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4화 (34/316)

특이한 참가자

사실 황극린은 영약을 지금 당장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흑살문의 살수들에게 마련된 은거지. 상처 입은 살수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소에는 반년 정도의 공력을 품은 하수오가 있다. 최상급 살수 이상만 쉴 수 있는 은거지에는 더 좋은 영약이 배치되긴 한다. 당연히 위급 상황에만 취해야 하며, 사후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124호가 무서워했던 특수임무대의 역학조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황극린은 당장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 외에도 영약을 구할 방법은 많으며, 지금도 잘 차려진 밥상 위에 젓가락만 놀리면 그만이었다.

‘무한. 오랜만이군.’

드디어 강서성을 벗어나 호북성으로 왔다.

처음엔 말을 타고 올까 생각하다가도 수련을 할 겸 하여 뛸 때 뛰고, 지치면 걷는 방식으로 하체 단련도 했다. 주먹을 쓴다고 해서 상체만 단련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하체의 힘이 받쳐줘야 했으니까. 이동 간에도 황극린에겐 수련의 연속이었다.

잠시 오랜만에 온 무한의 모습을 눈에 담은 후, 황극린은 곧장 목표지로 향했다.

광성문(光聖門).

무한에선 꽤 알아주는 문파로 이곳도 검법을 다루지 않고, 권을 다루는 문파였다. 사실 황극린은 광성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개방에서 정보를 읽고 그들에 대해 파악했다.

조금 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광성문의 소문주 강철진이 황씨가문 첫째 황보휘와 친우 사이였다는 것이다. 비무 대회에 참가한다면 황보휘에게 황극린의 소식이 들어가게 되겠지만 솔직히 별 상관없었다. 이미 황극린의 머릿속에 황씨가문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황씨가문에서 시비를 걸어온다면?

배로 돌려주면 된다.

은혜도 배로 갚지만, 원한도 배로 갚는다.

황극린이 정한 삶의 방식이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살아가고자 했다. 비 노인의 손자를 치료해준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이러한 무림에서의 태도는 독(毒)을 다루는 정파 가문, 사천당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광성문을 방문하셨습니까?”

황극린의 검을 본 광성문의 문지기가 묻는다. 황극린은 이제 열다섯에 불과했지만, 이미 키는 많이 자라 청년이라 불려도 어색함이 없었다. 정체를 무림인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은 흑도 문파나 할 짓이었다.

“광성문이 주최하는 비무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셔서 명부를 작성해주시겠습니까?”

황극린이 체격에 비해 목소리 얇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문지기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광성문이 주최한 비무 대회의 규모가 꽤 있다보니 참가 신청을 하는 젊은 무인들이 많았다. 황극린이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명부를 작성하는 무인이 보인다.

황극린이 명부에 이름만 떡하니 적어놓자 문지기가 말한다.

“소속 문파가 어딘지도 적으셔야 합니다.”

없다고 말할까?

황극린은 고민했다. 사실 그에겐 사문 따위는 없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뇌불의 진전을 이었으나 무림맹 정예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황극린은 가장 적절한 답을 내놓는다.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에서 무공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부님의 존함이라도···.”

“사부님께선 이름이 없는 도인(道人)이라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무공을 배웠다뿐이지 사부님의 존함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문지기는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무림에는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황극린의 사부라는 사람도 괴상한 망상에 심취하여 산에서 도를 닦는 별종이 분명하다. 그런 사람에게 무공을 배웠으니 황극린의 수준도 딱 알만했다.

어차피 이번 비무 대회는 광성문의 소문주인 강철진을 무림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빛내줄 하류 인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참가자의 수가 많을수록 비무 대회의 규모가 크다는 증거였다. 문지기는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

- 비무 대회에 참가 신청하는 뜨내기들을 모조리 받아라. 어차피 그놈들끼리 예선을 거치게 하여 탈락시키면 그만이다.

황극린도 그런 희생양 중 하나일 뿐이다.

