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4화 (24/316)

설마 아니겠지

뇌불의 비동은 포양호가 아닌, 남창 북쪽에 위치한 서산에 숨겨져 있다. 서산은 그리 산세가 험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완만하게 넓게 퍼져있었기에 막상 비동을 찾으려면 정예 무인 수만을 동원해도 쉬이 찾아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범한 감각으로는 비동의 근처를 지나가더라도 감각을 속이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지나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장보도가 없으면 발견하지 못한다.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우연히 이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자연의 기운이 이질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파한 후 진의 입구까지 찾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황극린은 장보도가 있었기에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고, 진의 열쇠가 되는 인면지주의 실을 뽑아 만든 의복이 있었기에 손쉽게 내부로 출입할 수 있었다.

우거진 삼림의 초록빛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황극린의 시야에 펼쳐진 건 황량한 돌산과 그 주변에 펼쳐진 모래사장이었다.

‘위화감이 없구나.’

대단하다.

207호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이 정도 수준의 환상진(幻想陳)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보통 환상진에 갇힌다면 이질적인 기운이 사방에서 죄어오는데 여긴 그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현실이라 해도 무방했다.

바닥에 흩어진 모래를 손으로 만져본다.

촉감 또한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건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뇌불,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무인이었군.’

인면지주의 실을 뽑아 만든 보의(寶衣)로 장보도를 만들고, 무공을 숨겨둔 전대의 초고수. 그가 남겨놓은 유산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혈풍뇌전신공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일까? 못해도 흑살문에서 익혔던 무토심법(戊土心法)보다는 훨씬 뛰어나리라.

황극린은 환상진의 위용에 감탄하며 돌산으로 걸어간다.

돌산의 중턱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아마 저 동굴에 뇌불의 유산이 잠들어 있으리라.

돌산을 타고 올라가는 건 약간 힘들었지만, 고작 이 정도 높이에 휴식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턱까지 오르는 데 반 시진이 걸렸다. 의복이 흠뻑 젖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금방 땀을 식혀줄 것이다.

어두웠지만 간간이 동굴 내부를 밝혀주는 등불이 보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계속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니 저것도 환상의 일부일 것이다. 여기서 실존하는 것은 뇌불의 무공뿐이리라.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비동의 깊은 곳으로 발을 들인다.

뚜벅뚜벅.

동굴 사방에 황극린의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얼른 뇌불의 무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멈춘다.

“···.”

비동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있다. 설마 자신보다 먼저 비동에 출입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황극린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알고 있던 과거가 변화하는 걸 목격했다. 서문취아가 가문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기에 예상보다 빨리 장보도가 세상에 드러났었다. 황극린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뇌불의 비동을 장보도도 없이 출입할 수 있다면···.’

초고수다.

아니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매우 희박했다. 황극린이 오랜만에 긴장하며 검을 뽑았다. 당장 비수를 던질 준비를 했다.

이미 발소리를 들켜 암습은 무리다.

상대도 황극린의 기척을 느꼈는지 침묵하는 게 느껴진다. 황극린 답지 않은 실수였다. 가장 먼저 장보도를 얻었기에 비동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확신해버렸다.

일단 뒤로 물러서야 하는가? 물러선다고 저놈이 순순히 보내줄까?

황극린이 실책을 인정하며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비동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고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 사, 살려줘어어어어···!”

황극린이 대답하지 않으니 또 다시 외친다.

“제바아아알···!”

* * *

“그러니까 면벽 수련을 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넝마가 된 옷을 걸치고 가부좌를 튼 노인.

그러니까 자신이 ‘뇌불’이라 주장하는 노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나? 어떻게 황량한 비동 안에서 살아남았느냐고 하니 이끼와 떨어지는 물을 먹고 목숨을 연명했단다.

“그렇다니까! 대체 몇 번을 묻는 거냐?”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될 건 또 무언가! 이 몸이 증명하고 있는데! 응? 일단 먼저 물이나 좀 다오. 그리고 먹을 게 있으면 좀···.”

노인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살이 불에 달구어지는 고통이 느껴진다나? 지금도 경직된 근육과 핏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징그러웠지만, 황극린은 빤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아! 천하의 뇌불 어르신을 이렇게 죽일 셈이냐! 얼른···.”

