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이유
흔히 무림에서 절세의 영약이라 불리는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이나 무당파의 태극신단(太極神丹)처럼 절세 영약 수준은 아니더라도, 황극린은 영약을 취해본 경험이 있었다.
십년하수오나 백년하수오와 같은 그나마 흔한(?) 영약을 취해본 경험이 있었다.
흑살문은 사흑련에 속한 문파로서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살수에게 영약을 하사했었다. 황극린은 200번대의 살수였지만, 수많은 임무를 성공시켰기에 흑살문에서 영약을 하사했던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황극린은 영약을 취하면 내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약 1년 치의 공력이 담긴 십년하수오의 경우만 떠올려 보아도 아랫배에 열기가 후끈하게 차올랐고, 까딱 방심했다간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운기토납으로 천천히 쌓는 것과 한 번에 1년 치의 공력이 들어오는 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혈삼은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이건···.’
입에 닿는 순간부터 퍽 괜찮은 영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을 타고 들어가는 순간에도 거대한 기운이 태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랫배에 도달하는 순간, 황극린은 긴장하며 내공을 운기하려 했지만···.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흡수됐다.’
단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거대한 영약의 기운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10년 이상의 공력이 담긴 영약이었다. 삼키는 순간까지의 느낌을 기억해보면 분명히 그러하리라. 그런데 어찌 눈 깜빡할 시간에 기운이 모두 흡수됐을까?
단전이 아닌 세맥 자체에 영약의 기운이 모두 스며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맥 뿐 아니라 근골과 혈맥 따위에도 흡수된 듯하다.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말이다.
황극린이 과거로 귀환하는 것과 관련됐다고 생각하는 인형혈삼의 경우와도 또 다른 게, 그것을 취할 땐 입에 넣어도 황극린은 그것이 얼만큼의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뇌불의 비동에서 찾은 영약은 분명히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평범한’ 영약이었다는 말이다.
‘무영심결.’
황극린은 재빨리 그럴듯한 답을 찾아냈다.
아직 황극린은 무영심결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황극린은 207호로 불렸던 시절에도 절대고수의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무영심결은 흑살문주도 계륵으로 여기는 무공이었던 만큼 지금의 황극린이 심득을 모두 깨우칠 수가 없는 수준이다.
단지, 무영심결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알음알음 느껴가고 있었을 뿐이다.
‘내공의 총량은 무인의 세계에선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 상황이 황극린에게 나쁜 상황일까?
그의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오히려···.
‘혈풍뇌전신공을 펼치는데 최적의 육신을 만들 수 있겠지.’
혈풍뇌전신공의 단점이라 할 수 있다면, 뇌전의 기운으로 세맥과 혈맥이 상한다는 부분이다. 만약 무영심결로 영약을 단전이 아닌 세맥과 혈맥 자체에 스며든다면 자연스레 뇌전을 다루기에 최적화된 육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
당연히 단점도 있다.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역시나 내공의 총량이다.
뇌전의 기운이 강력하긴 하지만, 내공은 단순히 유형화된 검기(劍氣) 따위를 쭉쭉 뽑아내는 데 사용하는 힘이 아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내공을 사용하여 경신법을 펼칠 때, 내공의 총량이 적다면 단거리에선 장점이 드러나겠지만 장거리에선 그 단점이 더 부각될 것이다.
운기토납만으로 쌓는 내공의 양은 한정적이다. 더군다나 혈풍뇌전신공은 세맥 뿐 아니라 심장과 혈맥까지 활용하는 무공이다. 다른 무인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내공의 양이 부족하다.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쩌면 뇌불의 영약이 특별했을 수도 있었다.
혈풍뇌전신공의 주인이 마련해둔 영약이니만큼, 세맥과 혈맥에 흡수되는 영약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현 상태를 확실히 분석하려면, 또 다른 영약.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내력을 증진시켜주는 보통의 영약을 또 취해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명확한 해답을 줄 것이다.
당연히 당장 구할 수는 없겠지만, 강호에 나선다면 아예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다.
황극린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 그의 존재로 변수가 생기고, 변화가 발생한다고 하여도 불변하는 미래는 분명히 존재하리라. 그런 것들을 활용하면 된다.
일례로 황극린이 여러 약재의 조합으로 정력제를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아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번쩍.
황극린이 눈을 뜬다.
당연히 뇌불은 황당한 표정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고작해야 일 각이다.
벌써 영약을 모두 단전에 흡수시켰다는 말인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뇌불의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벌써 영약의 기운을 다 받아들인 것이냐? 정말? 진짜?”
흡사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혼자서 혈풍뇌전신공을 탐독하고 이해하는 것을 봤을 때도 이상하다 여겼다. 정말 황극린은 희대의 천재란 말인가? 어쩌면 ‘그놈’과 비슷한 부류의···.
“끅!”
흐릿한 인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뇌불이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다. 어쩌면 그가 주화입마에 걸린 이유가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 그놈 때문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대충 흡수했소.”
“끄으으··· 대충? 그게 무슨 말이더냐? 흡수하면 흡수한 거지 대충은 또 뭐야?”
“비슷한 것이오.”
“허···.”
이놈이 누굴 놀리나?
하지만 뇌불은 더 이상 따져 묻진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아이는 내가 답을 알고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어.’
처음 뇌불은 영약을 취하면, 몸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왜 면벽 수련을 했는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그 이유를 생각해보지도 못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여러 변명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에 걸쳐도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에 가까운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고 치자.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명쾌하고 간단한 답이 존재한다. 평생 수련하면 된다. 허나, 인간은 매번 지름길을 찾으려 하고, 그 과정에 번뇌에 빠지곤 한다.
