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1화 (21/316)

의심 어린 기대

살수에겐 끈기와 인내가 중요했지만, 더 막중히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표적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다. 황극린은 단순히 124호를 따라다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자주 가는 장소는 어디인지, 그곳에 어느 정도로 머물렀는지, 편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어딘지. 언제 황씨가문을 나서는지를 살펴보았다.

황보휘가 알려준 검법을 수련한다는 핑곗거리로 연무장에도 나가지 않았기에 시간은 많았다.

살수는 표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표적이 가장 긴장했을 때가 언제고, 가장 마음을 놓았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초반 며칠은 황씨가문의 감시망을 신경 썼던 124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대범해지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장원 외각에 있는 우사에서 잠을 청했다. 그곳에 살던 누렁이마저 팔려갔으니, 124호는 아마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대범해지면서도 촉박함을 드러냈다.

창고에 들렸다가 나온 것을 황극린이 확인했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군데군데 살펴본 흔적이 발견됐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창고를 살행 장소로 정해놓았었다.

육포나 말린 생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 음식 냄새가 진동하기에 살수의 예민한 후각으로 누군가 숨어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거기다 야밤의 창고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그가 심리적으로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장소일 것이다. 거기다 오늘 저녁쯤 새 상품들이 들어왔었다.

당연히 우사에서도 준비를 해놓았었다.

바닥에 깔린 볏짚을 치우고, 땅을 판다. 다행히 몸이 작았으니 땅 파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판자를 깔고, 검날만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팠다. 그런 다음 볏짚을 깔면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준비해놓긴 했었지만, 사실 이곳에서 살행을 하진 않을 것이라 여겼었다.

서문취아가 뇌불의 장보도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난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말이다.

조만간 흑살문의 역학조사가 시작될 것이라 조급해졌던 124호.

황씨가문에서 일하는 호위 무사들의 역량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범해진 124호.

황극린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허무한 죽음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유명한 흑살문의 상급 살수가 고작 14살 어린 꼬마에게 죽는 허망한 죽음이 말이다.

심장을 꿰뚫리면 사람은 죽는다.

그건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고수나 일개 삼류 무사나 마찬가지였다. 황극린 또한 심장이 꿰뚫려 죽었으니까.

치이익-!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나무통에 담긴 물을 부어 불을 끈다. 다행히 불이 크게 번지진 않았다. 124호가 급박한 상황에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고 해도, 우사 전체를 태워 먹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124호.”

과거처럼 시간이 흘러갔다면, 그는 금방 죽는다.

그것이 흑살문이 의도한 것인지 124호의 자질 미달로 임무에서 실패해서 죽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황극린이 직접 그를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여러 이유를 붙여가며 살인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었다. 강호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과거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정의롭게 살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마두 놈들처럼 아무나 죽일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황극린은 무표정하게 뒤처리를 한다.

그냥 시체를 묻어놓고, 황씨가문에 뒤집어씌우면 되지 않느냐고? 어차피 황씨가문은 황극린에게 못된 짓만 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황극린은 흑살문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 관련도 없는 황씨가문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특수 임무대는 기필코 황극린을 추적할 것이다. 흑살문의 집요함은 중원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황극린은 중원의 소문보다 흑살문이 더 괴물 같은 집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금기(禁忌)로 치부되는 혈고독을 이용하여 인간을 조종하는 놈들이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황극린은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흑살문의 상급 살수를 죽였다고, 흑살문과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상급 위에 최상급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그조차 도달하지 못했던 ‘특급’ 살수 셋과··· 괴물 노인 하나가 있었다. 뭐, 상급 살수 한 명이 죽었다고 그들이 모두 황극린을 쫓진 않겠지만 지금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적들이다.

‘지금 당장은 말이지.’

일단 124호의 품을 뒤진다.

그가 무엇을 가졌는지 확인한다.

살수는 아랫도리 부근에 가장 소중한 걸 숨긴다.

‘황?’

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작은 종이.

‘무공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다면 죽이지 않고, 심문했었을 텐데.’