“싫소.”

“엉···?”

싫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드디어 사람이 나타나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싫다니?

“당신이 뇌불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지만, 진짜 뇌불이 맞다면··· 몸을 회복하기 전에 죽이는 게 맞겠지.”

뇌불의 명성 아니 악명은 무림에 자자하다.

정파나 사파 가릴 것 없이 무림공적에 오른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노인이 회복하게 돕는다? 황극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은혜를 베풀어 살려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할 노인네였다. 확신한다.

황극린이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는다.

그러자 자칭 뇌불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다.

“흥! 어린놈이 사람을 죽여본 적이나 있느냐! 아해야! 사람을 죽인다는 건 말이다···.”

황극린이 다가온다.

그의 움직임엔 일말의 망설임이나 고민이 없었다. 작은 등불에 예기를 발하는 장검이 자칭 뇌불의 심장 부근으로 다가온다. 그는 황극린이 진심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이 미친놈은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

주화입마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쌍한 노인을 말이다. 죽음의 공포에 뇌불이 황급히 외친다.

“그, 그만 멈춰! 제발! 살려다오!”

황극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검이 살을 파고들려는 순간.

“네, 네놈은 내 무공을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더냐? 이 몸이 바로 혈풍뇌전신공의 주인이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황극린의 검 끝이 살갗에 닿은 상태로 멈춘다.

지체하지 않고 심장을 쑤셔버릴 것만 같은 미친 소년이 고민하는 것 같으니, 뇌불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혈풍뇌전신공은 결코 홀로 익힐 수 없는 최상위의 절학이다. 그것의 본질은 소림의 절학 중의 절학 대반야금강공(大般若金剛功)이며 북해빙궁의 빙백마소(氷魄魔笑)를 섞고, 유령 그놈의 유령몽(幽靈夢)의 묘리를 담았다! 네놈이 절대 혼자 익힐 수 없어! 이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음.”

“6성까지 익히면 후기지수 중에선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성에 도달하면 능히 칠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대성하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중원 최강의 무공이 바로 그것이다. 콜록! 콜록!”

피를 토할 듯 열변을 토해낸 자칭 뇌불.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정말 뇌불인가? 그런데 뇌불 정도의 고수가 주화입마에 걸린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긴 했다. 뭐,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 일단 살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황극린이었다.

다만.

“일단 알겠소. 익혀보고 막히는 게 있으면 물어보겠소. 만약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바로 죽을 줄 아시오.”

죽인다는 말을 어찌 저리 쉽게 하는가?

저 어린놈이 얼마나 인생을 험악하게 살았으면, 쯧쯧!

‘세상 말세군! 말세야···!’

뇌불은 속으로 한탄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꾹 눌러 참는다.

“머, 먼저 물 좀 다오···.”

황극린이 챙겨 온 물통을 열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노인네였다. 그렇게 물을 먹여주다 보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근데 아까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지 않았소? 무공명을 어찌 그리 정확하게 기억하시오?”

“쿨럭! 그, 그러게?”

황극린이 자칭 뇌불의 말을 믿지 않은 이유.

처음에 그는 주화입마로 인하여 기억이 드문드문하다며, 자신이 뇌불인건 확실하지만 장보도를 만든 이유와 서산에 환상진을 설치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질문에 답하지 못했었다.

황극린은 어쩌면 악명이 자자한 대마두 뇌불이 이 노인네를 벌주려고 근골을 뒤틀어놓고, 이곳에 가둬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급하는 무공을 보아하니 확실히 무언가 있는 노인네인 것은 확실하다.

“아무튼, 이 몸은 뇌불이다! 밖에서 만났다면 이 몸에게 말 한마디라도 붙여볼··· 수 있었겠지! 난 너같이 귀여운 아이를 참으로 좋아했다!”

“진심이오?”

황극린의 목소리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목숨줄을 쥔 소년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뇌불이 빠르게 부정한다.

“아니다! 농이다. 농! 하하, 하하하하···!”

이런 미친 노인네가 진짜 뇌불일까?