오랜만에 무거운 표정으로 고민하던 뇌불.
그가 벌떡 일어서는 황극린을 보고 깜짝 놀란다.
“어딜 가려고!”
“수련하러.”
“수련? 종일 수련하지 않았더냐? 또 한다고?”
“그렇소.”
황극린은 굳이 왜 수련을 해야 하는지 뇌불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수련은 그에게 필수적인 요소였다. 내력이 부족해서 경신법을 펼치지 못해? 장기전에서 불리할 수도 있다고?
그런 단점은 육체의 단련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간단한 해결법이 있는데 왜 빙빙 돌아가려 하는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황극린이 200번대의 번호를 받고도 흑살문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 이노오옴! 설마 영약만 날름 먹고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이이이!”
다만, 뇌불은 황극린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불안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 * *
“허허허···.”
혀를 내두른다.
아직 기억이 가물가물한 자칭 뇌불이었다. 사실 가끔 자신이 정말 뇌불이 맞나? 그런 의심도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소림사에서 수련했던 기억은 일부 남아있었기에 자신이 뇌불이라는 걸 확신한다. 당시를 회상하면 매일매일 고통의 연속이었다.
소림의 수련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
번뇌를 잊는 방법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던가?
참으로 발칙한 발상이었다. 소림의 고승들 모두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뇌불의 스승은 소림의 고승 중에서도 가장 과격했었다.
뇌불은 무공 수련이 싫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황극린은 굳이 무공을 익히라 채찍질하는 사부도 없을 진데,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모조리 수련에 시간을 쏟는다.
어린 소년을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해진다.
재능이 있기에 수련에 재미를 붙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저토록 어린 나이에 그게 가능할까? 저 나이의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저 아이는 확실히 다르다.’
뇌불은 궁금해졌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황극린은 저리 열심히 수련하는 걸까?
어쩌면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사파의 마두에게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거나 하는 뭐 그런 사연. 무림에서 그런 사연은 널리고 널렸지만, 그래도 충분한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야.”
다시 돌산으로 오르려고 나갈 채비를 하던 황극린의 시선이 뇌불을 향한다.
“왜 그리 열심히 하는 것이냐?”
“······.”
황극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을 대답으로 알아들은 뇌불은 추측을 말로 풀어낸다.
“무공을 익혀 복수할 상대라도 있는 것이더냐? 그렇게 열심히 수련해서 도달해야 할 강맹한 적이 존재하는 것이더냐?”
그게 과연 누구일까?
사흑련의 주인 사대마제(四大魔帝) 중 하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수련은 날 위해서 하는 것이오.”
“뭐?”
날 위해서?
단순히 강해지는 것이 목표란 말인가? 저토록 어린 나이에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다? 계기도 없을 텐데?
“힘을 가지고 싶은 게냐? 강호를 호령하고 천하제일의 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뭐 그런···.”
피식.
황극린이 미소짓는다. 사실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일 수도 있었다.
과거 혈고독을 강제로 주입하여 평생 노예로 부려먹었던 흑살문에 대한 복수를 말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크나큰 상처를 주었던 한 사람에게 자그마한 속죄라도 할 수 있을 힘을 원한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천하제일의 무인이 되고 싶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전부 아니다.
황극린은 수련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명령도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수련의 이유로 충분했다.
“그냥.”
“허···!”
뇌불은 황극린의 그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해답은 뇌불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조언해주었었다. 그때도 뇌불은 황극린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황극린은 그냥이라고 답했었다.
“이놈아! 그냥이 무어냐, 그냥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걸 알지 못하면···.”
“꼭 이유가 필요하오?”
“뭐?”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가는 데, 꼭 남에게 설명할 이유가 있어야 하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명확한 이유와 목표의식이 있다면···.”
“무공은 재밌지 않소?”
재밌다?
고작 설명한다는 이유가 무공은 재밌지 않냐고?
뇌불의 입을 벌린 채 황극린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숨긴 사연이 있느냐고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장난하지 말고! 진정한 이유를 말해보아라!”
“심심하면 이거나 빨고 있으시오.”
황극린이 비수를 던져 벽면에 맞춘다.
끝부분엔 작은 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실 끝에는 육포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킁킁, 후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미혹의 향! 흔해 빠진 육포가 아니라 특제 양념장까지 발라 저온에 숙성된 황극린제 특제 육포였다.
“···이놈이, 이 뇌불 어르신께서 육포 하나에 정신이 팔릴 줄 알았더냐.”
할짝.
뇌불의 혀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아무리 그래도···, 냠냠, 그냥 무공이 재밌어서 저토록 열심히 한다는 게··· 할짝. 말이 되나?”
이미 황극린이 떠나간 것은 모르고, 뇌불은 육포를 핥고 있었다.
육포를 잘근잘근 씹어 먹으면 좋겠지만, 그런다면 이 향을 계속 느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향을 느끼고 싶다! 계속 맛보고 즐기고 싶다!
그렇게 정신없이 육포를 빨아대던 뇌불.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이미 육포는 뇌불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동자를 내리깔자, 혀는 아직도 움직이고 육포를 핥고 있다.
“···.”
이토록 열심히 육포를 핥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할짝!
황극린제 특제 양념장은 이미 다 빨아먹었고, 이제 고기 본연의 맛이 혀끝에 감돌고 있었다. 단지 맛을 느끼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맛있으니까.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허허허···.”
뇌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렇게 변화는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