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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극린이 향한 곳은 비동의 출구. 그러니까 돌산의 중턱이었다.
아찔한 높이였지만,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살수는 온갖 종류의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단련되어 있었다. 긴장하면 더 위험해진다.
“후우우.”
숨을 내쉬고, 돌산 중간중간 튀어나온 돌부리를 두 손으로 짚는다. 느긋하지만 확실하게 단단한 돌부리를 찾는다. 그리고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황극린은 단순히 돌산을 내려가려는 게 아니었다.
수련.
그는 돌산을 타며 육체를 단련할 생각이었다.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도 좋다. 다른 훈련으로 생긴 근육과 검을 쓰는 근육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검만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휘할 근력을 원했다. 경사가 가파른 돌산을 오르내린다면, 그만큼 확실한 근력 단련법도 없으리라.
더욱이 근육만 길러지는 건 아니었다.
떨어지면 뼈가 부서지고,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죽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단순히 힘이 강하다고 산을 잘 타는 게 아니다. 균형감각도 뛰어나야 한다. 근력과 균형감각 그리고 유연성까지 기를 수 있는 최적의 훈련이다.
‘재밌기도 하고 말이지.’
씨익.
높이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흥미가 앞선다. 시운량 교관의 훈련도 퍽 도움이 되었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훈련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만큼 재밌진 않으리라. 황극린은 이미 머릿속으로 하루의 훈련 계획을 빼곡하게 세워놓았다.
“후우··· 후우···.”
가끔 부서질 것만 같은 돌부리에 발을 얹을 때도 있었지만, 순간순간 빠르게 반응하며 다른 돌부리로 발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육신 모두가 팽팽한 활처럼 긴장을 유지했다.
바닥에서 돌산의 중턱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반 시진이었지만, 내려가는 건 더 어려웠다. 거의 한 시진이 지나서야 바닥에 도착할 수 있다. 까마득한 높이의 돌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성취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미 황극린의 의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흙바닥에 가부좌를 튼다. 호흡을 정돈하는 방법? 그냥 앉아서 휴식하는 것보다 운기토납을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쓰으읍··· 후우우우···.”
거칠었던 호흡이 금세 진정된다.
근력 훈련으로 빠르게 뛰었던 심장의 박동도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세맥과 혈맥.
두 통로에서 호흡으로 들어온 뇌전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와, 왔느냐!”
비동 깊숙한 곳에서 노인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황극린이 오기까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극린마저 떠나버리면 그는 비동에서 쓸쓸히 죽어갔으리라. 이끼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만 먹고는 이제 한계였으니까. 황극린은 자칭 뇌불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크흠! 어디서 단련이라도 하고 온 게냐? 땀으로 흠뻑 젖었구나··· 만약 근력 훈련을 할 것 같으면 소림사의 여러 훈련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그러니···.”
황극린은 뇌불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큼큼···!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곤 하지···.”
혼잣말처럼 투덜댔지만, 예전처럼 발끈하고 화내지 못한다.
이미 황극린은 갑이었으며, 뇌불은 을이었다.
“혈풍뇌전신공은 뇌전의 기운을 체내에 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력 훈련보다는 내부를 단단히 단련하는 게 더 중요하다. 세맥을 강화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영약을 취하거나 일부러 세맥을 상하게 한 다음 낫게 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는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혹시 비동 안에 영약이 있소?”
“크흐으으음···!”
뇌불이 심기가 불편한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돌산 어딘가엔 그가 숨겨놓은 영약이 있었다. 지금은 몸이 움직일 수 없어 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건 뇌불에겐 마지막 희망이었다. 사실 영약을 취해도 뒤틀린 근골을 회복하리라는 보장은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없는 것이오? 아니면 있는 데 없는 척하는 건가?”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선심 쓰는 척 목소리를 낸다.
“내가 강호 전역에 숨겨놓은 비동이 몇 개인 줄 아느냐? 네가 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간다면 그걸 모두 주마! 세상을 호령할 금은보화! 강철마저도 벨 수 있는 절세의 병기!”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소?”
