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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38화 (38/316)

제갈세가

“혀, 형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갈수가 인면지주를 들쳐 메고 융중산을 내려가는 황극린을 쫓는다. 저 커다란 괴물을 등에 메고서 어찌 저렇게 빠를 수 있는가? 제갈수는 혀를 내두르며 겨우 그를 쫓아갔다. 평소 무공 수련을 하지 않았던 게 여러모로 후회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일단 저 의문의 사내를 쫓아야 한다는 본능이 앞선다.

숨이 차올라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꾸역꾸역 제갈수가 황극린을 따랐다.

“헤에엑! 헤엑! 헤에엑!”

융중산을 다 내려오자 황극린이 잠시 멈춰선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 제갈수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 것 같진 않았다. 아까 본 것은 기분 탓이었던가? 아무튼, 제갈수는 차오르는 숨을 눌러 담고 말한다.

“혀, 형님! 자,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할 말이 무엇이오?”

외관보다는 확실히 앳된 목소리.

제갈수는 조금 의아했지만, 설마 황극린이 자신보다 어릴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인면지주와 싸우는 모습을 보건데 적어도 자신보다 다섯 살 이상은 많으리라. 그런데도 눈앞의 황극린이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천재라 생각했다.

제갈수는 제갈세가에 있으면서 수많은 무인과 만났다.

황극린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정파 무림인에게 찾을 수 없는 지독한 효율성. 권법을 사용하면서도 중간중간 비수를 출수하는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했다.

“은혜를 갚게 해주십시오. 제 목숨을 살려주셨지 않습니까? 꼭 갚고 싶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제갈수였다.

본래 그의 성격은 이렇지 않았다.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으며,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가 그를 바꿔놓았다. 인면지주에게 머리통이 뜯길 뻔한 순간, 과거를 후회했다. 거미줄에 매달려 있으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이 수치스러웠다.

하룻동안 제갈수의 내면은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이것을 계속 유지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전 제갈세가의 제갈수라고 합니다.”

제갈수?

황극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제갈세가 유일의 각법가 비철각(飛鐵脚)···. 내가 죽기 얼마 전 무림에서 막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천하를 논할 만큼 대단한 고수는 아니었지만 늦은 나이에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게 신기한 노릇이다. 뭐, 재능은 있었으나 젊을 적에는 노력하지 않았다는 게 맞으리라.

사실 제갈수는 과거 똑같은 날에 인면지주와 마주하지 않았었다.

인면지주가 융중산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자신과 똑같은 종의 냄새가 났기에 은거지에서 나온 것이다. 마침 지나가다가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는 제갈수를 발견했을 뿐이고 말이다.

황극린은 제갈수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갈세가 정도면 인연을 쌓아두면 나쁠 것은 없었다. 또한, 인면지주를 어떻게 처리하나 싶었는데 제갈세가라면 값을 잘 쳐주지 않을까?

“그럼 갚으시오.”

“다, 당연하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괴물은 제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은인께서 그런 흉측한 것을 들게할 수는 없지요!”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의욕이 과다한 제갈수였다.

하지만 황극린이 인면지주를 넘겨주자 그 생각이 금세 바뀌고 말았다.

‘미, 미친! 이렇게 무거웠다고?’

그 크기만큼이나 미치도록 무겁다! 거미 주제에 얼마나 무겁겠냐는 생각은 완전 오판이었다. 당장이라도 인면지주에 깔려 다시금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내가 들겠소.”

황극린의 차가운 목소리에 제갈수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는 인면지주를 등에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인면지주의 무게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대단하다. 얼마나 수련을 했으면···.’

산을 내려올 때도 인면지주를 짊어지고 내려왔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으리라. 그렇기에 제갈수는 인면지주의 무게를 얕보았었다.

인면지주를 들어보니 확실히 느꼈다.

저 사내는 꼭 인연으로 붙잡아두어야 한다.

“가, 같이 갑시다!”

워낙 걸음이 빨라서인지 엄청 앞서있었다. 제갈수는 황급히 뛰어 그를 따라갔다.