아마 예선이 시작되고 나면, 분명히 후회하리라. 왜 참가했을까? 그냥 산에서 무공이나 익히고 있을걸··· 주제를 깨닫고 나면 현실이 얼나 무서운지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런 상상을 하자 문지기는 즐거워졌다.

광성문의 문지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녹봉도 따박따박 챙겨 받는다. 그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자신에 비해서 헛된 망상을 품고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놈들을 보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우승자는 정해져 있는 비무 대회였다.

“참가 신청이 완료되셨습니다. 여기 목패를 받으십시오.”

대충 깎아놓은 듯한 목패에는 374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꽤 참가자 수가 많았다.

“예선은 보름 후, 진시에 광성문의 연무장에서 실시합니다. 늦지 말고 참석하시길.”

미소가 잔뜩 배어있는 문지기 윤광운.

그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뜨내기 후기지수가 어떤 표정으로 귀가할지 참으로 기대되었다.

“그러지요.”

* * *

황극린은 광성문 근처의 우량 객잔에서 특실을 잡았다.

가격이 꽤 나갔지만, 필요한 지출은 해야 했다. 돈을 차곡차곡 아껴두려고 옥보단을 판매한 것은 아니다. 쓸 때 쓰려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특실을 잡은 이유는 간단하다. 일반실보다 훨씬 넓었으니까. 편하게 훈련할 수 있다.

촤락! 촤라락!

황극린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채찍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공간에 울린다. 뇌기(雷氣)를 담았기 때문인데, 혈풍뇌전신공 5성에 경지에 오른 황극린은 주먹 한 번에 적정량의 뇌기를 담을 수 있었다.

검의 경지로 굳이 따지자면 검기상인(劍氣傷人)이었다.

하지만 주먹에 내력을 주입하여 유형화한다는 것은 검에 내력을 주입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무림에서 검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위 병기라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철로 만들어진다.

검에 내력을 주입하여 유형화하여 만들어내는 검기(劍氣)는 검의 형태를 따라가기에 적정량의 내력을 주입하면 자연스럽게 검의 형태에 따른 예리한 검기가 만들 수 있다. 철은 내공이 가장 잘 통하는 물체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검이 아닌 주먹에 내력을 다루는 이들은 조금 다르다.

주먹을 쥘 때는 손의 모양이 조금씩 계속 변한다. 검이나 도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단순히 내력을 손에 모으는 것만 따진다면 오히려 더 쉬울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대한의 파괴력을 내려고 하는 무공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모두 상식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권기가 검기보다 다루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지만, 황극린에겐 통용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이미 혈풍뇌전신공의 5성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현재 원하는 대로 뇌전의 방출 방향을 결정하여 내력을 뿜어내고 있다. 주먹 전체에 뇌전을 담아 휘두를 수도 있었으며, 손가락 끝에만 뇌전을 집중시킬 수도 있었다.

촤라락!

쉭!

주먹을 내지르다 말고, 검지를 펼쳐 앞으로 내지른다.

손끝에서 작은 뇌전이 일렁이다가 금방 사라지고 만다.

“······.”

그의 나이에 내공을 유형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당연히 강호에서 안다면 또 다른 천재가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 일이었지만, 황극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역시 내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혈풍뇌전신공은 확실히 절세의 무공이었지만, 심장과 단전에 동시에 내력을 쌓다 보니 하루의 반을 운기행공에 투자하더라도 그리 많이 늘지 않았다. 몇 번 뇌전을 방출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내력을 꼭 늘려야 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약이었다.

‘얼른 비무 대회가 시작됐으면 좋겠군.’

광성문이 주최하는 비무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소문주 강철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 *

“소문주님! 비무 대회의 참가자 수가 500명에 육박했습니다요!”

“500명?”

씨익. 광성문의 소문주 강철진이 미소를 머금는다. 호북성 무한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문파 광성문은 최근 세력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대규모로 문도를 받으며, 사업체도 계속 늘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비무 대회를 개최한다.

수많은 사람이 비무 대회를 관전하러 올 것이다. 수많은 관중이 강철진의 이름을 연호하리라. 그것을 상상하면 하면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하다.

“예! 500명입니다.”

