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능성
“······.”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다.
무당의 대청진인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광성문주는 당연히 영약을 주기가 싫었다. 난생처음 보는 놈이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영약을 날름 가로채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소중한 아들에게 먹이려고 애지중지 아껴오던 것이다. 아주 가끔 자신이 이걸 취한다면 어떨까도 생각할 정도로 귀중한 영약이었다.
“우승 상품, 소양단 아닙니까?”
자꾸 앞에서 자극하니 짜증이 치솟는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주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다시 저것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
당연히 생각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주는 척한 뒤에 후에 빼앗아온다. 출신 문파도 없었으니 뒤탈도 없으리라. 단지··· 황극린이라는 놈의 비무에서 보여줬던 실력이 걸리긴 한다. 만약 문주인 자신이 직접 나서도 이길 수 없다면? 문주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때 광성문주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
대체 이놈은 몇 살일까?
“하하하, 당연히 맞지···. 하온데 자네 나이가 올해로 몇인가? 체격에 비해 목소리가 어려 보이는데···.”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기려 해도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많았다.
황씨가문에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올 테니까.
“열다섯입니다.”
“······!”
일격에 비무에서 승리하던 것을 보면서도 크게 반응하지 않던 무당의 대청진인.
그가 벌떡 일어서고 만다.
“자네, 정녕 그 말이 사실인가?”
황극린이 휙 시선을 돌린다.
딱 봐도 나 도사요, 외치는 듯한 차림새에 순백의 수염을 곧게 길렀다.
“그렇습니다만.”
“허허허···. 이런 곳에서 인연을 만나게 되는구나! 빈도는 대청이라 하네. 무당에서 속세와 맞닿은 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네.”
“아, 예.”
대청진인이 눈을 번뜩인다.
근래에 무당파에선 속가제자를 꽤 많이 들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중원의 무인들에게 도(道)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라 하지만, 무당파가 속세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유가 더 컸다.
황극린은 속가제자로 안성맞춤이다.
아직 인성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무당에서 확인하면 된다. 무당산에서의 교육은 엄격하면서도 철저하다. 아직 어린 나이이니만큼 무당산에서 가르침을 받으면 도인으로 거듭날 수도 있으리라.
“어떤가? 빈도와 함께 무당에 가지 않겠나? 자네의 재능이 만개하도록 해주겠네.”
모두가 눈을 뜨악하며 대청진인과 황극린을 바라본다.
무당이 어딘가?
무한에서 꽤 재능이 출중하다던 광성문의 소문주가 5번에 걸친 시험을 치르고, 광성문에서도 금자를 헌납해가며 겨우 자리 하나를 따내서 무당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운이 좋게 무당파 도사의 눈에 들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무당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큰 기연인지는 무림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구파일련 중 하나인 무당파다.
대청진인에게 잘 보인다면, 속가제자가 아니라 정식제자가 될 가능성도···.
“괜찮습니다.”
지금 뭘 들은 거지?
모두가 의아해한다. 황극린이 비무에서 확실히 대단한 무위를 증명하긴 했다. 대체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진 모르겠지만 그의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정말 천재일 수도 있었다. 물론, 어릴 때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이 약관의 나이를 넘어서고 추락하는 경우도 왕왕 있긴 하지만··· 일단 무당파가 아닌가?
무당에 가면 없던 재능도 생겨난다.
구파일련이 괜히 구파일련이겠는가? 그들의 무공은 하늘과 맞닿았다. 그런 기연을 이렇게 걷어찬다고? 대체 뭘 믿고?
하지만 광성문주는 황극린의 대답에 눈이 번뜩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 놈이 분명하다. 이렇듯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리는 것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렇군. 만약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무당에 찾아와도 된다네.”
대청진인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지만, 더 강요하진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뜻이 없는 이를 강제로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상대를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압박하는 것은 흑도나 할 법한 짓이다.
“예.”
황극린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광성문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휘저으며 영약을 가져오라 했다.
“제1회 천하광명대회의 우승자는 황극린, 자네일세.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네.”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영약을 받아 챙긴다.
소양단. 무당파의 영약 중 하나로 취하면 공력뿐 아니라 집중력을 올려준다고 한다. 뭐, 내공이 많은 무인일수록 경지가 높다는 말이니 당연히 집중력이 높다. 단순히 있어 보이게 으레 하는 말이리라.
“감사합니다.”
“우아아아아-!”
때마침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어찌 보면 허무하기도 한 비무 대회였지만, 황극린이 결승전까지 일격으로 끝냄으로써 군중들에 큰 호응을 받고 있었다. 황극린은 군중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광성문을 떠나갔다.
“···괜찮으시오?”
광성문주에게 다가오는 국림장의 예일청.
당연히 광성문주는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고, 예선을 총괄했던 부문주를 쥐잡듯이 잡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지금은 자리를 빛내주러 온 귀빈들을 신경 쓰는 게 먼저였다. 황극린을 처리하는 건 그다음이다.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아들놈도 이번 일을 계기로 절치부심하여 더 성장할 것이오. 자, 다들 연회장으로 가십시다. 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귀빈들을 모시고 연회장으로 가고 있을 때.
소문주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광성문주에게 다가온다.
- 좀 있다가 이야기하자.
아버지의 심각한 표정에 소문주는 당장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황극린이 황씨가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보휘, 네놈은 내가 가만히 안 둔다.’
분명 어제··· 아니, 오늘 비무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우였다. 무당에서 만나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우애를 확인했다. 또, 두 사람의 배경이 서로 도움 줄 일이 많았기에 평생 갈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강철진의 착각이었다.