서로가 상대를 미친놈 취급을 하고 있었지만, 각자 원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파멸뿐이겠지만, 일단 황극린은 노인을 살려두기로 했다. 그의 말처럼 무공을 조언해줄 사람이 있다면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으리라.

“이게 혈풍뇌전신공이오?”

“끌끌, 그래.”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뇌불.

재능이 없다면 첫 장에서 막히고 말 것이다.

혈풍뇌전신공이 무엇이냐!

천하의 뇌불이 소림사의 방장마저 무릎 꿇렸으며, 강호 천하를 주유할 때 누구도 그의 앞길을 막아 세울 수 없게 만들어준 절세의 무공이었다. 꼬마 놈이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그놈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면, 절대 홀로 익힐 수 있는 무학의 수준이 아니었다.

어? 그런데 그놈이 누구였더라?

아무튼, 자칭 뇌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버릇없는 꼬마 놈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일 각 아니 반 각도 되지 않아서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때부턴 전세가 역전된다. 꼬마를 잘 구슬려 숨겨둔 영약을 가져오게끔 하고, 그것을 취하여 뒤틀린 근맥을 바로잡는다.

몸을 회복하기만 하면 버릇없는 꼬마 놈의 볼기짝을 마구 때려줄 것이다.

흐흐흐.

감히 누구 앞에서 큰소리를 뻥뻥 쳤는지 알려주마! 피눈물이 흐르도록 해주마!

“크흐흐흐···!”

“조용.”

황극린의 차가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뇌불이 입을 다문다.

‘내가 저딴 꼬마한테 빌빌 기어야 하다니, 흑흑흑. 내 신세가 어찌 이렇게 꼬였을꼬?’

왜 꼬였지?

기억이 흐릿하다.

‘몰라!’

아무튼, 기다리자. 조금만 있으면 버릇없는 꼬마 놈이 무공을 알려달라고 사정할 것이다.

뇌불은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채로 무공서를 탐독하는 황극린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지나갔다.

* * *

‘뭐지? 뭐 하는 거지?’

반 각 정도면 이해가 안 된다며 울고불고 사정할 줄로만 알았다. 노인은 버릇없는 꼬마 황극린의 애간장을 살살 태운 후, 조금씩 알려줄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의지하게끔. 천하의 뇌불 어르신이 없으면 혈풍뇌전신공을 익힐 수 없겠구나. 난 정말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끔 말이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건 오히려 자칭 뇌불이었다.

황극린은 빠르진 않지만, 묵묵히 무공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거기다 마치 혈풍뇌전신공에 담긴 심득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이 간간이 작은 탄성을 터트리면서 말이다.

끄덕끄덕.

보아라. 대체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가? 설마 진짜로 이해했다는 말인가?

“저, 저기···.”

황극린은 워낙 집중한 탓인지 뇌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해야···?”

“잘 되고 있느냐? 이해가 되는 것이냐?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왜 대답이 없느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대체 왜 그러시오? 심심하시오?”

집중을 방해받은 황극린의 목소리엔 작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 이놈이!’

노망난 노인네 취급도 정도가 있지!

뇌불은 발끈할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큼큼···. 참으로 어렵지 않으냐? 혈풍뇌전금강공은 자연의 온전한 기운을 그대로 담는 무공이라 평범한 무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걸 익히려면 세맥 자체를···.”

황극린이 고개를 갸웃한다.

“세맥이 아니라 혈맥이 더 중요해 보이는데?”

“뭐, 뭐라고!”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지만, 순간 뇌불은 자신이 움직였다고 생각했을 만큼 놀랐다.

벌써 거기까지 읽은 건가? 아니, 읽긴 했겠지만 세맥보다 혈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이해가 됐다는 말인가?

“신기하고 특이한 무공이오. 정파의 무공도 아니고 사파의 무공도 아니고··· 확실히 대성하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듯하군.”

분명히 자신의 무공을 극찬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일까?

‘설마··· 에이, 아니겠지?’

뇌불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버릇없는 꼬마 놈이 막히는 순간까지 말이다. 설마 혼자서 혈풍뇌전신공을 익힐 수 있을 리 있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된다.

절대 불가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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