“그건···.”
뇌불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면 마치 근육이 마비되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린다. 몇몇 기억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떠오르지 않는다.
“호북성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장담한다!”
“······.”
황극린이 행낭 속을 뒤져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토끼의 시체였다.
“···으음?”
탓! 타앗!
두 번 만에 불씨가 솜으로 옮겨붙는다. 조금 싸늘했던 비동에 온기가 차오른다. 목 아래쪽에 감각은 희미했지만, 목 위의 감각은 완벽히 살아있다. 청각과 후각 그리고 시각은 멀쩡하다는 소리다.
황극린은 토끼를 손질한 후, 이젠 꽤 거세진 불길 위에 꼬챙이를 꿴 토끼고기를 올려놓는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비동 안을 가득 채운다. 거기다 연한 갈색으로 익어가며 줄줄 흘려대는 육즙을 보아라!
꿀꺼억···.
뇌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동굴 내부에서 자라났던 이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맛! 토끼 직화 구이! 뇌불은 토끼가 익어가는 모습에 귀신에 올린 것처럼 멍한 눈을 떴고,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와 육즙이 쭉쭉 떨어지는 소리에 코를 벌렁거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시각, 후각, 청각.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어 뇌불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찌이익.
어느샌가 토끼가 거의 익었다. 황극린은 뜨겁지도 않은지 오른 다리 한쪽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아암!
소중한 토끼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크게 베어 문다.
일부러 소리를 내는 건지, 좁은 동굴이라 더 크게 들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뇌불의 귓가엔 토끼고기를 오물거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려왔다.
“나, 나도···.”
냠냠.
“다리 하나만···.”
찌이익.
왼쪽 다리를 찢는 순간이었다. 저것마저 빼앗길 순 없다! 무조건 먹어야 한다!
“여, 영약이 있다!”
황극린이 뇌불을 슬쩍 바라본다.
“호북성 어딘가에 있다는 건 이미 들었소.”
“아, 아니다! 비동 안에 영약이 숨겨져 있단 말이다! 그걸 주마! 그러니··· 그러니까···!”
황극린이 찢은 토끼 다리를 들고 뇌불의 앞으로 왔다.
노릇노릇한 고기의 냄새가 오장육부를 자극한다.
“그렇소?”
“그래! 그러니까 고기를 다오! 부탁이다!”
참으로 쉬운 양반이었다.
자고로 무림 고수란 이런 자극에 무던하지 않은가? 뭐, 사지가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이끼만 먹고 목숨을 연명해왔으며, 정신이 정상은 아니었으니 일정 부분 이해가 되긴 했다.
“여깄소. 천천히 드시오.”
황극린이 조금씩 고기를 떼어 입으로 넣어준다.
식감을 감퇴시키는 초록빛의 이끼만 핥아먹던 뇌불. 그의 머릿속에 벼락이 몰아친다. 입안 가득 메우는 감칠맛과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식감. 오랜만에 맛보는 ‘진짜’의 맛에 혀가 이리저리 춤을 춘다.
뇌불은 씹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 천상의 맛을 느끼고자 입안에서 고기를 굴린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강렬한 자극인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거다.
삶이란 결국 이런 거다.
왜 영약 따위에 목숨을 걸었을까?
취한다고 해도 회복할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달마시여···!”
입안에 고기를 품고, 경건하게 외친다.
평소에 찾지도 않던 달마까지 찾아가면서 말이다.
“녹여 먹을 생각이오?”
“어···?”
“더 있으니 마음껏 드시오.”
피식.
황극린이 미소짓는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얼굴이 왜 이리도 아름답단 말인가? 눈앞의 소년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부처의 현신인가? 아아, 정녕 그러하단 말인가?
“자.”
“아아···.”
마치 둥지에 입을 벌린 새끼 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처럼.
황극린은 뇌불에게 고기를 주었다.
* * *
“크음···.”
강렬한 자극은 금방 식는다고 했던가?
