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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8화 (28/316)

외출

황극린은 하루에 두 시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에 취침하고, 해가 뜨면 일어난다. 성장기이니만큼 충분한 수면도 중요했지만, 어느샌가 키는 두 치나 자랐다. 이대로만 자란다면 전생의 키를 금방 추월하리라.

그리고 황극린은 근육이나 뼈가 영구적으로 손상될 만큼 육신을 혹사시키진 않았다. 어느 정도 몸에 무리가 온다고 생각되면, 바로 가부좌를 틀어 혈풍뇌전신공을 익힌다. 느리지만 차곡차곡 성장하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은 육포를 안 주느냐?”

황극린은 요리 또한 제법 했다. 살수 생활을 할 때 유일한 낙은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번 조리 도구가 완벽히 갖추어진 곳에서 요리할 수 없었으니, 양념을 만드는 능력이 특화되었다. 저잣거리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향신료들을 조합하여 기가 막힌 양념장을 만들어놓았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대단한 재능이었다.

뇌불은 이제 황극린만 보면 저도 모르게 침을 흘리곤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침 좀 닦으시오.”

“이 몸으로 어떻게 닦느냐?”

“지금 약간 움직인 거 같은데?”

“······.”

뇌불이 찔끔한다.

몇 달을 같이 비동에서 지내며 가까워지긴 했지만, 황극린에겐 명확한 선이 있었다. 언제든 그 선을 넘어서 위협이 된다면 뇌불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뇌불은 확신하고 있다.

매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강호에선 전혀 매정한 게 아니다.

강호 무림에서 살아가려면 적을 해치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중원이었다.

“크으음···! 오늘은 이런 기억이 떠올랐구나.”

뇌불도 뇌불 나름대로 살아남을 궁리를 했다.

황극린이 자신에게 원하는 건 지식과 정보였다. 황극린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정보를 계속 뱉어내야 했다. 더군다나 짙은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기억들이 조금씩이나마 선명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해보시오.”

“진주언가의 가주 언상중은 몰래 만나던 여인이 있었다. 황실의 여인이었고, 참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그것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얻어먹은 술만 금자 백 냥은 족히 넘을 것이다! 크크, 그땐 참 재밌었는데 말이지.”

황극린이 작은 한숨을 내쉰다.

뭐, 활용하려면 활용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주언가는 무림육대세가 중 하나였다. 지금의 황극린이 언가의 가주에게 뇌불과 같이 그따위 협박을 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리라.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정확히 언제 적 일인지는 기억하시오?”

“으음? 오래되진 않은 것 같은데?”

자칭 뇌불의 기억은 오락가락하다.

20년 전의 일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황실이라···.’

강호 곳곳에 평범한 백성 열댓 명은 쉬이 학살할 수 있는 고수가 널려 있었다. 황실 또한 무공을 익힌 병사들을 꽤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무림의 시대였다. 언제든 절대 고수 한 명이 나타나 자신이 황제라고 천명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연히 구파일련이 황실을 비호하고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쉬이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튼, 진주언가라면 하북성에서도 알아주는 명가였으며, 언가 출신들도 황실에 연이 닿았으리라. 황실의 여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란 거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불륜이었소?”

“끌끌! 뭐, 그런 셈이지!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는데 황제의 부인 중 하나였다더군! 역시 언가 출신이라 그런지 힘이 좋아서··· 크흠흠!”

뇌불은 아무리 황극린이 애늙은이 같은 성격이라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

확실히 뇌불 쯤 되면 중원의 비사(祕事)를 알고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도 황제의 부인이라면··· 꽤 큰 건이었다. 기억해두면 언젠간 써먹을 일이 있으리라. 함부로 사용하다간 다칠 위험도 있었으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패였다. 사실관계도 확실히 살펴보아야 하고 말이다.

“어떠냐? 이 정도면 육포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느냐? 흐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외치는 뇌불.

결국,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은 황극린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육포를 먹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솔직히 후자의 이유가 더 크다고 할 수도 있으리.

“자, 드시오.”

황극린이 벽면에 육포 하나를 걸어준다.