“쯧, 미련한 놈들이 분수도 모르고 참가하는군.”

“헤헤,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무 대회를 준비하며 수련에 열중하던 강철진.

그가 미소를 머금고 웃옷을 걸친다.

“가보자.”

“예선전을 구경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개중에 또 뛰어난 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광성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적의 수준이 어떠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러자 시종이 감탄한 표정으로 찬양한다.

“오오, 역시 소문주님··· 생각 자체가 저희 같은 범인과는 차원이 다르십니다.”

“아부할 필요 없다. 가자.”

“옙!”

말은 멋지게 했지만, 광성문의 소문주가 예선전을 구경하러 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헛된 희망을 품고 예선전에 참가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낼 것이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 * *

“147번! 247번! 3번 비무장! 빨리빨리 움직입니다!”

“24번! 4번! 7번 비무장으로!”

비무는 빠르게 치러지고 있었다. 워낙 참가자가 많다 보니 광성문의 문도들이 총출동해서 심판을 보고 있었다. 꽤 넓은 연무장이었지만, 최대한 구역을 나누어서 열 군데의 간이 비무장을 만들었다.

“소문주다. 광성문의 소문주!”

“어디? 와, 정말 덩치가 크다.”

“무조건 우승은 소문주겠지?”

“당연한 말을!”

예선전이 치러지는 와중에 광성문의 소문주가 등장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짙은 눈썹. 여유롭게 비무장을 둘러 보고 있으니 비무 대회 참가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개중엔 열의를 불태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광성문 소문주 강철진의 입장에선 가소로울 뿐이다.

광성문은 무려 3대째 이어져 온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파였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무공을 익혔으며, 최근에는 무당파와 협약하여 2년 동안의 가르침을 받았다. 중원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을 마주했던 그다. 무당산에서 보았던 무인들과 비교하면, 광성문의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 대부분 어중이떠중이뿐이었다.

‘네놈들과 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저들은 모르리라.

중원이 얼마나 넓은지. 세상엔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지를 말이다. 구파일련 중 하나인 무당파를 경험하고 온 강철진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예선 자체가 우습게 보였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을 빛내주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래도 꽤 괜찮은 놈들이 있긴 하군.”

비무 대회를 치르는 이유가 광성문 소문주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인재를 모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저들 중에선 비무 대회의 우승이 아닌 광성문에 들어오기 위해 참가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저들에겐 광성문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인생 역전의 기회일 테니까.

“근골이 괜찮아 보이는 놈들은 탈락하더라도 잡아두십시오. 저기 3번 비무장의 147번.”

멀리서 보아도 근골이 장대한 것이 눈에 보인다.

무공의 재능이 없더라도 저런 체격은 재능이다. 남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으니 기루나 주루 같은 사업체에 두면 진상 놈들이 알아서 긴다.

“예, 알겠습니다.”

예선을 총괄하는 광성문의 부문주 대룡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무공의 실력은 당연히 대룡이 앞서지만 소문주는 언젠간 문주가 될 사람이다. 중소문파에서 문파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문주의 핏줄인 것은 이제 굳어진 강호의 상식 중 하나였다.

특히 강철진은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이가 예의가 없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예를 분명히 갖추어야 한다.

“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흐뭇한 눈으로 예선전을 관람하던 강철진이 부문주를 바라보지도 않고 답한다.

대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치러진 비무에서 조금 특이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예.”

강철진은 아직도 부문주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섯 번에 걸친 비무에서 모두 일격에 상대를 제압한 참가자가 있습니다. 거기다 더 이상한 점은 상대가 전혀 다치지···.”

“상대가 잘 걸렸나 보군요. 가끔 운이 좋은 놈들이 있지요. 저기 9번 비무장의 34번도 잡아두십시오.”

부문주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소문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부문주도 그가 우승하는 것을 확신했지만, 오전에 치러진 예선전에 참가했던 한 명이 계속 생각이 났다. 혹시 모르니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대기석에 있는 2번도 잡아두십시오.”

“···알겠습니다.”

대룡은 특이한 참가자의 존재를 더 언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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