각에 온 세상을 가진 듯이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에 새겨진 글귀는 이미 그가 보았던 것들이었다.
팔진도(八陣圖).
선조께서 남기신 제갈세가의 보물. 하지만 진법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발전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선 그리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진법은 아니었다. 단지, 그분께서 남겼다는 이유로 고이 모셔두고 있었을 뿐이다.
제갈여람은 팔진도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분이 남기신 진짜는 진법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엔 뭔가 있어 보이는 숲만 있었을 뿐이다.
결국 제갈여림이 환상의 헛됨을 깨닫고 밖으로 나오자 전대 원로원주 제갈여풍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냐는 질문에 제갈여람은 답하지 못했다.
단지, 팔진도를 보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됐다.”
전대 원로원주 제갈여풍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제갈여람은 홀로 진의 존재의의에 대해 고찰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제갈여람 나름대로 해답도 찾았다. 그것은 한 줄로 표현하기 힘든, 삶이라는 것에 관한 정의였다. 그 깨달음은 아직도 그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일 다경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입구를 찾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진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갈여람은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잡을 수 없겠군. 그 아이는 결코 본가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겠지.’
일 다경만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제갈여람은 확신했다.
제갈세가의 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중원에 알려진 황극린에 관한 정보를 모두 모았다. 장남 제갈현이 보았던 정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말이다. 제갈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황극린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아니다.
제갈세가는 그를 품지 못한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첫째에게 전하라.”
작은 등불 속에 생겨난 그림자가 작게 흔들린다.
“하려던 일을 멈추라고.”
흔들림이 멈춘다.
하지만 제갈여람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둘째··· 아니, 셋째를 불러와라.”
그림자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