거의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었기에 뇌불은 헐레벌떡 혀를 내밀고 육포의 양념 맛을 만끽한다. 입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달달 하면서도 매콤하고 진득한 양념! 어째 날이 갈수록 더 맛있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냠냠. 크으! 이 맛이지! 나중엔 육포 말고 갓 구운 돼지나 소에 발라먹어도 일품이겠구나! 이게 사람이 사는 거지! 참으로 좋구나!”

“······.”

황극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구하려면 마을까지 다녀와야 하오.”

“움움. 혹, 멀어서 그러느냐? 네 튼실한 다리를 보면 금방 다녀올 것 같은데?”

“주는 게 있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소?”

혈풍뇌전신공은 스스로 익혀나가야 한다.

뇌불의 조언을 듣다 보니 황극린은 스스로 몸으로 부딪치고 깨우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 무공도 그러하다. 특히 황극린과 뇌불은 처음 무공을 익히는 환경도 달랐으며, 무를 대하는 관점에도 차이가 있었다. 기억을 모두 되찾은 뇌불에겐 확실히 배울 것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황극린이 뇌불에게 원하는 것은 혈풍뇌전신공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비동을 감싸고 있는 환상진에 관한 정보.

인면지주의 실로 만들어진 장보도에 관한 것.

“크으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건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기억 못 하는 척하는 건 아니고?”

찔끔.

뇌불이 눈을 감는다.

사실 환상진에 관한 것은 기억이 꽤 돌아온 상태였다. 환상진은 뇌불 혼자서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조력자가 분명히 있었다. 그 조력자는···.

“환상진은 어차피 제갈세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 같고.”

“허? 아니, 그걸 네가 어찌 아는 것이더냐? 설마 다 알고 물어본···.”

“그냥 찔러본 것이오. 환상진에 관한 기억은 돌아왔나 보군.”

당황한 뇌불이 눈을 감은 채 한탄한다.

“···허허, 천하의 뇌불이 어찌 이런 아이에게 농락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을꼬? 참으로 개탄스럽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젠 불가의 승려도 아니면서 불호는 무슨··· 아무튼, 언제 한번 다시 고기를 구워드리겠소.”

“오오! 정말이더냐!”

황극린은 뇌불을 압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악명과는 다르게 순진한 구석도 있었고, 속된 말로 표현하면 어벙한 면이 있었다. 그게 본래 뇌불의 성격인지 주화입마로 인해 변한 것인진 확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언제! 언제 고기를 구워줄 것이냐?”

잠시 고민하던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창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니 차라리 오늘 다녀오겠소. 다만, 상응하는 대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하하, 이 뇌불 어르신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 걱정하지 마라!”

고기를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뇌불의 인상이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그런데 남창? 허허허허···! 그럼 최소 하루는 넘게 걸리지 않느냐? 고기를 먹는 것도 좋지만··· 내 저녁은 어떡하느냐···?”

불쌍한 척 그렁그렁한 눈빛을 하는 뇌불.

황극린이 육포를 두 개 매달아준다.

“다녀오겠소.”

“후후후, 고맙다! 얼른 다녀오너라.”

그렇게 황극린이 떠나가고.

뇌불의 입가에 허허로운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금은 냉정해졌다고 할까?

“으음, 저 고양이같이 약삭빠른 녀석이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는데?”

뇌불은 육신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황극린은 그것을 아마 눈치채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직 몸을 정상적으로 가눌 수준은 아니었지만, 손가락 하나 정도는 까딱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왜 뇌불을 묶어놓거나 하지 않는가?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뇌불을 믿는다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뇌불이 픽 웃음을 터트린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황극린제 육포에 발린 양념장을 혀로 만끽하는 게 더 중요하다. 또, 육포 따위가 아닌 양념장을 바른 고기를 직화로 구워 먹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참으로 흥미롭다.

이게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거기다 진지하게 고민할 때보다 아무 생각 없이 양념만 먹고 있는 게 오히려 회복이 더 빠른 듯하다.

“크으으으, 바로 이 맛이지!”

뇌불은 황극린제 양념에 점점 중독(中毒)되고 있었다.

* * *

황극린은 수련을 하는 중에도 서산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에 몇 번 다녀왔었다.

