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돌아와 줬구나
황극린은 생생 약방을 찾아갔다.
미리 제조해 온 옥보단을 팔기 위해서였다.
“뭘 찾으시오?”
얼굴에 권태감이 가득한 약방의 주인이었다.
“환단을 팔러 왔소.”
“환단?”
“그렇소.”
대충 황극린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본 약방 주인 초광생이 인상을 찌푸린다. 정작 필요한 환단은 팔러 오지도 않고, 순 이상한 놈들이 꼬인다.
‘제길, 그게 잘 팔렸는데···.’
황씨가문의 비 노인이 판매했던 환약.
효과를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잘 맞는 사람에겐 최고의 영약이었다. 한 번 그 맛을 들인 사내들은 매번 생생 약방을 찾았지만, 공급이 끊겨 판매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익도 꽤 남을 뿐 아니라 그걸 사면서 다른 환약까지 팔 수 있었으니 효자 상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 노인이 환약은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옥보단을 활용한 사업 확장 계획까지 모두 구상해놓았던 초광생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걸 제조할 줄 아는 사람이 남창을 떠났다는데 말이다.
“거 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약장수는 안 받는··· 응?”
사내가 손에 든 검붉은 색의 환약.
특유의 묘한 냄새가 초광생의 코를 간질였다. 약방을 운영하다 보니 후각이 무척이나 예민한 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바로···.
“비 노야께서 생생 약방에서 거래했다고 들었소만.”
“서, 서, 서, 설마!”
“옥보단이오.”
옥보단이라는 이름은 황극린이 붙인 게 아니었다.
사실 미래엔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오히려 지금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기에 그대로 둔 것이다. 뭐, 이름이 무슨 상관이랴?
“서, 설마! 비 노인이 말했던 옥보단의 제조자십니까···?”
말투부터가 달라졌다.
두 손은 곱게 모았으며 허리는 자연스럽게 기울었다.
“그렇소.”
“어이쿠! 제가 귀인을 몰라뵀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앉아서 차라도 한 잔···.”
“거래만 간단히 하고 떠날 생각이오.”
당연히 초광생은 귀중한 손님의 시간을 빼앗지 않았다.
손님들, 특히 남성 손님들은 과한 친절을 베풀면 다음부터 발길을 끊는 경우가 있었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장사하는 자의 도리 아니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면 혹, 물량은 얼마나 있으신 겁니까?”
“백 알이오.”
“허어···.”
솔직히 아쉽긴 하지만 별수 있겠는가?
그거라도 어딘가? 찾는 손님이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가격을 좀 올리겠소이다.”
10알에 은자 석 냥. 솔직히 지금도 가격이 꽤 나간다고 할 수 있었지만, 초광생은 지금 가격을 더 올려도 구매자들이 구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약효가 잘 드는 사람들에겐 영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10알에 은자 열 냥.”
“열 냥?”
이건 초광생도 예상하지 못한 가격이었다.
처음 판매할 땐, 10알에 한 냥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열 배나 뛴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초광생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 중에서는 그만한 가격을 부담할 재력가도 있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옥보단을 구매해줄 것이다.
“여깄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귀한 손님이신 만큼 유통 수수료는 최소화하여 5푼으로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금자가 아닌 금황전장의 전표로 지불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오히려 그편이 황극린에게 더 편했다. 무거운 금자를 들고 다닐 바에는 전표가 훨씬 낫다. 금황전장은 황씨가문에서 운영하는 전장이었으나 망할 일은 없으리라. 뭐, 망한다면 황씨가문에 직접 찾아가서 권리를 행사하면 그만이었다.
“여깄습니다. 이렇게 저희 생생 약방을 다시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맙소.”
“죄송하지만, 다음 거래는 언제쯤 할 수 있겠습니까···?”
“여섯 달 뒤에 다시 찾아오겠소.”
“여, 여섯 달이나 뒤에··· 큼큼,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아쉬움 가득한 초광생을 뒤로하고 황극린이 전표를 받아 약방을 나섰다.
그가 약방을 찾아 옥보단을 판매한 것은 당장 쓸 돈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옥보단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언젠간 그는 옥보단의 제조법을 판매할 것이다. 직접 약을 생산해서 중원 각지에 판매하면 분명히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다.
