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3화 (23/316)

벌을 주다

“뭐라고?”

알려준다고? 지금 황극린이 반말을 지껄인 건가? 감히?

가문의 죄인인 주제에 뭘 잘했다고?

거기다 비무에서 보여준 것은 또 뭐고?

“마침 검도 쥐고 있군.”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구나.”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군. 알고 싶은 게 있지 않나? 검을 뽑아라.”

“허··· 허···.”

황보휘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는다.

비무의 결과를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황극린을 쫓았다. 그런데 고작해야 만공무관의 관도 하나를 이겼다고 기고만장이었다.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닌가?

“넌 네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

“그래, 그래. 재능이 없다고 말하진 않으마. 운이 좋았다고 한들, 주수한을 이긴 것은 대단한 업적이겠지. 하지만 말이다. 무림은 넓단다. 극린아. 무림엔 너 같은 재능이 깔려있다. 강서성만 따져 보아도 너보다 뛰어난 이들이 수만 명은 되겠지.”

당장 황극린을 병신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참아낸다. 이런 풋내기를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처리할 순 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계획을 무식하게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고상한 방법으로 황극린에게 벌을 줄 것이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내가 소리쳐서 놀랐나 보구나. 자, 돌아가자. 관중들에게 돌아가 인사하고, 패자에게 격려를 건네서 승자의 격을···.”

“지랄.”

“···?”

뭐? 황보휘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생각했다.

화를 꾹 눌러 참고 봐주려고 하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면 막지 마라.”

황극린이 몸을 돌린다.

마치 너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이 황보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봐주고, 봐주고 또 봐주어도··· 멍청한 놈은 분수를 모른다. 매가 약이었다.

“멈춰.”

당연히 황극린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황극린!”

경공까지 펼쳐 황극린의 앞을 가로막는다.

황보휘의 눈동자에 명확히 떠오른 살의. 황극린은 그의 살의에 입꼬리를 올렸다.

“내게 알려다오. 네가 믿는 게 뭔지.”

“좋다.”

황극린도 검을 뽑았다.

무당파의 속가제자와 고작 칠주야 검을 배운 소년. 결과는 자명해보였다.

“그만! 멈춰! 두 사람 왜···!”

뒤를 쫓아온 서문취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황보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전투는 시작됐다. 황극린은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이놈!”

황극린의 검은 둔탁하고, 느렸다.

황보휘는 검공을 쉽게 튕겨냈으며, 곧이어 반격했다. 무당의 현묘한 초식이 발현되려는 순간이었다.

“틀에 박혔군.”

“무슨···?”

순간 황극린의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분명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카앙!

마치 뱀처럼 휘어 옆구리를 찔러오는 검. 이건 황보휘가 가르친 초식이 아니었다.

“흐읍!”

황보휘의 단전에서 태극의 기운이 솟아오른다.

내공이 세맥을 따라 흐르면,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었다. 황극린의 지금 공격은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옆구리로 파고드는 검격을 막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황극린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하단에서 상단으로. 상단에서 하단으로. 분명 철로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한 검인데도, 이리저리 휘어져서 달려드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윽!”

챙! 캉! 캉! 캉! 캉!

‘이게 대체···!’

반격할 수가 없었다.

무당의 속가제자로 4년 동안 수련했던 황보휘였다. 비무는 수많이 해보았다. 무당파에서 만난 친우인 제천회의 고강복과 광성문의 강철진까지. 황보휘는 비슷한 재능의 친우들과 무당파에서 수학하며 무를 갈고 닦았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반격할 틈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황보휘는 내공까지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크읏!”

황보휘가 연신 뒤로 물러선다.

황극린은 만공무관의 주수한과 했던 것처럼 간을 본다거나 봐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틈과 틈을 노려 상대를 압박할 뿐이다.

황보휘는 그런 황극린의 공세에 점점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나마 잘 막아내는가 싶더니 공방이 십 합이 지나고 나니 자세가 엉망이 되어 있다. 당장이라도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나마 황보휘가 무당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보법을 익혀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패도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위주의 무공을 익혔다면, 이미 넘어졌으리라. 뭐,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이익!”