* * *

제갈세가는 양양(襄陽)현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육대세가엔 들어가지 못하지만, 육대세가라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제갈세가는 역대로 무림맹의 총군사를 배출했으며, 황실과도 긴밀한 연을 맺고 있었다. 그들은 무인보다는 문인(文人)의 길에 주로 오르곤 한다.

물론, 무공의 수준도 절대 낮은 편이 아니다.

학자 가문이라며 무인에게 무시당할 때도 가끔 있지만, 그들의 무공은 육대세가와 비교해서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단지,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다. 재능이 있는 사람만 익히면 된다.

제갈세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알아서 재능을 찾아 만개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예외는 있다.

바로 가주의 직계들이었다.

제갈세가는 예로부터 머리가 비상하면서도 냉혹한 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제갈세가라는 가문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형제자매들의 등과 심장에 칼을 찔러놓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꼭 직접 칼을 찌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상대의 실수를 끄집어내서 몰락하게끔 유도한다.

당연히 형제자매들은 그것으로 더욱 강인하게 성장했지만···.

제갈세가 원로들의 입장에선 너무 비효율적인 희생이었다. 직계의 인재들은 매년 죽어 나갔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쓸모가 있었다. 재능도 펼치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게 너무도 아까웠다.

그렇기에 그들은 장남에게 권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후에 태어나는 장남의 동생들에겐 선택권이 주어진다. 장남을 뒤에서 밀어주거나 아무런 관심도 없이 태평하게 살아가거나 말이다. 장남의 권력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오래 정착된 제도는 아니고, 전 세대 때부터 시작한 제도였다.

전 세대는 그런 장남 위주의 권력 집중화가 확실히 빛을 보았다. 현재 무림맹의 제1 군사가 된 제갈조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제도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남을 따르지 않는 직계들은 배척받았으며, 그들은 제갈세가에 분노를 품을 때도 있었다. 능력이 있는데도 펼치지 못하게 막는다며 생각하는 이들이다. 특히 이제는 제갈세가의 품을 떠나 흑도의 길로 들어서 버린 통비원 제갈창해가 이 제도의 부작용이다.

물론, 원로들은 제갈창해는 본래 제갈세가에서 버티지 못할 심성을 타고났다며 제도의 불완전함에 대해 일축했다.

또한, 장남의 자질이 영 부족하면 원로들의 판단에 따라 차남에게 그 권한을 이양하는 제도가 있다고 명시했다. 원로들의 결정이 곧 제갈세가의 결정이었다.

제갈세가는 그렇게 장남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형제자매 모두가 장남의 성장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장남 또한 부단히 노력한다. 3살 때부터 장남은 원로의 압박을 받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차남에게 그 지위를 넘겨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장남이 고통받고 있냐고?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상황을 즐기는 성향도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한 살 터울에 불과했지만, 제갈현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에게 굽신댄다. 그는 제갈세가에서 선택된 왕이었다. 권력의 맛은 달콤했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쾌감은 그 어떤 것과 비할 수 없었다.

제갈세가의 장남 제갈현에게 제갈수는 눈엣가시였다.

어릴 때부터 장남을 밀어주겠다는 걸 포기하고,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었다. 차남이었기에 장남이 부족하면 권한은 모두 그에게 돌아간다. 언젠간 자신의 달콤한 권력을 빼앗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오라버니, 들어가도 될까요?”

셋째 제갈소희.

제갈현에겐 둘도 없는 동생이다. 그녀는 비상한 머리로 제갈현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그녀는 형제자매 중 특히 무의 자질이 뛰어났으며, 진법에 관한 재능도 특출났다. 그녀가 있으면 제갈현은 끝까지 장남의 권한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들어오려무나.”

자상한 목소리로 제갈현이 대답하니 제갈소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둘째 오라버니가 돌아오셨어요.”

“융중산에서 또 태평하게 서책이나 읽다 돌아온 모양이군.”

“아니에요.”

아니라고?

제갈소희의 표정은 심각했다. 제갈현 또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의문의 사내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왔답니다.”

“의문의 사내?”

“예, 그 사내는 인면지주의 사체를 가지고 있더군요.”

“인면지주라···.”

