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2화 (22/316)

더욱 선명해진 의심

비무가 시작됐다.

만공무관의 주수한. 그는 5년 동안 검법을 익힌 무인이었다. 강호 전체로 따지자면 그는 결코 고수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황극린의 상대로 낙점된 것이다. 황보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무장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극린아, 어디 한 번 수련한 것을 보여보아라. 그리고 추락하거라.’

황보휘는 기억한다.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를 말이다. 그 또한 재능을 인정받긴 했으나 초심자들은 대개 그렇듯 자신감이 넘친다. 붕붕,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공간을 가르는 듯하며, 자신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임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황보휘도 그러했다. 남창에서 재능이 있다고 자만심이 차올랐지만, 무당파로 간 순간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의 오만했던 자신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불을 걷어차곤 한다.

무림은 넓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제 세상인 줄 알고 날뛰지만, 우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파멸하고 만다. 옆에서 조언해주는 선배가 없다면 말이다.

황극린은 우물 안 개구리다.

그렇기에 이번 비무에서 큰 사고를 당할 것이다. 황보휘는 고작해야 과거의 기억이 부끄럽다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황극린은 다를 것이다. 듣자하니 시운량 교관의 훈련도 빼먹고 검에 심취했다고 하니 예상이 된다.

“형님, 황극린이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무관이 망신당할 수도···.”

이미 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황씨가문의 둘째 황일남.

그가 황보휘의 옆에서 소곤거린다. 서문취아도 그것을 들은 모양인지 불안한 눈빛을 한다. 황보휘가 황극린의 추락을 기다리는 건 맞지만, 서문취아에겐 잘 보여야 했기에 진중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한다.

“걱정하지 말아라. 극린이는 열심히 수련했다. 패배하더라도 망신은 아니지. 모든 무인은 패배를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황일남은 황보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으리라.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싸워라!”

이전까지의 비무에선 모두 시작종이 울리면 앞으로 튀어나가 실력을 보이기에 혈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비무는 서로 검만 쥐고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황극린의 상대인 만공무관의 주수한은 답답했다.

그는 누군가와 거래를 했다. 비무 중 불의의 사고를 만들어낸다면 금자 열 냥을 받기로 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실력이 부족한 황극린을 대놓고 압박한다면 비무가 지속될 수 있을까?

몇 번 공격을 받아주다가 슬쩍 검을 찔러넣어야 했기에 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건만, 황극린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긴장되어서 그러나?”

주수한이 입을 열었다.

“다섯 수를 양보해주마. 그러니 마음껏 배운 것을 펼쳐 보여라. 비무는 꼭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제법 목소리가 컸기에 관중들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황극린이 긴장했다고 생각한 이들이 응원을 시작한다.

“못 싸워도 괜찮으니 힘내라!”

“열심히 해!”

“몸조심해애!”

마지막에 외친 것은 서문취아였다.

황극린은 응원의 목소리에 힘이 난 것인지 드디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제법 모양은 나왔건만, 황보휘가 보기엔 한참 애송이에 불과했다. 겉멋만 잔뜩 들어간 검법. 그가 가르쳐 준 것과 똑같았다.

‘뭐, 그래도 나쁜 재능은 아니군.’

칠주야 만에 저 수준까지 올랐으니 제법 노력했으리라.

재능도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좋았다.

채앵! 챙!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친다. 검법은 공격하는 법뿐만 아니라 방어하는 법도 배운다. 주수한이 자연스럽게 황극린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기에, 주먹을 휘두르던 비무보다는 확실히 볼 맛이 났다.

어차피 대다수 관중은 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지도 못한다.

단지, 진검과 진검이 부딪치는 짜릿한 광경에 열광했을 뿐.

캉, 카앙, 카앙!

황극린이 기세를 타고, 더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자신감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혀, 형님?”

예상외로 황극린이 더 잘해주는 것 같으니 황보휘가 이것 보라는 듯이 미소짓는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극린이는 열심히 했다고.”

“그렇군요···.”

황일남은 단순했다.

그냥 가주를 위시한 집안 어른들이 황극린을 하찮게 여겼기에 싫어했던 것이다. 황극린이 비무에서 활약하는 것 같으니 그리 기분 좋지가 않았다. 형님은 왜 황극린이 잘하는 데 흐뭇하게 바라보는 걸까? 이해가 잘 안 된다.

‘조금만, 조금만 더.’

황극린의 검세가 빨라질수록 황보휘는 흥분했다.

파멸의 순간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지금.’

황보휘가 신호를 보냈다.

만공무관의 주수한의 기세가 달라진다. 이제까지 황극린의 공세를 받아내기만 했다면, 이제는 반격할 시간이다. 조금의 실수를 곁들인 반격 말이다.

“합!”

기합성을 터트리며 검을 휘두른다.

사선으로 그려진 검로. 힘으로 황극린을 밀어내고 빈틈을 만들 것이다. 틈이 벌어지면 검을 꽂아 넣는다. 잘린 힘줄은 절대 회복되지 않으리라.

주수한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사아악!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 마치 황극린의 검이 뱀처럼 휘감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이번 공격에 황극린은 힘에서 밀려 뒤로 물러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는 분명히 고작해야 검법을 배운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칠주야라고 했던가?

‘우연이겠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비무 중 기회는 많았다.

“하아압!”

또 다시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찔러넣는다. 이번에는 확실히 황극린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스르으윽!또 다시 뱀이 휘감기는 느낌. 황극린이 밀리긴 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빈틈이 생겨나질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균형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무슨?’

주수한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검세를 흘려낸 건 우연이 아니다. 황극린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검의 초심자라면 한 번에 반격에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격은 왜 이렇게 허술한 거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황극린이 정말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금 이 공격은 왜? 일부러 봐주고 있다는 말인가?