대충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상상일 뿐이었다. 대충 소매 속에 종이를 넣어두고, 다른 것을 찾아본다.

“횡재했군.”

평소 황극린 치고는 목소리가 밝았다.

흑살문의 비수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외형을 가지고 있다. 최근 묵철로 황극린이 만든 모양과는 달랐지만, 어딜 가든 비슷한 비수를 구할 수 있으리라. 다만, 품질이 몹시 뛰어나다는 게 달랐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 자주 관리하지 않아도 예리함을 유지한다.

거기다 허벅지나 발목 등에 비수를 보관하기 쉽게 비수집도 마련되어 있었다. 황극린도 과거엔 흑살문 출신이었으니 그들의 병기가 더 손에 익는다. 묵철 비수도 있지만, 회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수를 사용할 때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외엔 은자 몇 냥과 금창약 그리고 위조한 신분패 등이 존재했다.

황극린은 그걸 모조리 다 챙겼다. 굳이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다 언젠간 쓰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은 124호의 시체를 마대자루에 집어넣는다. 피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여려 겹을 싼다. 당장 시체를 들고 빠져나갈 순 없었다. 추후 황씨가문을 나갈 때 처리할 것이다.

‘화장은 해주도록 하지.’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으리라.

황극린은 황씨가문을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의복은 불씨에 전혀 타지 않았다. 예상대로 기괴한 선들이 잔뜩 생겨나 있었다. 거기다 소매 안쪽에는 짤막한 설명도 적혀 있었다.

- 천하를 얻을 자, 이곳으로 찾아오너라.

뇌불이 남길 글귀일 것이다.

“혈풍뇌전신공이라···.”

무영심결로 세맥의 불순물들을 거의 제거했다.

그의 나이는 14살이었지만, 5살 수준의 깨끗한 세맥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내공을 운기할 수 있을 것이며, 한계 자체가 달라졌으리라. 과거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재밌겠군.”

이제 진짜 무공을 익힐 때가 되었다.

황극린은 124호의 시체를 숨겨놓은 후, 장보도와 획득한 물품들을 챙겨 우사를 빠져나왔다.

* * *

당장 떠날 수도 있었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첫째로 비 노인과의 이야기다.

“비 노야, 당분간은··· 옥보단을 팔지 마십시오.”

“그래, 그러도록 하마.”

비 노인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황극린의 말을 수긍한다.

황극린이 바빠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는 것이다. 비 노인도 그걸 유통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돈을 만지고 있었지만, 그에겐 그것보다 황극린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안 물어보십니까?”

“네가 다 생각이 있지 않겠느냐? 오히려 이 노인네의 생각으로 너를 방해할까 봐 무섭구나.”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황극린은 황씨가문에서 곧 나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마 뇌불의 장보도가 있는 비고에서 당분간 무공을 익히리라. 비고이니만큼 아마 수련할 환경을 마련해놓았을 것이다.

황극린의 들은 비 노인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어이쿠! 잘 생각했다! 무공을 익히고 있어도 첫째 도련님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서웠는데··· 잘 생각했어!”

비 노인은 필요한 것이 없느냐며, 지낼 곳이 없으면 자기 집에 찾아오라고 했다.

아마 찾아갈 것이다.

그에겐 줄 것이 있었으니까.

“예.”

“그런데 오늘 비무 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진검을 들고 비무를 한다면서?”

“어찌 알고 계십니까?”

“서웅이에게 들었단다.”

주서웅과 비 노인은 최근 친해졌다.

매번 아이들을 괴롭히던 주서웅은 무공을 익힌 다음, 정확히 말하면 황극린에게 당한 후부터 아무리 약해 보여도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뭐, 좋은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제껏 열심히 했는데··· 비무는 하고 가야겠죠.”

“그래, 그래도 조심하거라. 다치지 말고. 응?”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만···.”

“응, 무어냐?”

황극린은 비 노인에게 돈이 든 행낭을 건네주었다.