언젠간 제조법이 유출될 것이고, 중원의 내로라하는 상회들이 옥보단과 비슷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할 것이다. 황극린은 그런 장사치들의 경쟁에 뛰어들고 싶진 않았다. 그가 되려고 하는 것은 중원 최고의 장사꾼이 아니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가격에 제조법을 넘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물량을 시장에 일정하게 푸는 게 중요했다.
입소문을 내기 위해서다.
가격을 올린 것은 옥보단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였고.
적당할 때, 적정한 가격에 옥보단의 제조법은 판매될 것이다.
* * *
이번에 황극린은 비 노인을 만나러 가진 않았다.
그를 만나러 가는 순간은 강서성을 떠날 때였다. 그때가 되면 황극린은 마음속으로 약조했던 은혜를 갚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생각이었다.
‘여섯 달 뒤.’
황극린은 비동에서 수련하는 시간을 여섯 달로 잡았다.
사실 무공을 익히는 데 여섯 달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있었지만, 비동을 떠난다고 해도 수련은 멈추는 게 아니다. 강호에 떠도는 것 자체가 성장의 방식이 될 수 있었다.
명문가의 자제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가문에서의 수련을 멈추고 강호행을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자신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짐이 꽤 많군.’
사실 비동에선 말을 관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비 노인이 사 왔던 말은 자연으로 풀어주었었다. 말이 있었다면 더 편하게 서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굳이 말을 살 필요는 없었다. 커다란 봇짐을 메고 걷는 것도 체력 단련이 된다.
뚜벅뚜벅.
황극린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은 채로 말이다.
* * *
“도, 돌아왔느냐! 드디어! 왔어!”
“······.”
울먹이는 목소리와 그렁그렁한 눈망울 그리고 살짝 깨문 아랫입술. 뇌불의 얼굴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을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 뇌불은 마구잡이로 생떼를 부리는 치매 노인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들어서 매일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울먹이는 뇌불을 보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비위가 좋은 황극린은 그걸 티 내지 않았다.
“아이야···! 아이야···! 내 얼마나 널 그리워했는지 알고 있느냐? 이리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정녕 그리했어야 했어! 크헝헝!”
비위가 좋다고 하더라도, 보기 싫은 걸 억지로 보는 취향은 아니었다.
황극린은 냅다 비수를 던져버렸다.
뇌불은 환희의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도, 황극린의 움직임을 놓치진 않았다. 그의 동공이 빠르게 비수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 육포가 걸려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육포다! 육포!”
정신없이 그것을 핥기 시작한다.
육포는 본래 이로 씹어먹는 음식이었지만, 소중한 육포를 금방 해치울 순 없었던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맛을 만끽한다. 황극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끼보단 훨씬 낫겠지만··· 저런 성격으로 어찌 강호에서 대마두로 불렸을까?’
저런 모습을 보면 노인이 뇌불이 맞는 것 같다가도 고개를 젓게 된다.
강호의 악명과는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나름대로 답을 찾은 황극린은 커다란 봇짐을 풀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아아···! 이 맛이다! 이 맛이야! 이끼 따위와는 절대! 전혀! 비교할 수 없구나! 아니, 이끼가 뭔 음식이냐? 미미(美味)! 내 중원 각지의 진미(珍味)들을 맛보았지만, 이것보다 뛰어난 음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정녕 천상의 맛이다. 암, 그러하다! 이 뇌불이 인정···.”
툭!
황극린이 육포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그러자 뇌불이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짐 정리가 다 끝날 즈음.
뇌불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떠나기 전과 비교해서 눈빛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느껴지지 않던 신뢰가 느껴진다고 할까?
“역시 돌아와 줬구나. 날 위해!”
“······.”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뇌불 때문에 돌아왔다기보단 비동이 수련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라서 돌아왔다. 방해를 받을 일도 없었고, 비동을 감싼 환상진 덕분인지 정기(精氣)도 충만하다. 사실 황극린 남창으로 가서 뇌불을 떠올린 적도 없었다.
저리도 감동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느끼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진다.
“됐고. 기억은···.”
“암, 내 네가 돌아오면 기억한 모든 것을 말해주리라 결심했다!”
황극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결연하게 외치는 뇌불.