황극린에게 영약이 숨겨진 위치를 말하고, 황극린이 그것을 쥐고 있으니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천상의 맛을 내포한 토끼고기는 그에게 깨달음을 주었건만, 사람이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단지.
‘꼬마 놈이 그래도 제법 고기를 구울 줄 알았어.’
황극린에 대한 인상이 약간 바뀌었다.
아깝긴 했지만 조금 덜 아까워졌다고 할까? 그래도 큰 인식의 변화였다. 황극린을 어떻게든 구슬려 이용하고자 했던 마음은 수그러들었다.
“근데 왜 바로 취하지 않는 거냐?”
뇌불은 얼른 황극린이 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자신의 영약이 놓여 있으면 후회만 커질 것 같았으니까. 차라리 황극린이 날름 먹어버리면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리라.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오.”
“설마 영약이 아니라 독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확실히 좋은 영약이 분명하다!”
뇌불이 기억하는 건, 꽤 좋은 영약이라는 사실뿐이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왜 가지고 들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본능적으로 이끼를 핥고 있었다.
“빨리 먹어치워라! 얼른!”
“왜 그리 재촉하시오?”
“안타까워서 그런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눈앞에 영약이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어차피 취할 거라면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낫지. 흥!”
의외로 솔직하게 말하는 뇌불이었다.
“하나 물어볼 게 있소.”
“뭐냐?”
“영약을 취하면 몸이 나을 수 있을 것 같소?”
“응? 설마 나한테 주려고?”
꼬마··· 아니, 이 예의 바른 소년이 거기까지 생각한 것인가?
뇌불 어르신의 회복을 위해서 영약을 취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아아, 이 얼마나···.
“그럴 일은 없소.”
배은망덕한 놈인가!
“칫,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가능성은 반반이다. 영약의 효능이 좋다면··· 운이 좋다면 회복할 수도 있겠지!”
황극린이 손을 뻗어 맥을 짚는다.
뇌불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볼 땐, 당신은 영약으로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오.”
“뭣이? 네가 뭘 안다고 그리 말하느냐? 무림의라도 되느냐?”
“당신의 단전에는 내력이 충만하오. 아니, 넘쳐나는 수준이지.”
뭐라?
이 꼬마 놈이 뭘 알고 말을 하는 건가?
“당신이 정말 뇌불이 맞다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답을 알고 있다고?”
“그렇소.”
멍한 표정의 뇌불.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떼고, 그에게서 멀어져간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이 몸을 회복하면 위험해지는 건 소년이 아닌가? 굳이 조언해줄 필요가 있나? 아니, 애초에 이게 조언인가? 저 어린 소년의 말을 믿어야 하나? 온갖 감정이 교차한다.
“왜 그런 말을 한 거냐? 날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정녕 몸을 회복하면 어쩌려고···.”
“그냥.”
“뭐?”
황극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영약을 집어 들었다.
혈풍뇌전신공이라는 절세의 무공 창안한 자가 바로 뇌불이다. 적어도 사부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교관과 교육생의 관계는 될 것이다.
그리고 고기를 먹여줄 때,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과거 단전이 깨졌던 자신과 겹쳐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황극린은 뇌불이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바로 심장에 칼을 찔러넣을 것이지만, 지금은 굳이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기를 먹여주며 깨달은 것인데, 협박보다는 살살 구슬리는 게 뇌불에게 정보를 얻어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가부좌를 튼 황극린.
영약을 입에 담는다.
청아한 향이 입에 가득 담긴다. 혀로 살짝 굴려보니 확실히 독은 아닌 듯하다. 어느 정도 수준의 영약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꿀꺽.
뱃속으로 들어간다.
보통 영약들은 거대한 자연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기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까딱 잘못하다간 영약의 기운을 제대로 흡수하지도 못한 채 내상을 입거나 심하면 주화입마에 걸리는 수도 있었다.
거대한 기운이 거칠게 포효하며 세맥으로 나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응? 이건···.’
황극린의 눈썹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