사실 비동에 들어오기 전에도 생필품 따위는 챙겨왔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생활하다 보니 소비하는 속도가 빨랐다. 거기다 필요한 물품은 계속 생겨났다.

이번에는 서산 아랫마을에선 구하기 힘든 품목들이 있어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까지 향했다. 어차피 장거리를 달리는 것도 체력 단련에 도움이 되었으니 수련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오랜만이군.’

황극린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초우 대장간이었다.

“으응?”

붉게 달아오른 철을 두들기던 초우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고작해야 넉 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소년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이들은 빨리 큰다고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다. 키만 자란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아마 옷 아래에 잠들어 있는 황극린의 근육을 보았다면 초우는 경악했으리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가 다시 올 줄은 몰랐구나. 무슨 일이더냐?”

“의뢰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황극린의 말에 초우가 피식 웃는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다.

“하하, 그렇지. 대장간에 올 일이 그것 말고는 없지. 그래, 이번에는 무슨 물건이 필요하더냐?”

이번엔 이 신기한 소년이 무슨 의뢰를 맡길까?

초우의 눈이 반짝였다.

“팔찌와 발찌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팔찌와 발찌?”

“예.”

황극린이 미리 그려온 설계도를 건네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품질을 높이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할 듯하다.

“순도가 높은 철을 사용해서 무게를 늘렸으면 합니다. 돈은 여기 있습니다.”

“이건 너무 무거울 것···.”

대략적인 크기를 가늠해보던 초우가 황극린의 팔목과 발목을 바라본다. 체격에 비해서도 확실히 굵었다. 집중적으로 팔목과 발목을 단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겐 괜찮을 수도 있겠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시간이 촉박하더냐?”

“그건 아닙니다만, 빠르면 좋긴 하지요.”

“양각을 하지 않고 단순히 틀만 만든다면··· 이틀이면 충분하다.”

이것도 초우라서 가능한 것이다.

철을 두들긴다는 것은 상당한 중노동이다. 종일 철을 두드릴 수 있는 체력과 근력이 받쳐준다는 이야기다. 황극린은 초우의 구릿빛 근육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가능한 것과 그걸 해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황극린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초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참, 혹시 칠성방 놈들이 어슬렁거리진 않았습니까?”

칠성방은 황극린에게 묵철을 뺏긴 놈들이다.

황극린이 직접 칠성방주에게 경고하긴 했지만, 흑도 놈들의 멍청함은 간혹 예상을 뛰어넘기도 했으니까.

“놈들이 그럴 여유가 있겠느냐? 남창이 난리가 났는데 말이다. 사실 난 네가 도망친 줄 알았다.”

“난리라뇨?”

“모르더냐? 뇌불의 장보도인지 뭔지가 남창에 있다는 소문이 쫙 깔렸지 않느냐? 서로 장보도를 손에 넣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포양호와 남창 일대를 뒤지고 있다더군.”

“아.”

“쯔쯔, 참 미련한 놈들이지. 뇌불이 어떤 놈인데 장보도를 남겨두었겠느냐? 그 괴팍하고 늙은 무인이 절세 무공을 떡하니 남겨두었겠느냐? 그리고 설령 장보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칠성방 같은 흑도 놈들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은 아니겠지.”

하기야 강호에 떠도는 뇌불의 악명은 대단하다.

지금은 고기에 환장한 노인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렇겠지요.”

“아무튼,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네가 날 걱정하진 않아도 된단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우는 병장기를 만든다. 대장장이들은 자신의 무구가 사용하기 적합한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라면 칠성방 같은 삼류 흑도 따위에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이틀 뒤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가라.”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황극린은 초우에게 인사한 후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처리할 일이 여럿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몇몇 약재도 구매해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다.

‘그나저나 이틀이면···.’

순간 고기에 환장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창의 대장장이도 알 정도로 그의 괴팍함은 유명했다. 그런 무인이 주화입마에 걸려 아기 새처럼 먹이를 받아먹고 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하고 있으랴?

‘이끼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을 먹고 버틴 노인이니 이틀 정도야 알아서 버티겠지.’

황극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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