당황한 주수한이 시선을 옮긴다.

황보휘가 눈살을 찌푸린다. 신호를 주었는데도 계속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공격하는 것 같지만, 힘을 제대로 싣지 않았는지 황극린의 검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열성적으로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서문취아가 감탄을 터트렸다.

초롱초롱 눈이 빛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극린이··· 검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뭐?”

이제까지 황극린이 열심히 했다며 칭찬하던 황보휘였지만,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황극린이 재능이 있다고? 아니다. 저놈은 그냥···.

“유검(柔劍). 강직한 나무는 폭풍에 부서지지만··· 부드러운 갈대는 흔들리기만 할 뿐, 부서지지 않아.”

“그게 무슨···.”

서문취아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었지만, 무공의 경지가 황보휘보다 높았다.

재능이 있었기에 가문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 만큼 서문취아의 말은 허투루 들을 순 없었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황극린은 고작해야 칠주야만 검을 익혔다. 상대의 검격을 흘려낼 수 있다고?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게 말이 된다고?’

몇 번의 공세가 막히자, 주수한의 눈빛이 완전히 변화했다.

이대로 있으면 약조한 돈도 받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이제 막 검을 익힌 어린 소년에게 번번이 막히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봐주지 않는다. 어찌 됐든 힘줄을 끊어놓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던가?

“합-!”

청룡출수(靑龍出水).

주수한이 오른발을 내디디며 검을 찌른다. 동시에 왼손을 들어 올려 청룡의 기세를 내포한다. 무림에 유명한 삼재검법의 초식 중 하나. 베기가 아닌 찌르기였기에 흘려내기 힘들다. 거기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황극린의 살점을 뚫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말이다.

그 순간.

황극린의 눈빛도 변화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살의.’

살기와는 다르다.

살의를 유형화하여 방출하는 것이 살기다. 살의는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누군가 부정적인 감정으로 검을 휘두르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황극린은 비무를 하면서 황보휘가 보낸 신호를 보았다. 그때부터 주수한의 기세가 바뀌었고, 지금은 그걸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황극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보휘가 이 비무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를 말이다. 이제 곧 황씨가문을 떠나려 했기에 조금만 놀아주겠다는 심보였다.

그랬기에 짜증이 났다.

아버지의 잘못? 이미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씨가문의 가주 황천옹의 여인을 빼앗았다지? 어릴 때 사라진 어머니가 확실히 황천옹의 여인이 맞았나? 애초에 연인이라는 게 뺏을 수 있는 것이던가?

그건 그렇다고 쳐도 왜 어린 황극린을 몰아붙였었는가?

아버지는 그런 것을 알면서도 왜 황씨가문으로 보냈는가?

과거엔 그냥 도망칠 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더 놀아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쉬익!

급소를 향해 날아오던 주수한의 검. 청룡출수를 공들여 연습했던 모양인지 깔끔하고 빨랐다. 하지만 황극린은 이미 그가 자세를 잡기 전부터 어떻게 공격할지 알고 있었다. 상대의 다음 검로가 어딘지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대의 다리를 보면 된다.

하지만 황극린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보법을 펼치지 않았으니까.

“아악! 극린아!”

정형화된 검법엔 순서가 있다.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그 경계가 옅어지지만, 초심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공격하기 전 준비과정이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보법을 펼쳐 힘을 실은 다음 검을 휘두른다. 황극린은 마치 그것을 예상하지도 못한 듯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꺄아아악-!”

서문취아 뿐 아니라 다른 관중들도 비명을 지른다.

주수한의 검이 황극린의 등을 뚫고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

황보휘가 벌떡 일어선다.

반대 방향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그 또한 황극린의 가슴이 꿰뚫린 줄 알았다. 그가 죽지 않으면 하는 바람과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공존한다. 아마 후자에 가까우리라. 그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바로 지척에서 심판을 보고 있던 만공무관의 관주 송진진은 보았다.

고작 반 치도 안 되는 차이로 황극린이 주수한의 검을 피해내는 것을 말이다.

크게 움직여 검을 피하는 건 무공을 배우지 않더라도 할 수 있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살의와 멀어지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무인끼리의 싸움에선 그런 움직임 하나가 크나큰 실책으로 남는다.

기세에서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쉬이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무인들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거나 피해내길 원한다. 그 공격만 피하면 전투의 흐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황극린은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멈춰! 그만!”

황극린의 검은 정확히 주수한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어···? 어···.”

“그만두라고!”

만공무관주가 달려와 황극린을 몰아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주수한이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관중 모두가 깜짝 놀란다.

분명히 황극린의 몸이 꿰뚫린 게 아닌가? 오히려 피를 흘리고 있는 건 주수한이었다.

“수한아! 수한···!”

가슴팍의 상처를 살펴보던 만공무관주.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상처가 이렇게 얕다고? 가슴이 뚫린 게 아니란 말인가?’

가장 어려운 게 적당히 찌르는 거다.

적이 위협할 때, 검을 찌르는 시늉만 하지 찌르지 않은 것은 실수로 깊게 찌르기라도 하면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살점은 강철로 만든 검보다 연약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서 힘 조절을 했다?

주수한의 청룡출수를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면서?

고작 열넷의 소년이?

비무가 끝나고, 승자가 선언되어야 하지만 황극린은 그냥 비무장을 내려갔다.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익!”

그리고 황극린을 증오하는 한 사람.

황보휘가 검을 챙겨 그를 뒤따른다.

* * *

“거기 서!”

“···.”

황극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황보휘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살의가 느껴진다. 그의 오른손은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어떻게 네가!”

순간 바람이 몰아친다.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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