“말을 좀 구해다 주십시오. 그리 좋은 말은 아니라도 됩니다.”

124호의 시체를 옮기고, 뇌불의 비고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말이 필요했다.

* * *

만공무관과 황룡무관의 비무.

급하게 두 무관 사이의 비무가 잡힌 것은 당연히 황보휘 때문이었다. 점점 피부 안색이 좋아지고, 활력이 돋아나는 것을 본 황천옹이 황극린을 쳐내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보휘는 예상보다 빠르게 비무 계획을 잡았다.

‘황극린이 더 성숙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무공이 재미를 붙인다.

자신도 무림인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희망과 꿈. 모든 것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에게 좌절을 심어준다.

그것이 황보휘의 계획이었다.

“정말 하시려는 겁니까?”

시운량 교관이 나지막하게 묻는다.

황보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

시운량 교관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황극린으로 인해 황보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만, 시운량 교관도 그 부분이 긴가민가하기도 했다.

과연 황극린은···.

어떤 사람일까?

훈련 때마다 그를 지켜보며 판단하고 평가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희륭과의 비무 후에는 황극린의 평가를 완료했었다. 재능이 없다고 말이다. 시운량은 그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비무를 지켜보면 알 것이다.

황극린이 어떤 놈인지.

“가시죠.”

“예.”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기대를 품은 채, 만공무관으로 향했다.

이번 비무는 만공무관의 배려로 비무가 치러지는 것이기에 그들의 공간에서 비무를 치르는 게 당연했다. 뭐, 사실 비무라기보단 만공무관이 황룡무관의 초보 관도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만공무관에 도착하니 꽤 인파가 몰려 있었다.

황룡무관주 황보휘와 만공무관주 송진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다. 송진진의 옆에는 길쭉한 말상의 청년이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이 주인공이었다. 황극린에게 좌절을 심어줄 주인공 말이다.

“시작하시죠.”

“예.”

그렇게 황룡무관과 만공무관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첫 경기는 상희륭과 만공무관의 가득연이었다. 상희륭의 무공에 관한 집착과 끈기는 시운량 교관조차 놀랄 정도였기에 확실히 꽤 괜찮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물론, 만공무관의 가득연이 상희륭을 설렁설렁 봐주면서 한 것도 있었다.

무림 고수들의 비무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투박한 맛에 보는 비무였다.

군중들 또한 서로 마음이 가는 이들을 응원하며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당연히 황보휘로서는 그다지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두근거렸다.

황극린이 절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준다. 황극린은 자신을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리라. 그가 완전히 자신에게 의지할 때.

‘손을 놓아버린다.’

재기할 수 없으리라.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더럽군.’

옆에서 시운량이 황보휘의 미소를 바라본다. 소름이 끼친다. 처음엔 거부의 자제치고는 예의가 있고, 생각이 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면에는 잔혹하고 추잡한 심리가 깃들어 있었다. 그걸 알아본 후부터 시운량은 황보휘의 얼굴만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보휘야, 근데 왜 극린이는 진검으로 하는 거야?”

“아··· 그건 말이지.”

서문취아가 문득 궁금한지 질문했다.

친절하게 황보휘가 답을 해주었다.

서문취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설마하니 황보휘가 황극린을 병신으로 만들기 위해 짠 판이라는 걸 예상하진 못했다. 서문취아는 순수했으며, 누군가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서문세가에선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을 테지만··· 언젠간 그것이 독이 되어 돌아오는 날이 있으리라.

아무튼.

한 시진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경기는 진검으로 펼쳐지는 것이오! 비무장에 가까이 오지 마시오!”

엄숙한 만공무관주의 발언.

비무장을 침범할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관전하던 이들이 물러난다. 눈먼 칼에 맞아서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위, 위험한 건 아니겠지? 만공무관에서···.”

서문취아가 걱정 어린 말을 할 때.

“걱정하지 마. 극린이는 내가 검을 가르쳤거든. 흐.”

황보휘는 드디어 황극린의 몰락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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