정작 그가 요구했던 돼지고기 직화구이는 해주지도 않았다. 황극린으로선 나쁠 게 없었기에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비동을 둘러싼 환상진은 말이다. 제갈세가의 촉망받던 진법의 천재였으나··· 정파 위선자 놈들과는 추구하는 게 달라 결국 제갈세가에서 퇴출당했다. 사고를 거하게 치기도 했지··· 아무튼, 이 몸과는 확실히 대화가 통했기에 어엿한 무공도 알려주었었지! 놈이 이 몸에 대한 보답으로 이 환상진도 구축해준 것이다.”
“그렇소?”
하기야 뇌불을 위해 이런 고난도의 진법까지 구축할 정도면, 정파인은 아니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갈세가에서 퇴출된 천재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그놈의 별호가 뭐였더라? 통··· 통 뭐시기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통비원?”
“그래, 맞다! 통비원이 맞을 거다.”
통비원. 긴팔원숭이처럼 날랬기에 그러한 별호가 붙었다.
황극린이 알고 있던 과거에는 말이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그는 또 다른 별호를 얻게 될 것이다.
백수천왕(百獸天王).
녹림(綠林)의 왕이자 흑도(黑道)의 왕.
천하의 육대세가가 녹림 따위에게 고초를 겪게 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백수천왕은 흑도라며 무시당하는 녹림을 당당한 하나의 방파로 탈바꿈시킬 인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그는 녹림의 총채주가 되어 새로운 녹림을 천명한다.
당연히 황극린은 만나본 적조차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런데 그가 뇌불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니···.
‘강호엔 내가 모르는 비사가 정말 많구나.’
거의 확정된 미래를 알고 있는 황극린이었기에, 그에 숨겨진 비사를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뇌불은 과연 그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
“통비원은 훗날 어떻게 될 것 같으시오?”
“왜? 남창에 가서 그놈 소식이라도 들었느냐?”
“그건 아니오.”
잠시 고민하던 뇌불이 입을 연다.
“어떻게든 잘 살겠지. 원체 욕심이 없는 놈이니 중원 어딘가에 박혀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지. 솔직히 이제는 관심도 없다. 난 너만 있으면 된다.”
“······.”
황극린이 저도 모르게 손등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을 보아도 감정의 동요가 적은 황극린이었지만, 이번만은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그냥 지금 죽일까?’
뇌불이 알게 되면 까무러칠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서 말을 이어나간다.
“환상진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으냐? 이건 대막(大漠)의 어딘가를 베낀 장소라 하더구나. 서산이 워낙 나무가 울창하고 우거지기에 반대급부로 안성맞춤이라나 뭐라나? 환상진은 구축되는 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효과가 다르다고 하더구나.”
대막.
그 단어를 들으니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흑살문은 대막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제 죽고 없어진 124호와 함께 사막을 건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언젠간 갈 수 있겠지.’
황극린은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환상진을 같이 구축한 것이오?”
“나? 나야 뭐··· 옆에서 내력이나 주입해주었지.”
“아는 것도 별로 없겠군.”
그러자 뇌불이 발끈한다.
“이놈아! 진법이 그리 쉬운 건지 아느냐. 제 몸에 내력을 굴리는 것과 외부의 기운이 외부 기물에 묶어두는 것은 궤를 달리한다! 간단히 말하면 몸을 쓰는 것과 머리를 쓰는 것의 차이다!”
황극린도 진법에 대한 기초 지식은 있었다.
확실히 그건 무공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학문(學文)에 더 가깝다고 할까?
“비동을 구축한 환상진을 정리한 서책 같은 것은 없겠군.”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거라. 놈은 사천에 있다. 내가 보냈다고 하면···.”
말을 하던 뇌불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사흘을 고생했는데··· 사천성까지 다녀온다고? 절대! 무조건! 안 된다!’
황극린이 비동을 떠났던 순간부터 뇌불은 후회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황극린을 비동에서 쫓아버릴 뻔했었다. 황극린이 무공을 수련에 임하는 모습만 보아도 하나에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갈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환상진에 관심을 두는 듯하니··· 화제를 돌려야 한다!
“크흐으으음! 큼큼!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황극린이오. 사천 어디에 있소?”
이놈, 집착이 장난 아니다.
얼른 다른 화제를···.
순간 뇌불의 눈이 번뜩인다.
“그러고 보니, 극린이 네 얼굴이 왠지 눈에 익구나! 어디서 분명히 본 적이 있어!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