이대로는 완전히 당한다.

고작 칠주야 동안 검을 익힌 황극린에게 말이다. 이놈이 정말 칠주야 동안 검을 익힌 것이 맞냐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서문취아의 앞에서 이딴 죄인의 아들놈에게 패배할 순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단전의 내력을 폭발시킨다. 아직 내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황보휘다. 애초에 내력이라는 건 심지어 초절정에 이른 고수도 제대로 다룬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단지 황보휘는 내력을 억지로 끌어올릴 뿐이다.

단전과 더불어 오장육부가 후끈후끈하다. 까딱 잘못하다간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죽어라-!”

하지만 강렬한 기세로 그 고통을 덜어낸다.

황극린만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상을 입어도 괜찮다. 어차피 돈이야 많았으니 치료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오행검(五行劍) 폭풍만리(暴風萬里).

무당의 가르침은 헛되지 않았다. 황보휘는 이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무공을 펼쳐낸다. 흐트러진 기세를 바로잡으려면 바람의 흐름을 탈 수 밖에 없었다. 폭풍에 휩쓸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껏 방어만 하던 황보휘가 상처를 각오하고, 공격으로 전환한다.

횡으로 검을 베어가며 황극린의 목을 노린다. 놈이 피하거나 막는다면, 다리나 팔을 공격하여 움직임을 제약할 것이다.

“으아아아-!”

평소였다면 황극린을 상대로 이렇게 기합을 내지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황극린에게 검을···.

순간.

패배할 수도 있다는 압박에 집중이 극한에 달했던 황보휘.

그는 볼 수 있었다.

황극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말이다.

“···!”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큰 공격을 한 게 실수였나? 이제껏 계속 압박만 한 것은 이걸 노린 건가? 모든 게 다 의도되었다고? 대체 왜?

그 생각이 끝나는 순간.

황극린의 검이 황보휘의 어깨를 관통했다.

“컥!”

동시에 눈앞이 번쩍한다. 황극린이 팔꿈치로 황보휘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버텨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비무한 적은 없다. 패배가 정해지면 멈추는 게 당연했지만, 이렇듯 팔꿈치로 머리를 가격당한 적은···.

“헙!”

눈을 뜨자 황극린의 얼굴이 보였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검을 쥐었던 손에 감각이 없었다. 어깨를 찔렸기 때문일까?

“네가 하려고 했던 짓을 알고 있다. 주수한을 시켜 날 병신으로 만들려 했었지.”

“구게··· 무··· 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머리를 맞아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죽이진 않겠다.”

“어떻게···?”

황보휘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만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황극린이 이토록 강한가? 무당에서 4년 동안 무공을 배웠다. 아무리 속가제자라고 해도··· 어떻게 황극린에게?

“아주 작은 상처를 남겨주마.”

“무어···? 끄, 끄아아아악-!”

황보휘의 오른쪽 귀가 잘려나갔다.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황보휘는 그냥 죽이는 게 오히려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황극린도 그에게 좌절을 심어주기로 했다. 두고두고 이날을 상기하며 고통받는 것이 그의 벌이었다. 동경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을 때마다 황보휘는 오늘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도 주제를 모르고 또 덤벼든다면··· 오히려 황극린이 환영할 일이다.

“그, 극린아! 그만! 대, 대체 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서문취아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황극린은 스스럼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극린···!”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황극린이 말한다.

“내가 왜 그랬을 것 같나?”

그녀에겐 악의가 없다. 단지, 매번 살갑게 굴던 그녀가 귀찮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장보도를 찾는 수고를 덜었으며, 124호를 죽일 기회를 얻었다.

“황보휘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를 위해서도. 네 가문을 위해서도.”

황극린이 몸을 돌려 떠나간다.

서문취아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그가 보여줬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사람의 귀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버리는 그 모습이 말이다.

서문취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황보휘가 발작한다.