“사내의 이름은 황극린. 지금 더 알아보고 있긴 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인이랍니다. 외관상 나이는 20대 초반이라 판단됩니다. 둘째 오라버니가 인면지주를 사냥했을 리가 없으니··· 황극린이 인면지주를 사냥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제갈수, 이놈이 드디어 야욕을 드러내는구나.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제갈수는 20살이 될 때까지 아무런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남의 자리를 유일하게 위협할 차남이라는 걸 잊진 않았다. 그런 놈이 의문의 고수와 함께 가문에 돌아왔다. 그게 무엇이겠는가?

‘원로들에게 보여줄 생각이군.’

감히.

당연히 그것만으로 차남에게 권한이 이양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원로들의 마음이 변화할 수도 있다면 기필코 막아야 한다.

“가보자. 내 직접 확인해야겠다.”

“지금은 안 될 겁니다.”

“왜?”

“황극린이 둘째 어머니를 뵙고 있거든요.”

“······.”

둘째 어머니는 차남 제갈수의 친모였다.

사실 제갈수가 장남의 권력 집중화 제도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힘이 컸다. 그녀의 배경은 육대세가 중 하나인 단목세가였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이러한 제도에 반기를 품고, 아들을 자유롭게 살게끔 의도했었다.

“그럼 그 앞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장남 제갈현과 셋째 제갈소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 * *

“은인의 은혜에 정말 감사드려요. 제 아들이 그런 흉포한 괴물에게 죽을 뻔했다니··· 정말···.”

우아한 기품을 가진 중년 여인이 상상만으로도 슬픔이 닥쳐오는지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제갈수도 울컥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단목화.

육대세가인 단목세가의 출신으로 제갈세가에 시집을 와서 제갈수를 낳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끔찍이 아낀다. 그가 무엇을 하든 응원하는 어머니였다.

“목숨값은 목숨값으로. 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은인께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단목화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깊게 허리를 숙인다.

“······.”

황극린은 과거 수많은 정파인들을 만나보았다.

그가 살수행으로 죽였던 이들은 정파의 탈을 쓰고, 흑도나 할 법한 짓을 했던 놈들이 많았다. 그런 입장에서 출신배경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자신에게 육대세가 출신의 여인이 허리를 숙인다는 게 의외이긴 했다.

“저 또한 결심했습니다. 형님은 언젠간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실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을 보필하여···.”

“난 당신의 형님이 아니오.”

“왜 그러십니까? 전 형님이 인면지주를 사냥하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형님을 모시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나이가 이제 15살이라는 걸 설명해야 하나?

아니, 오히려 더 귀찮아질 것이다. 그리고 전생의 나이로 따지자면 형님이 맞다. 아니, 거의 아버지뻘인가?

황극린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제갈세가에 온 진짜 이유는 인면지주의 사체에서 나온 부산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제갈세가 정도라면 제대로 된 값을 쳐줄 수 있으리라.

오랜 시간에 걸쳐 두 사람의 감사 인사를 들은 황극린이 일어선다.

단목화 또한 덩달아 일어서며 말한다.

“은인께서 언제든지 본가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인면지주의 사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각 분야의 인재들을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극린 또한 단목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는 순간부터 낮은 자세로 저리 나오는데, 황극린도 두 모자에게 호감이 조금 생긴 상태였다. 무림에서 좋은 인연은 많이 만들수록 좋았으니까.

“독채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문의 중요 손님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인데···.”

“수야, 은인께서 피곤하실 것이다.”

엄숙한 단목화의 목소리.

오래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황극린은 저런 아부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저런 사내들은 무림에서 많이 보아왔다. 억지로 아부를 떨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대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독채 따위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그것으로 자랑하듯 말하는 게 실례였다.

“예, 어머니.”

찔끔한 제갈수가 황극린과 함께 단목화의 방을 나섰다.

길목을 돌아 독채로 가려는 순간.

“수야, 어딜 그리 가느냐?”

제갈현을 마주한 제갈수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리고 왜인지 제갈현의 옆에 있던 제갈소희 또한 몸을 움찔 떨었다.

바람이 꽤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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