황보휘 그놈은 쥐새끼처럼 자신의 사촌 동생을 광성문에 보내 비무 대회를 망쳐버렸다.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황극린이 강철진을 일격에 이길 정도로 강하다는 점이었지만, 자존심인지 뭔지 그것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복수심만 불태우고 있었다.
‘개자식! 좆 같은 놈!’
* * *
황극린은 바로 무한을 떠났다.
그러면서 흔적을 지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할 것이다. 황극린은 무림인들의 어리석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뛰어드는 곳이 불구덩이인지도 모르는 채 달려들 때가 있었다.
광성문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뭐, 만약 황극린을 따라온다면 본보기를 보여줘도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다. 광성문은 무당에 소문주를 보낼 만큼 긴밀한 관계다. 분명 광성문이 잘못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무림에서는 힘의 논리가 앞선다. 당장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기껏 영약을 얻었는데,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무림의 명숙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상상만으로도 귀찮다.
황극린이 무한을 벗어나서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황량한 야산이다. 약초도 딱히 나지 않아 사람도 다니지 않아 보였고, 이곳이라면 영약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뇌불의 비동에선 영약을 취하는데 눈 깜빡임 한 번이면 족했지만, 지금은 또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지 않은가?
반 시진 정도 산을 타니 야생동물도 잘 다니지 않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그리고 광성문에서 얻어온 영약을 꿀꺽한다.
“······!”
* * *
“그게 무슨··· 황씨가문이 왜?”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도 의문입니다. 황씨세가에서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짐작하는 이유가 있었다.
서문취아 때문이 아닐까? 광성문의 소문주는 서문취아가 은근히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으레 사내들이 하는 착각 중 하나였다. 사실 서문취아는 그 누구에게도 친우 이상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당장 황씨가문에 보복을···.”
“잠시.”
광성문주는 당장이라도 직접 추격대를 꾸려 황극린을 추격하려 했다. 비무에서 보여준 실력으로 보건대 문주인 자신이 직접 나서야 사건이 해결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당장 황극린을 치는 것은 하책 중 하책이다.
분명 그들도 노리는 게 있으니 이렇게 행동한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으리라. 황씨가문은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회를 운영하고 있다. 무가로서는 당연히 광성문에 밀리지만 금자 또한 무림에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이번 일은 성급하게 행동하면 안 될 것 같다. 황씨가문 놈들은 계획적으로 일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
“계획적으로요?”
“그래, 황극린을 처음 본 게 황룡무관에서 수련할 때라고 했었지?”
“예.”
“그런 수준의 무인을 일 년 동안 키워낼 수 있다고 보느냐?”
“그건···.”
황극린의 재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 년은 아니다. 황극린은 황씨가문이 금자를 바쳐가며 키운 무인이 분명했다.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광성문의 명예를 이리도 추락시킨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우리도 단단히 대비해야지.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몇 배로 갚아준다.”
결연한 얼굴로 선언하는 광성문주.
황씨가문은 영문도 모르는 채 원수가 생겨버렸다. 황보휘가 친우 앞에서 황극린을 아끼는 척했던 업보가 돌아오는 것이리라.
* * *
영약을 취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눈 깜빡할 사이에 영약의 기운이 모두 흡수됐다. 당연히 단전으로 흡수되어 내공이 된 것은 아니다. 내공은 전혀 변화가 없다.
단지···.
‘왠지 모르게 정신이 조금 맑아진 기분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황극린의 과거 경험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거기다 중원을 통틀어서도 이렇게 영약의 기운을 빠르게 흡수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건 무영심결을 익혔기 때문일까?
혈풍뇌전신공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죽기 전 취했던 영약 인형혈삼 때문인가?
“전혀 모르겠군.”
이유까지는 알 수 없으나 황극린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현재 그의 약점은 내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있었다. 이제까지 영약을 취하기 전까진 가설에 불과했지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어떠한 영약을 취하더라도 ‘육신’ 그 자체에 흡수할 수 있었다.
소양단을 취했는데 내력 한 톨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체감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기분 탓? 황극린은 매번 자신의 몸 상태를 관조한다. 영약을 먹었다고 기분 탓으로 정신이 맑아졌다고 느낄 만큼 허술하진 않았다.
‘단순히 세맥에 흡수되는 게 아니다. 영약이 가진 성질이 육신 그 자체에 흡수되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특정한 성질을 지닌 영초나 영약을 취하면 어떻게 될까?
가령 양기(陽氣)를 품은 만련화리의 내단이나 음기(陰氣)를 품은 천년설삼 따위의 영약을 말이다.
그것이 과연 어떤 효과를 나타낼까?
몸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
황극린은 평소답지 않게 흥분했다.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길을 걷고 있었다.
때마침 황극린의 뇌리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남창을 나설 때, 뇌불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었다. 인면지주라는 영물이 융중산에 있다고 말이다. 장보도가 새겨진 의복을 가지고 가면 알아서 접근해올 것이라 했던가? 인면지주에게서 뽑은 실도 분명히 가치가 있겠지만, 지금의 황극린에겐···.
‘만약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면···.’
황극린은 인면지주의 내단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단순히 몸 자체에 흡수되고 끝나는 걸까?
아니면 인면지주의 내단이 가진 특성이 몸에 적용될 수 있을까?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뛴다.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모르지 않은가? 영약이랑 영물의 내단은 확실히 다르다. 보통 영물 따위의 내단은 독(毒)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단으로 정제하여 취하곤 했었다.
과연 인면지주의 내단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