“끄아아아악! 죽여버릴 거야! 개자식! 죄인의 아들 주제에! 황극린! 황극린! 황극리이이인!”

“···.”

서문취아는 이런 모습의 황보휘를 처음 보았다.

사촌 형으로서 황극린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줬지 않았던가? 왜 두 사람은 비무가 끝나고 이렇게 싸웠을까? 그 짧은 비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

서문취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단지, 세상을 너무도 낙천적으로 보고 있었을 뿐.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겐 이 상황 자체가 충격이었다. 강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으리라.

* * *

황극린이 말을 타고 떠났다.

당연히 황씨가문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자랑스러운 황씨가문의 첫째가 죄인의 아들에게 귀를 잘리고 돌아왔다. 거기다 그 자리에 있던 서문취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보휘는 귀에 붕대를 감은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시 교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시운량 교관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거기다 황극린이 황보휘를 이길 만큼 강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진 않았다.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시운량 교관이 오늘 비무에서 벌어졌던 일을 말해준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가주도 알고 있을 내용이었다.

“황극린, 기어이 네놈도 아비처럼···!”

분노에 차오른 황천옹.

시운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한다.

“왜 잘 대해주지 않았습니까?”

“뭣이오?”

“왜 그 어린아이를 죄인 취급하셨습니까?”

“당신이 그 아비를 몰라서···.”

“가주께서 죄를 지었다면, 황씨가문 전체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시운량의 말은 정론이다.

하지만 상인은 말발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강호의 법도는 원래 그러한···.”

“그럼 황극린이 황씨가문을 전체를 멸문시키러 와도 불만이 없으시겠군요?”

“그게···!”

그런데 황천옹이 입을 다물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구속되었다. 다만, 당장 그 부분에 반론하지 못하더라도 주제를 바꾸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놈이 대체 무어라고 황씨가문을 멸문시킨다는 말이오? 시 교관! 너무 주제 넘는···.”

“전 오늘부로 황룡무관의 교관직을 그만두겠습니다.”

시운량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당연히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황천옹은 당장 시운량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오?”

황천옹이 묻는다.

시운량이 고개를 돌린다.

“황극린이 황씨가문 전체를 멸문시킬 수도 있다는 말. 사실이냐는 말이오.”

“모르지요. 어쩌면 무관주의 귀를 자르고 황씨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오.”

시운량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는 지금 황극린의 ‘능력’에 관하여 묻고 있었다. 그가 과연 황씨가문을 멸문시킬 힘이 있는지를, 재능이 있는지를 말이다. 그럴 힘이 없다고 말하면 뭘 하려는 걸까?

“저도 잘한 것은 없지만··· 당신은 정말 역겹군요.”

황천옹이 그런 말에는 익숙하다는 듯이 미소짓는다.

“상인이란 그런 법이오. 원한과 은혜는 잊지 않는 법이지. 이해득실을 살펴 행동할 뿐이라오. 그러니 시 교관, 아니 당신도 조심하시오.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소. 그 아이가 가능할 것 같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자신만의 무관을 차리고자 상인 놈들과 엮이는 게 아니었다.

강호의 무인과는 또 다른 역겨움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상인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환멸이 나는군.’

그렇게 시운량 또한 황씨가문에서 떠나갔다.

* * *

“여긴가.”

황극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뇌불의 비동이 있는 곳까지 향했다.

길을 찾는 것은 살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지도까지 있었으니까.

‘진이 구축되어 있군.’

진법(陳法).

자연의 힘을 묶거나 증폭시켜 기이한 현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무공의 하나라 말할 수 있겠지만, 무림인들이 쉬이 익힐 부류의 것은 아니었다. 황극린은 살수 시절 진법의 보호를 받는 표적들도 몇 상대해보았기에 진법의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다.

‘진을 통과하려면···.’

입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한쪽 공간이 비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감각의 문제라기보다는···.

화아아아···!

황극린이 들고 있는 의복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걸 입어야 진입할 수 있는 건가?’

황극린이 의복을 입는 순간.

진이 그를 집어삼켰다.

우거진 숲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황극린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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